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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책 대담 (11) 「막스 플랑크 평전」 vs.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본문

완결된 연재/(完) 책 대 책

책 대 책 대담 (11) 「막스 플랑크 평전」 vs.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Editor! 2012. 8. 1. 16:12

책 대 책 7월 17일자 대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VS 『막스 플랑크 평전』


거인들의 시대




과학의 역사에서 이정표가 되었거나 과학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책을 중심으로 인물 대 인물, 이론 대 이론, 명강의 대 명강의 등 두 권의 책을 비교 분석하는 <책 대 책>. 그 열한 번째 대담회가 APCTP(아태이론물리센터)와 사이언스북스, 채널예스 공동 기획․주관으로 지난 7월 17일(화) 저녁 7시 강남 출판 문화 센터 5층 민음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나치의 공포정치라는 서구 역사 중 가장 급박하고 가장 모순적이며 가장 참담한 시기를 살았음에도 가장 위대한 과학 연구소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막스 플랑크.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를 맡아 원자 폭탄을 개발에 성공했지만, 핵전쟁을 막기 위해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순간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버린 비운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찬란한 성공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후대의 평가를 받은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앞에 등장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어떤 자세로 맞이했는가? 그리고 과학은 거기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7월 <책 대 책> 대담회에서는 마틴 셔윈, 카이 버드가 25년의 세월을 거쳐 집필한 오펜하이머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독일 콘스탄츠 대학 과학사 교수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한 인간으로서의 막스 플랑크를 다룬 『막스 플랑크 평전』을 선정해,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두 물리학자를 통해 불확실성의 시대에 취해야 할 과학자의 본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번역한 최형섭 서울 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가 직접 서평을, 김재영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수가 『막스 플랑크 평전』의 서평을 쓰고 대담자로 나섰으며 국형태 경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대담자와 사회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후, 본격적인 대담이 시작되었다.



국형태:(사회자): 7월 책 대 책 대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책이나 대중에게 큰 의미를 준 책을 선정해서 과학적인 시각 대 시각, 아니면 인물 대 인물을 대비시키는 이 대담회가 작년 9월에 시작했으니 다음 달이면 벌써 1년이 됩니다. 오늘 선정된 두 책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막스 플랑크 평전』인데요. 오늘 나오신 대담자분은 과학 중에서도 특히 과학사나 과학철학 쪽으로 공부하신 분이라 좀 특이한 과학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대담할 책도 그런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선 책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책이 과학사적이나 사회적으로 어떤 시의성을 갖는지 이야기해 주시면 어떨까 싶고요. 그다음으로 책의 저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의도로 책을 썼는지도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책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25년이 걸린 전기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제가 맡은 책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란 제목의 오펜하이머 평전입니다. 제가 번역했고요. 원래 1년 계약으로 시작했는데 한 3년 걸려서 나왔습니다. 당시에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고요. 마침 용돈도 좀 궁하고 해서 맡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죠. (웃음) 그 사이에 졸업도 하고, 아이도 생기는 여러 과정을 거쳐서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의성이라고 하면 원서의 출간 연도가 2005년인데 그 무렵에 오펜하이머 책이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최소한 서너 권이 거의 동시에 출간된 것 같고요. 제가 보기에는 미국에서 공문서가 공개되는 시기가 정해져 있거든요. 어떤 문서는 30년, 어떤 건 50년 정해서 공개하게 되어 있는데 아마 FBI 관련 문서가 열린 것하고 연관이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이 짧은 기간에 나온 책은 아닙니다. 서문에 보면 25년 동안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펜하이머 관련 인물들과 인터뷰를 많이 했다고 하고요. 책을 읽어 보시면 그런 인터뷰들이 잘 녹아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틴 셔윈이라는 분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서 미국사를 전공하고 아주 오랫동안 보스턴 부근에 있는 터프츠 대학교에서 미국사를 가르치셨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워싱턴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역사학과에 겸임교수로 와 계시고요. 평생을 원자 폭탄 관련 연구를 하셨습니다. 첫 책의 주제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이 미국의 세계 전략과 어떻게 연관을 맺게 되었는가.’였습니다.


