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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여행] 4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세 번째 이야기 본문

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4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세 번째 이야기

Editor! 2016.06.29 13:36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화제를 모았던 ‘멍 때리기 대회’에 나가도 될 정도로 아무 생각없이 차를 몹니다. 햇볕이 쨍쨍한 지방 도로를 달리는 차는 저뿐입니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하다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근처 여관을 찾아 들어갑니다.


“방 있나요?” 

여관 프론트를 보는 덩치 큰 아주머니가 수상한 눈으로 의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정말 혼자슈?”

물어보면서 힐끗힐끗 등 뒤를 훔쳐보는 품새가 마치 혼자인 척하며 방 하나를 빌려서 가족들을 우루루 잠입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지켜보는 눈치입니다. 저녁을 대충 먹고 텔레비전를 잠깐 보다가 씻고 잠을 청합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여관에서 나오는 아침을 먹고(대개는 커피, 쥬스, 우유와 시리얼, 그리고 빵이었죠.) 요금을 계산한 다음, 길을 나섭니다. 점심 때가 되면 근처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끼니를 때웁니다. 사흘에 한 번 정도는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엽서를 사서 친구들과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소식을 간단히 전했죠. 그리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달립니다. 대략 시속 55~ 60마일 정도의 속도를 지킵니다. 하루 종일 여관에 들어가고 나올 때 두어 마디 하는 것 외에는 계속 말 한마디 할 일 없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음악도 없는 차 안에서는 엔진 소리만 들립니다. 휴대 전화는 없고, 공중전화를 찾아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만한 상황도 아닙니다. 어디를 가나 덩치 큰 백인이 아닌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어요. 계속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했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존 스타인벡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스타인벡의 『찰리와의 여행(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1962년)은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올 준비를 하면서 과제로 읽어야 했던 책입니다. 스타인벡이 애견 찰리와 함께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고민하며 쓴 이 책은 고인 물처럼 썩어 들어가던 미국의 문제점, 특히 인종 간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미국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60년대의 사회 운동은 당연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90년도에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려던 제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었죠.


이번 여행은 우주선을 몰고 가듯 의기양양하고 기세등등하게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저는 스타인벡처럼 머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많이 생각하고 정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녹음기도 가져갔죠. 그러나 막상 길을 나서니 어지간해서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긴장과 경계심 때문에, 나중에는 피곤함과 귀찮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냥 도중에 진로를 바꾸어서 고속도로를 타고 마냥 달려도 누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원래 계획대로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한 평평한 땅도 결국은 끝이 있습니다. 구릉 지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상한 냄새와 소리가 커지면서 흑백의 점점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홀스틴 소떼였습니다. 놀라운 장면에 사진을 찍으려고 시도했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못 견디고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중서부를 지나 본격적인 카우보이 세상에 발을 들인 셈입니다. 카우보이 문화는 미국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죠. 와이엇 어프 보안관과 오케이 목장의 결투에 대해 뼛속 깊이 느낀다면 곧 미국 사람이라는 징표입니다. 그리고 이 카우보이 문화의 뿌리가 바로 캔자스입니다. 와이엇 어프가 보안관으로 있었던 캔자스 주의 닷지시티는 소몰이, 총싸움, 보안관, 그리고 뜨내기 총잡이 문화가 꽃핀(?) 곳이며 지금은 지난날의 영화를 재현해 놓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부트힐(boot hill) 박물관이 있습니다. 부트힐이란 싸움 끝에 “장화 신은 채로” 횡사한, 이름 없는 카우보이들의 무덤을 가리킵니다. 


닷지시티의 시내를 옛모습 그대로 복원시켜 놓은 모습


석양과 함께 사라지는 카우보이처럼 저도 닷지시티를 떠났습니다. “세인, 세인, 돌아와요, 세인!” 영화 「세인」의 마지막 대사가 귓가에 울렸죠. 


캔자스 주의 닷지시티를 떠나면서 바라본 석양


닷지시티를 떠나니 다시 평평한 땅입니다. 평평함이 지루해서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눈앞에 어마어마한 땅덩어리가 나타납니다. 로키 산맥입니다. 땅은 언제 그렇게 평평했었냐는 듯 가파른 계곡으로 바뀝니다. 미국의 동부는 고생대에 생겼기 때문에 완만하고 점잖은 지형입니다. 동부는 산과 계곡의 지형조차도 아기자기합니다. 같은 고생대에 만들어진 한반도의 산과 계곡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중서부는 완만함이 지나쳐서 평평하기도 하지만 말이죠. 반면 로키 산맥을 비롯한 서부는 신생대에 태어난 어린 땅입니다. 마치 10대의 질풍노도 사춘기를 맞이한 것처럼 들쭉날쭉한 땅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습니다.


길이 똑바로 나 있지 않고 들쭉날쭉한 산과 계곡이 계속 이어집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난코스입니다. 이 험난한 길을 마차로 넘으려다 실패하고 길 위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서부 개척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비극적인 예는 도너 일행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도너 일행은 19세기 중반 5월에 미주리 주를 떠나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하던 87명의 개척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타 주와 네바다 주를 거치면서 9월에 도착하려던 예정보다 훨씬 늦어진 11월에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극도로 지쳤던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일행의 사체까지 먹으면서 연명해야 했죠. 끝까지 살아남은 40여명은 그 다음 해 3월에야 구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하니 정신이 버쩍 나고 운전하는 눈에 힘이 들어갑니다. 펄펄 피 끓는 땅이 내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만 같았죠. 땅은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콜로라도 로키 산맥을 넘어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길에는 국립 공룡 기념 공원이 있는 다이노소어(Dinosaur, 공룡) 시가 있습니다. 공룡은 참으로 남의 나라 이야기같았는데 알고 보니 한반도에도 공룡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화석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공룡처럼 중생대에는 지구 전체를 호령하던 동물이, 이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종의 무상함을 철저하게 느낄 수 있죠.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유타 주의 다이노소어 시


얼마 전에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뒤쪽의 퇴적층은 차곡차곡 쌓여서 수평을 이루고 있다. 앞쪽은 지층 운동으로 퇴적층이 비스듬히 눕혀져 있다.


여기서는 더 큰 난리가 났었다. 퇴적층이 아예 수직선으로 90도 세워져 있다. 


다이노소어 시를 지나자 플라밍고 국립 공원입니다. 불에 탄 듯한 퇴적층과 얼마 전에 갈라진 듯한 계곡은 중서부의 완만한 지형에 익숙해 있던 제게는 완전히 새로웠습니다. 대학원 시절의 동학이 살고 있는 솔트레이크시티를 향해 달려갑니다.


플라밍고 국립 공원


캔자스 주 로렌스(A), 캔자스 주 닷지시티(B) 콜로라도 주 베일(C) 콜로라도 주 다이노소어(D) 유타 주 마닐라(플라밍고 공원) (E)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 (F)를 구글 지도에 표시했다. 1275 마일, 2051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구글에 따르면 26시간 동안 운전하면 되는 거리인데 거의 1주일을 걸려서 느리게 갔다.


(5화는 7월 27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 관련 도서 (도서명을 누르면 도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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