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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1화 고인류학과의 만남

Editor! 2016. 3. 30. 10:29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어떻게 고인류학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에게는 유명한 과학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탄생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 화석을 보고 매료된 다음부터 평생 화석과 함께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지도 않았고,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보고서 고고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대학교에 진학한 것도 아닙니다.

 

고인류학은 저에게도 생소한 학문이었습니다. 『인류의 기원』을 읽은 독자 여러분께서 올린 서평을 읽어보면 제 경험과 대략 비슷합니다. 저 역시 인류의 진화라면 막연히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암기한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끝.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교과서에 덤처럼 등장해서 더 외워야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험 문제, 특히 대입 시험이었던 학력고사에 출제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공부하지도 않은 내용이었죠. 그게 처음 접한 경험이라면 경험입니다.





미술 대신 택한 발굴


대학교 입학 당시에는 학과별 모집을 했는데 고고미술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학과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막연하게 이집트의 피라미드, 스핑크스, 미이라와 같은 것을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학해서 보니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으로 진로를 택해야 하는데 저는 주저하지 않고 고고학을 택했습니다. 일단 초·중·고등학교 내내 '미술' 과목 성적은 항상 (수우미양가 중) '미'를 넘어본 적이 없는데다가 미학이나 미술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삽 들고 땅 파는 것처럼 몸으로 하는 일은 나름 자신이 있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발굴장을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말이나 방학에도 발굴장에 다녔습니다. (그때 발굴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동기들은 지금 모두 유수한 중견 학자가 되어서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학부 시절에 '인류의 진화', '선사 고고학' 등을 수강하고 학점은 좋았지만 화석이나 인류의 진화에 대해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수업 시간에 루시를 발견한 돈 요한슨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어린 마음에 요한슨이 참 잘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멋져 보였어요. 고인류학에 대한 두 번째 기억입니다.


ⓒ이희중.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오리진』


그런데 제가 대학교 때 마침 외국 출장을 다녀오시던 선친께서 홍콩의 서점에서 Origins(리차드 리키, 로저 레윈)이라는 원서를 사다 주셨더랬습니다. 그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인류학은 “태정태세문단세..”식으로 역대 조선 왕조의 왕 이름 외우듯 외우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머나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성이 발원하는 과정과 우리의 시작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괴물같은 원시인이 아니라 협동하고 양보하는 인간미 넘치는 원시인이라는 사실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뼈(화석)에서 정보를 캐내어 인간성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었습니다. 자를 대고 깔끔하게 줄을 쳐 가면서 꼼꼼히 읽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제 책 제목이 『인류의 기원』으로 붙여져서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모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오리진』을 읽고 감동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쪽으로 전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문과생이 할 수 있는 공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에도 문과였고 대학교 때에는 인문 대학에 속한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문학도였지요. 게다가 주변에 과학을 공부하시는 분이 없었고, 학교에서 과학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과학적인 접근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과학이란 하얀색 실험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깨끗한 실험실에서 실험관을 들여다 보는 모습을 연상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대학 2학년 때 우리 과로 오신 이선복 교수님께서 젊은 소장학자의 열정으로 저와 동기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때 과학으로서의 고고학(‘신고고학’이라고 불렸습니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인 고고학과의 첫 만남


그때 처음으로 과학적인 방법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설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해서 가설을 검증한다는 연역적 방법의 깔끔함에 매료되었습니다. '인문학'으로만 알았던 고고학 역시 삽질을 통해 수집한 자료로 가설을 검증하는 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4학년 졸업 논문은 한국 선사 시대 토기의 X선 회절 분석을 통해 성분 분석을 했습니다. 그때 자연대학의 무기재료공학과 류한일 교수님의 연구실에 드나들면서 실험을 처음 접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실험실에서 토기 성분을 분석하는 작업과 발굴장에서 땅을 파는 작업이 가설과 검증이라는 과학적인 작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찾아온 공부에 대한 회의와 슬럼프에서 뜻하지 않게 빠져 나올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마침 한국 고등 교육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때, 이선복 교수님께서 고인류학을 공부해 보라며 추천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없는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이 도박이기는 했지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한 분야를 개척할 수도 있다는 흥분도 있었습니다. 『오리진』을 읽고 느꼈던 신선한 충격을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고 싶었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


유학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모교에 들러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졸업 논문 지도 교수님의 충고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자네, 남자 친구도 있다지?”

“네….

유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게나. 그러나 남자 친구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거나, 성적이 더 좋으면 안되네. 명심하게.”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격려의 말씀이나, 작별의 인사를 기대했던 저는 놀랐습니다.

 

그 교수님은 작년 국정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서 구설수에 휩싸이셨는데, 여성에 대한 시각은 25년 전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으신 듯합니다.


(2화는 4월 27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 관련 도서 (도서명을 누르면 도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