전기라는 장르의 특수성이라고 할까요? 전기 작가는 대상과 맺는 관계가 미묘할 때가 많은데 셔윈 교수는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는 좀 혐오했다고 하더라고요. 보통 자기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을 대상으로 전기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펜하이머의 우유부단함과 인간적인 약점들에 대한 혐오감이 아주 오랫동안 이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후반에 이 책을 끝내겠다는 마음을 먹고 연락을 했던 사람이 바로 공저자인 카이 버드인데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를 아주 오랫동안 했고 냉전 시기의 여러 인물에 대한 전기를 썼던 사람이죠. 카이 버드와 2005년에 마무리를 했습니다. 소설처럼 아주 글을 잘 써서 2006년에 퓰리처상 전기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이 책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다들 아시겠지만, 텔레비전에 한번 나왔죠? 무한도전에서 하하라는 친구가 이 책을 골라서 서평을 썼는데 핵심을 잘 짚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반짝 이름이 알려졌지만 판매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 않습니다. (웃음) 일단은 여기까지 하고요.


‘Der Physiker’

국형태(사회자): 다음으로 『막스 플랑크 평전』을 쓴 에른스트 페터 피셔를 좀 소개해 주시죠.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과학사 학자들에게 평생의 꿈 중 하나가 제대로 된 전기 하나 쓰는 것이기도 한데요. 막스 플랑크 평전이 사실 그 수가 많습니다.


국형태(사회자): 서평에서도 평전을 여덟 권이나 언급하셨지요. 그중에서 피셔의 평전이 가장 잘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데 다른 책하고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을까요?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우선 항상 마지막에 쓴 사람이 가장 잘 쓰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웃음) 저도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과학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막스 플랑크란 이름에 굉장히 큰 울림을 받아 왔는데 저자인 에른스트 피셔는 플랑크가 죽은 1947년에 태어났습니다. 항상 자신이 그와 삶이 몇 개월은 겹친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하고요. 독일 콘스탄cm 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가르치시는데 물리학, 생물학, 수학, 과학사에도 다 학위가 있는 한마디로 박학다식 그 자체인 분입니다.


이 분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나름의 사명감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플랑크가 옛날 마르크화의 도안에 나왔을 정도로 독일인에게 사랑받는 물리학자이기도 하고요. 이 책의 원제가 ‘der physiker'거든요. ’the physicist'. 어떻게 보면 아주 무모한 제목이죠. 한 사람의 전기를 쓰면서 제목이 ‘그 물리학자'입니다. 독일인으로서 플랑크를 얼마나 추앙했는지 알 수 있죠. 그의 전기가 보통 좀 외적인 부분, 물리학과 관련된 측면을 주로 다룬다면 이 책은 그게 아니라 이 사람이 1차 세계대전, 바이마르, 나치 독일,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굉장히 치열하게 다루었습니다. 읽다 보면 콧날이 시큰한 장면들이 좀 있습니다. 저도 가끔 생각합니다만 플랑크 같은 사람의 전기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 피셔에게도 굉장히 영광이었으리라 봅니다.


국형태(사회자): 서평에서도 강조하셨지만 이 두 책은 과학자로서의 플랑크와 오펜하이머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분들이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런 것을 조명하는 데 더 비중을 둔 책이라고 생각되는데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플랑크와 오펜하이머는 대단한 과학자이죠. 그래서 두 분의 과학적 업적을 먼저 이야기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20세기 물리학의 모든 것을 만든 사나이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막스 플랑크는 1900년에 논문을 씁니다. 이 논문은 사실상 양자 역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만든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12년 전에 캘빈 경으로 알려진 윌리엄 톰슨이 ‘물리학자의 하늘’이란 제목으로 행한 유명한 강연을 봅시다. “19세기 물리학자의 하늘은 매우 맑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두 조각의 구름만 빼면. 하나는 빛의 속도를 재려고 했던 미국 물리학자 마이켈슨의 실험이고 또 하나는 최근에 흑체복사라는 이상한 게 있는데, 이 두 구름이 있지만 물리학자의 하늘은 맑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두 구름이 각각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이라는 폭풍우를 몰고 옵니다.


막스 플랑크는 양자 역학 혁명에서 주역 배우였고요. 두 번째 업적은 좀 다른 맥락인데 그는 아인슈타인을 만들었습니다. 1905년 ‘기적의 해’에 아인슈타인은 혁명적인 논문을 다섯 편이나 씁니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무관심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플랑크가 찾아옵니다. 아인슈타인을 1913년에 베를린으로 데려가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플랑크입니다. 양자 역학이라는 것과 상대성 이론을 공론화했다는 의미에서 20세기 물리학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죠.


