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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여행] 3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두 번째 이야기 본문

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3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두 번째 이야기

Editor! 2016. 5. 27. 10:32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켄터키 주의 친구 집을 떠나 계속 서쪽으로 달렸습니다. 바야흐로 미국의 곡창 지대인 중서부에 들어섰습니다. 곡창 지대답게 가도가도 옥수수밭이 계속됩니다. 


계속되는 옥수수밭. 사진 한쪽에 내 차 보이저도 보인다. 


일리노이 주도 거의 다 지나 미주리에 닿기 직전 도착한 카호키아(Cahokia)는 북미에서 가장 큰 도시 유적입니다. 카호키아는 유럽 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 5백여 년 동안 지속되던 미시시피 문화에서 가장 크고 강력했던 도시로서 큰 봉토(封土)들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고고학에서는 유물이나 유적의 기능이 애매할 때 곧잘 “종교적 기능”이라는 추측을 가져다 붙이는 것 같습니다. 하하. 미시시피 문화는 오하이오 분지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오하이오 강을 따라 꽃을 활짝 피운 문명이었습니다. 그리고 14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경에는 이미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16세기에 유럽 인들이 들어오기 100년 전의 일입니다. 유럽 인들이 미 대륙으로 들어와서 건강한 사회 구조를 폭력과 질병으로 파괴한 경우도 많겠지만 이렇게 이미 쇠약해져가던 구조가 유럽 인이라는 외래 세력의 마지막 일격으로 완전히 쓰러져 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 왔던 인디언은 카우보이와 싸우고 괴성을 지르면서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 가는 미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잘못된 편견을 많이 버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디언들이 머리 가죽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 깨달았지요. 그런데 인디언이 고도로 발전된 문명사회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계속 배우면서도 계속 놀랍니다. 놀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만큼 편견이 높다는 뜻이고, 한편으로는 기대치가 낮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적에 유럽 중심으로 배우는 편협하며 편견에 찬 세계사 교육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오래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절실하군요.


카호키아 유적


카호키아에서 바라본 세인트루이스. 세인트루이스의 아치가 멀리 보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카호키아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사위가 조금씩 어둑어둑해집니다. 카호키아를 지나면 바로 미시시피 강 건너의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입니다. 근교의 작은 모텔에서 묵고 세인트루이스를 지나 독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허먼(Hermann)에 들렀습니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일까, 샐러드일까, 고민이 된다면, 바로 이런 동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전체를 보면 수없이 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끼리끼리 따로따로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양성’은 현재 미국에서 뜨거운 키워드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는 미국의 대학교 전체에서 다양성 지수가 높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양성은 축하하고 장려해야하는 가치로 여깁니다.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그러하듯, 대학교를 놓고 봐도 학생들이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공부하고 연애하고 밥을 먹습니다. 완전히 골고루 섞여서 지내기는 물론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겠죠. 끼리끼리 지내더라도 주위를 돌아봤을 때 다양하게 생긴 사람들이 다양하게 입고 먹는 모습이 있다면 결국 다양성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익숙해 진다는 것은 확실히 유익합니다. 우리 인간은 일단 생소함과 생경함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미주리 주의 허먼 시


허먼은 와이너리로 유명합니다. 그중 한 와이너리에 들러 간단히 포도주 시음도 하고, 쉬었다가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미주리 주를 지나 캔자스 주의 로렌스에 있는 대선배에게 들러 하룻밤 묵을 계획입니다. 그는 지도 교수의 초창기 제자로 캔자스 대학교에서 계속 교수로 있다가 최근에 은퇴했습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학계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구는 꾸준히 주목을 받습니다. 하룻밤 자고 아침이 되니 그가 내게 바구니를 들려서 뒷뜰 한쪽에 있는 구조물로 안내합니다. 안으로 한 발을 들이니 닭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서 저를 에워 쌉니다. 엄청 시끄럽습니다. 서울서 자라난 저는 살아 있는 닭을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바구니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그가 어느새 달걀을 바구니 가득 담으면서 바구니를 놓치지 말고 꼭 잡으라고 주의를 줍니다. 방금 낳은 달걀로 만든 오믈렛은 정말 맛있습니다. 달걀, 옥수수 등 슈퍼마켓에서 포장되어 팔리는 먹거리는 갓 낳은 달걀, 갓 따온 옥수수와 비교가 되지 않는 맛입니다. 하루 전에 내렸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커피와 막 내린 커피의 차이 만큼이나 다르더군요. 평생 연애운이 따르지 않던 그가 60살을 넘겨서 드디어 결혼을 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몇 년 전에 들었습니다. 신부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입니다. 그리고 은퇴를 한 후에 일년의 반은 캔자스에서, 나머지 반은 이탈리아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간간히 연구 논문을 발표해서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괜찮은 삶이죠?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로렌스를 지나자 진짜 캔자스입니다. 캔자스에 대한 유명한 농담이 있습니다. “캔자스는 팬케이크보다 평평하다.” 이 명제를 어떤 시간 많은 수학자가 풀어서 「믿기지 않는 연구 연보(Annals of Improbable Research)」라는 학술 잡지에 발표할 만큼 과연 캔자스는 가도가도 평평하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책에서만 보던 지평선을 보며 신기해 하기도 했지만 금방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가 그렇게도 절실히 떠나고 싶어했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캔자스의 평야를 달리면서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8월 말의 햇살은 아침에 잠깐 선선할 뿐 곧 숨 막히도록 뜨겁습니다. 저의 보이저에는 냉방 장치가 없으므로 창문을 열고 달릴 수 밖에 없었지만 창문을 연다고 해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계속 서쪽으로 태양을 향해 가다 보니 왼쪽 팔만 점점 새까매집니다. 자외선 차단제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방 도로는 하루 종일 차 1대가 보일락 말락 합니다. 차 안의 음향 기기라고는 라디오 밖에는 없는데 어떤 주파수를 맞춰도 하나같이 컨츄리 웨스턴 음악 뿐이고요. 창문으로 들어 오는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따뜻한 차 안에서 띠요옹 띠요옹거리는 나른한 음악을 듣다 보면 머릿속도 힘 없이 녹아내리는 느낌입니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배경 음악으로 컨츄리 웨스턴이나 뽕짝을 찾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도로변에 나침반을 대고 맞춰도 될 정도로 동서남북으로 정확하게 구획된 길을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계속 달립니다. 창밖의 경치는 가도가도 변하지 않는 평야였습니다.


켄터키 주 루이빌(A), 일리노이 주 카호키아(B),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C)와 허먼(D), 캔자스 주 로렌스(E)를 구글 지도에 표시했다. 575 마일, 925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4화는 6월 29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 관련 도서 (도서명을 누르면 도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