국형태(사회자): 아인슈타인을 발굴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죠. 당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흑체복사 실험 결과의 설명, 그게 결국 양자 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게 한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하고 그래서 양자 역학의 창시자다 이런 말까지 하는데 그것 말고도 평전에서 지적하는 업적은 또 없나요?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막스 플랑크의 진정한 역할은 바로 통계 물리학입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으로 포커-플랑크 방정식이 있어요. 19세기까지 통계 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만물을 기본 요소로 분해한 다음에 요소들 사이에 대한 통계적인 또는 확률적인 계산으로 바꿔치기하는 접근인데 최초의 창시자는 영국의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볼츠만이 있었는데 둘 다 주목을 못 받고 있었을 때 플랑크가 이를 종합해서 통계 물리학의 초석을 닦았고요. 그의 제자들이 결국은 통계 물리학을 다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요즘 여분 차원, 10차원 끈 이론, m-이론 이야기를 하는데 이 모두에 플랑크가 나옵니다. 왜냐면 플랑크가 길이와 물리량을 근본적으로 고찰해서 플랑크 길이, 플랑크 시간, 플랑크 질량, 플랑크 에너지로 정리했거든요. 물리학의 모든 것을 통일하려고 하는 통일 물리학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국형태(사회자): 정말 일반 물리학 교과서에 안 나오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 같아요.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업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국의 스타 과학자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세기 초 미국 물리학의 수준이라는 것은 유럽에 비교하면 거의 형편없었다고 봐도 무방하죠. 과학을 공부한다는 건 당연히 유럽에 건너가는 일을 뜻했고요. 실험 물리학에서는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가, 이론 쪽은 독일 괴팅겐 대학교가 유명했습니다. 조금 전에 ‘물리학자의 하늘’ 연설 말씀하셨는데 거기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플랑크가 전공을 정할 때 지도교수에게 물리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니까. 너는 머리도 좋은데 왜 물리학을 하려고 하냐. 모든 문제가 해결된 분야니까 차라리 화학을 하는 게 앞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계산만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굉장히 큰 혁명이 태어나고 있는 그런 시기였죠.


오펜하이머는 플랑크 바로 다음 세대죠. 반쯤 어긋난 세대라고 볼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유럽에 가서 캐번디시 연구소에 실험 물리학자 등록을 했는데 도저히 자신과 맞지를 않아서 불안한 시기를 보내다가 괴팅겐으로 옮깁니다. 토마스 쿤의 이론체계를 빌려 오면 양자 역학이 어느 정도는 정상 과학화된 상태에서 오펜하이머가 독일 과학계에 대학원생으로 들어온 거죠. 그 안에서 몇 가지 굉장히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내고 논문이 주르륵 나오게 됩니다. 한 1년 반 사이에 아주 많은 논문을 출판하고 어떻게 보면 양자 혁명의 큰 수혜자 중 하나죠.


책 뒤에 가면 오펜하이머가 원자 폭탄 개발의 총책임자를 맡고 성공적으로 끝마쳤음에도 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무기를 만든 사람이라 노벨 정신에 맞지 않는다 해서 노벨상을 주지 않았다는 의견이 하나고, 오펜하이머 자체가 자잘한 논문, 아이디어는 좋고 아주 얕게 태클을 하는 논문은 많이 썼지만 깊게 파는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없다는 평가를 하는 의견이 둘입니다. 학문적으로 보면 플랑크 급의 물리학자는 분명히 아니었지만 주어진 문제를 빨리빨리 해결하는 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들고 귀국했는데 그동안 미국에서는 하지 않았던, 없었던 분야의 최첨단 물리학을 들고 온 사람으로서 스타 대접을 받습니다.


시대가 막스 플랑크에게 요구한 것

국형태(사회자): 지금까지 두 위대한 과학자의 업적에 대해서 들어 보았는데요. 플랑크나 오펜하이머나 어려운 시기에 사회적으로 격동기에 살았던 분들입니다. 과학자도 순수한 호기심으로 과학만 하고 살면 좋겠지만 사회 일원으로서 그렇게 만은 안 되잖아요? 더구나 두 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유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기적으로 앞섰던 플랑크부터, 먼저 플랑크가 어떤 시기에 살았으며 그 시대가 과학자에게 뭘 요구했고 어떤 식으로 처신했는지. 이런 것을 좀 소개해 주시면 좋겠어요.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플랑크에게 가장 큰 사건이라면 역시 1차 세계대전입니다. 1913년에 베를린 대학, 괴팅겐보다 더 우월한, 자칭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이라고 이야기하던 그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플랑크가 취임합니다. 그런데 그 직후인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이 전쟁에 독일 지식인이 어떻게든 개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지식인 93인 서명이 등장합니다. ‘우리 독일 지식인은 이 전쟁을 지지한다.’ 거기에 플랑크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 자신은 요즘 말로 엄친아였거든요. 집안 전부가 목사 신학자 법학자 이런 굉장히 굳건한 집안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리고 종전 30년 후인 1933년에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회장이 되는데요. 요즘 말로 하면 모든 과학 분야의 총책임자이죠. 히틀러를 만나게 됩니다. 히틀러를 만난 직후에 사람들 앞에서 강연했는데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손을 들어서 하일 히틀러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습니다. 다시 들다가 내리기를 3번 반복하고 나서야 모기만 한 소리로 “하일 히틀러.” 이러고 강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일화가 1차 세계 대전 때 1913년 지식인 서명을 하게 된 그런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고 1947년생인 에른스트 피셔는 플랑크를 옹호하는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국형태(사회자): 1차 대전 때하고 2차 대전 때하고 플랑크의 처신이 좀 달랐다는 이야기네요. 1차 대전 때는 국가에 충성한다는 명분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2차 대전 때는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잖아요. 나치 치하에 있었던 독일을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떤 강요로, 떠나지도 못하고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좀 달랐던 것 아닌가요.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두 번째에서 행동을 달리했던 부분은, 이 사람은 과학자로서 또 더 나아가서는 지식인으로서 어찌 되었든 간에 카이저 빌헬름 협회라는 굉장히 중요한 협회의 장이었고 자신의 처신이 바로 자신이 지키려는 목표에 직접적인 해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원리와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어쨌든 학문은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대가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요구한 것

국형태(사회자): 오펜하이머는 어땠나요?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전후에는 반공주의가 유행하면서 변절자로 몰리고 불행했잖아요?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앞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오펜하이머는 버클리를 중심으로 미국의 양자 역학 이론 물리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들은 거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요.

1945년에 미국이 처음으로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했는데 4년 만인 1949년에 소련도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합니다. 그 4년 사이에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핵 독점이 4년보다는 훨씬 길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국제 전략을 수립했죠. 소련을 원자 폭탄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4년 만에 끝나니까 에드워드 텔러 같은 과학자들이 원자 폭탄보다 훨씬 위력이 센 수소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과학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그 상황에서 오펜하이머는 이건 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을 내죠. 그것이 꼬투리가 잡혀서 1955년에 최종적으로는 그의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게 되는 청문회가 열립니다.


국형태(사회자):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참여하지 않게 된 이유가 개인적으로 옛날에 자기가 좌익 활동을 한 전력이 있을 정도로 어떤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폭이 실현된 이후에 핵무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돼서인지 확실한 근거가 있나요?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이 성공한 직후부터 핵 비밀이라는 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과학적 원리는 과학자들이면 다 알고 있고, 핵심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얼마나 정제할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만큼 정제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냐는 계산이다. 물론 원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1940년대 초 당시에 그 정도 규모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정제할 수 있는 산업적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는 거죠. 독일에도 폭탄 전문가가 있었고 일본에도 있었습니다만 그 두 나라에서는 미국만큼 그렇게 많은 양의 우라늄 플루토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 연구를 열심히 해도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그런데 그게 가능한 또 하나의 나라가 소련이었습니다. 결국은 우라늄 플루토늄을 얼마나 만들어 내느냐가 문제였기 때문에 소련이 금방 따라올 것은 명약관화하고 3년이 걸리냐 4년이 걸리냐 7년이 걸리냐지 금방 따라올 건데 그런 상황에서 평화를 지킬 방법은 원자력이라는 이 거대한 힘을 국제적인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오펜하이머의 핵심 주장이었죠. 폭탄 개발을 더는 하지 말고 지금 있는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국제기구를 통해서 공동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걸 나눠 가지자는 게 오펜하이머의 어떻게 보면 약간 이상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수소 폭탄에 반대하는 것은 그 의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고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국형태(사회자):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플랑크는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서 물론 나치에게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국가에 충성하고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으로서 독일 과학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경례도 하고. 그래도 결국은 해피엔딩이 되었죠. 현재 노벨상 수상자를 스물 몇 명인가 낸 흔히 노벨상의 산실이라는 말도 들을 정도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초석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결국은 과학자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잘한 경우가 아니었느냐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좀 애매한 것 같아요. 원자 폭탄 개발을 실제로 이루었고 나중에 면죄부는 받았지만 상당히 자기가 주력하고 노력하고 공헌했던 과학 행정 정책 분야에서 더 이상의 공헌을 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런 점에서 좀 다른 결과를 맞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연관지어서 이런 질문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과학자가 과학 외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과학자는 대개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라거나 문제 풀이에 대한 호기심에서 연구하고 그 결과에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단 말이에요. 그런데 원자탄 이런 것을 보면 호기심 만족에서 끝내면 안 되고 사회적인 책임을 생각해야만 하는 거죠. 이 두 분의 삶을 조명하면서 작가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어떤 자기주장을 한 적은 없나요?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과학자라는, 사이언티스트라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한 게 19세기 말 이야기죠.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는 과학자라는 집단이 전문화 세분화가 되고 어떤 직업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시점과 맞물리는데 그러다 보니까 과학자들이 과학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는 거죠.

제 생각에는 플랑크도 전문화된 과학의 일환으로 활동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늦게까지도 자신이 전문 과학자가 아니라 지식인, 그러니까 어떤 사회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유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선비적이고 지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1955년 청문회로 추락하기 직전까지 그는 나름 미국 사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영웅이었죠. 오펜하이머의 중절모가 미국 과학의 상징이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이것만 보고 아, 이건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하면 원자 폭탄. 그 정도로 전설적인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물리학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권위를 갖고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게 당연시되는 특이한 시기였습니다. 사교계 파티를 하면 물리학자 한명쯤은 있어야지 파티라고 했을 정도로. 전쟁을 끝낸 전문가 집단으로 대우받았습니다.

물리학자들의 권위가 굉장히 높았던 그 시기에 오펜하이머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했지만 너무 많이 나간 것이죠. 너무 많이 나가기도 했고 오만했다고 마틴 셔윈과 카이 버드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오펜하이머를 영웅 서사적으로, 즉 죽 올라갔다가 성공에 취해서 추락을 하는 고대 신화의 영웅 신화 네러티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조국을 전쟁의 승리로 이끈 자신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만나면 굉장히 친근하고 상냥하고 이런 사람이었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하고 만났을 때는 굉장히 특이한 행동을 지속해서 보입니다.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을 만났을 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트루먼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립니다. 트루먼은 폭탄을 쏘라고 최종 결정을 한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과학자가 와서 피가 묻어 있다고 이야기를 하니 확 기분이 상해서 저 사람을 다시는 내 사무실에 데려오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치적인 비호에서 비켜나기 시작하면서 몰락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상하게 권력자들 앞에서는 좀 정신이 이상해지는 면이 있었다고 해요. 정치력이 없었던 거죠. 권력자들을 이용할 줄 몰랐고. 그게 어떻게 보면 오만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국형태(사회자): 플랑크는 굉장히 확실한 소신 같은 게 느껴져요. 국가관이나 뭐 이런 쪽에서.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한 소신이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그런 면도 있죠. 미국이라는 나라에 애국심이 굉장히 충만했으면서 결혼할 때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했고. 그게 어떻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죠. 소련이라는 나라가 처음에는 정당성이 있었죠. 2차 세계 대전 전사자의 거의 절반을 내면서 나치 독일과 싸워 준 우방에서 불과 10년 후에 적국이 된 그런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국형태(사회자): 지금까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 봤는데.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청중: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이공계 연구가 전시에 유용하기가 상당히 쉽지 않습니까? 응용되기도 하고 과학자들이 실제 동원되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을 때 정작 칼을 손에 쥐고 찌른 것은 정치가들인데 왜 과학자들이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찌른 사람보다도 왜 칼 만든 사람이 욕을 먹는지 사회적인 원인을 좀 알고 싶습니다.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제가 항상 드는 예가 있는데 미래소년 코난이란 만화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거기 보시면 주인공 코난을 따르는 여자애가 있죠. 이름이 라나인데 할아버지가 과학자입니다. 악당이 이 할아버지를 괴롭혀서 무기를 만들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끝까지 거부하거든요. 못 만듭니다. 이런 상황이 답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영화 스파이더맨 2를 보면 닥터 옥토퍼스가 핵융합 발전에 성공합니다. 그 마지막 단계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위기가 악화되는데 사실은 과학자가 과학적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정치가가 쓸 수도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과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정치가들도 책임을 지지 않나요? 과학자들은 목숨을 잃지 않지만 정치가들은 목숨을 잃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데요. 미국같이 성공한 사례는 다르지만 만약 독일에서 미국을 대상으로 무기를 개발하고 사용을 승인한 정치가가 있다면 당연히 전범 재판에서 사형당했을 것 같은데요. 과학자들이 억울해할 부분은 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러냐 그런 불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은 과학자의 윤리적인 문제란 측면에서 접근해야죠. 과학자가 자기 신념이랑 어긋나는 일을 지시받았을 때 그것을 거부를 해야 하느냐 따라야 하느냐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국형태(사회자): 과학자만의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마무리해야 할 것 같고요. 오늘 서평에서 못하시거나 이 자리에서 못하신 이야기가 있으면 하시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최형섭(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과학자가 사회에서 얼마만큼 발언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만큼 사회가 그것을 용인하는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과학자란 집단이 세분화되면서 직업화되어 버린 측면이 있죠. 미국에서는 2차 대전 직후에 물리학자의 권위가 확 올라가는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 오펜하이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죠. 그 결과 생긴 원자 과학자 협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는 일 중에 가장 유명한 게 신문에서 가끔 보셨을 세계 종말 시계입니다. 세계 종말까지 몇 분 남았다. 이런 걸 조정합니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런 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한 과학자 집단이 1945년 이후에 생겨났고 죽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저널이 나오고 있거든요.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만, 과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가 모호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 논쟁들, 광우병 사태, 천안함 사태 때 과학자가 발언하면 ‘정치적인 입장에서 발언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듣습니다. 과학적인 부분과 사회 정치적인 부분을 칼로 자르듯 뚝 자르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고 같이 논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너무 양분해서 너는 과학이냐? 아니면 정치냐? 양자택일하게 하는 분위기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항상 100%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가치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의견들을 잘 모아내는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사회적 갈등의 감소에 도움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재영(막스 플랑크 평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과학과 정치를 분리해서 과학이냐? 정치냐? 선택하게 하는 분위기가 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재미있는 것이 ‘예술과 정치’, ‘카메라와 정치’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거든요. 그 이야기는 현재 과학이 굉장히 강한 힘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막스 플랑크에 관한 이야기를 드린다면 플랑크는 한 사람의 과학자이기 전에 지식인이었고요. 독일 사회, 유럽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과학교육보다도 인문학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의 대표격일 겁니다. 최근 과학교육을 보면 문제 풀이나 시키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좋은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막스 플랑크 평전』에서 볼 수 있는 플랑크의 모습은 모든 것을 다 아는 팔방미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과학자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고 한 사람이고 시민임을 먼저 고민하게 했던 이런 요소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고요. 그것이 과학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형태(사회자): 감사합니다. 마무리 말씀이 두 분 다 시의성이 있고 굉장히 와 닿는데요. 최근 일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여러 이슈에 대해서 과학, 또는 과학자의 역할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죠. 그런 중요한 점들을 지적해 주시면서 마무리하셨네요. 이걸로 두 분 오늘 대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박수)


영웅 신화 속에는 인간이 있었다

7월 책 대 책 대담회는 물리학계의 거장을 주제로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듯 이공계 학생들의 높은 참여율을 보였고, 날카로운 질문이 연이어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자리는 원서를 번역한 역자와 과학철학자가 생각하는 두 거장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과학의 가치판단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귀한 기회이기도 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막스 플랑크는 삶의 궤적도, 사상도 다를 뿐더러 찬란한 비상과 몰락이라는 후세의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쪽은 시대에 순응하고 한쪽은 저항했다고 명확하게 분류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청중들은 그들 역시 시대의 아픔에 좌절하고 약한 모습을 보인 한 사람의 인간임을 배웠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그렇게 지켜내려 했던 과학의 가치란 무엇이며, 자신이 만약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2차 대전이나 냉전 시대보다 더욱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과학적 이슈를 풀어낼 열쇠는 ‘과학 기술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인문학적 소양’ 안에 있을 것이라는 두 대담자의 통찰과 함께, 7월 책 대 책 대담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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