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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여행] 11화 안과 밖의 경계에서 지낸 일본에서의 1년 반 본문

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11화 안과 밖의 경계에서 지낸 일본에서의 1년 반

Editor! 2017. 5. 13. 09:00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1999년, 모두 겪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저도 드디어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의 거취가 결정되지 않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돈도 다 떨어진 탓에, 중고 CD 시장이 아직 활발하던 시절이니 갖고 있던 CD도 팔고, 책도 다 팔고, 신용카드로 “돌려 막기”를 해야 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접었던, 피아니스트가 되려던 꿈을 다시 살리기 위해 음대 입시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들은 결국 지도 교수의 귀에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지도 교수께서는 당장 짐을 싸서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어와서 두 아이의 피아노 연습을 도와 주면서 지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극구 사양했습니다만, 사실 사양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가진 세간을 모두 모아 보아도 고작 큰 가방 하나에 들어갈 분량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 교수의 집에서 백 일을 보냈습니다. 매일 피아노도 많이 쳤고, 아이들 피아노 연습도 보아 주었습니다. 한편 채용 공고가 난 대학 교수 자리마다 지원서를 써 보냈습니다. 수십 장을 써 보냈지만, 돌아오는 소식이라고는 “원서를 내 주어 감사하다. 워낙 뛰어난 지원자가 많아, 유감이지만 당신의 지원서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짧은 편지들뿐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음악 대학 실기 시험도 놓친 데다, 비자가 만료되어 미국을 떠나야 하는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계시던 부모님께는 이 상황을 말씀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셨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해 드리자 어머니께서는 펑펑 우셨습니다.) 


바로 그때, 제 지도 교수께서 극적으로 이메일을 일본에서 한 통 받으신 것입니다. 박사 후 연구원을 채용할 수 있는 연구비를 지원받았으니 추천할 만한 졸업생이 있으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도 교수께 이메일을 보내 온 사람은 다카하타 나오유키 교수였습니다. 그는 제 지도 교수인 월포프 교수를 학회에서 한 번 만나고 감화(?)를 받아서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두 교수는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 논쟁은 그동안 화석 자료를 기반으로 맹렬히 진행되다가, 1987년 초 유전학자인 레베카 칸, 마크 스톤킹, 그리고 앨런 윌슨이 《네이처》에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미토콘드리아 DNA와 인류의 진화(Mitochondrial DNA and human evolution)」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유전학자들은 현대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연구해 놀라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으며, 기원 시점은 20만 년 전이라는 아프리카 기원론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월포프 교수는 그 대척점에 위치한 다지역 연계론의 주창자였습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럽•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기원했으며 200만 년 동안 하나의 종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일본의 다카하타 교수는 아프리카 기원론에 동의했습니다만, 유전자 자료만으로 인류의 진화를 연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고인류 화석 자료에 대해 자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다지역 연계론자를 구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할지 가타부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 길로 짐을 싸서 그해 4월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박사 학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종합 연구 대학원 대학 (소켄다이) 전경


인문 대학을 졸업하고 고인류학 전공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처럼,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일본 가나가와 현 미우라 지역 하야마에 위치한 유전학 연구소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개밥의 도토리와 같은 나날을 계속 보내고 있었습니다. 동료 연구원들은 모두 유전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 학자들입니다. 저는 그들의 전문적인 토론에도, 일상적인 대화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한편 연구소 사람들에게 저는 신기한 존재였고,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지만 이번만큼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구소는 수업을 하며 저를 가르치는 기관이 아니었고, 세미나는 일본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유전학 역시 발굴 작업 못지않게 몸이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은 24시간 기계를 돌리고 유전자 염기 서열을 뽑아 들여다보면서 의미 있는 자료를 ‘발굴’해 냈습니다. 한두 명이 머리를 모아서 논문을 쓰는 관행이 있던 인류학과는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앞으로 고인류학 분야에서 유전학의 입지가 점차 높아질 뿐 아니라 더는 인류학과에서 유전 인류학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겠다는 심증을 굳혔습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 전체가 술렁였습니다. 왕족이 연구소를 방문한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미우라 반도에 위치한 하야마에는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왕실 소유의 별장이 있어서 왕족들이 즐겨 머무르는데, 이번에는 연구소까지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되자 연구소 직원들은 정해진 연구실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연구소를 방문한 왕족 일행은 아키히토 일왕 부부와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왕자 부부였습니다. 아키시노노미야 왕자는 닭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만큼 일본 토종 닭의 유전학에 큰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참 놀랐습니다. 일왕 부부는 하루 종일 치른 행사에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에 비해 왕자 부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역시 관록이 남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연구실로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보스가 저를 앞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 이상희 씨는 원래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현재 제 연구실의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쪽 무릎을 굽히는 인사는 하기 싫었습니다. 내민 제 손을 잡고 일왕 부부는 격려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저만 꼿꼿하게 서서 일왕과 인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모두 허리를 굽히고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왕족이 떠나자 사람들은 각자의 연구실로 달려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제 두 번째 보스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일왕을 만난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일왕은 1945년에서야 인간 선언을 한 존재입니다. 그전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다름없었죠. 이들에게 일왕과의 만남은 반(半)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이지만 신앙심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하루였습니다. 저 또한 하루 종일 일왕과 악수한 오른손을 들여다보면서 나머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신비감이 들고 얼떨떨한 상태였습니다.


하야마는 미우라 반도에 위치해 있는 도쿄 근교의 소도시다.


일본의 연구실 조직은 엄격한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스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으로 층층이 연구원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보스를 떠나 다른 기관으로 이직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집단 문화 또한 강합니다. 연구원들은 매일 12시 정각이 되면 모여서 배달된 도시락을 먹습니다. 그 후 녹차를 한 잔 하고 1시 정각이 되면 각자 연구실로 돌아갑니다. 제게는 이런 생활이 숨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공수도 동호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원 소속 직원들이 매일 12시에 모여서 1시간 동안 연습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연구실 점심 시간을 마다하고 그곳에서 공수도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연구원 동료들이 가끔씩 슬쩍 지나가는 말로 저에게 눈치를 주었습니다. “보스가 너 점심 시간에 뭐 하냐고 묻던데?” 저는 모른 척하고 계속 공수도 연습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1년 정도가 지나자 더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저도 도시락을 같이 먹는 생활을 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모두 알아서 따로 했습니다만, 가끔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술 한 잔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모두 보스가 계산했습니다. 10여 년의 미국 생활 동안 각자 계산하는 것이 몸에 뱄던 저는 이런 상황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일본 연구실에 소속된 연구원 숫자만큼의 대학원 학생들을 지도했던 미국의 지도 교수를 저는 한번도 “보스”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도 교수의 뜻에 결국 항상(?) 순종했지만, 따지고 대들고 먹고 마신 값은 각자 계산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지도 교수는 분명히 “보스”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반발심은 많이 누그러지고 시스템이 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졌습니다. 


1999년 10월에 열린 고든 학회 참가자들의 단체 사진. 당시 쟁쟁한 분자 진화학자들이 모였다. 나는 제일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다.


제가 있던 1년 반 동안 저는 딱히 연구원의 일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인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지냈던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역시 ‘인사이더’도 아니고 ‘아웃사이더’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모호함은 저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에, 일본에서도 크게 괘념하지 않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문화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깍듯한 예의 범절에서, 제가 결코 일본의 ‘인사이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부담 없이 아웃사이더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웃사이더로서 재미있었던 경험은 언어에서 나타났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제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했고, 일본어로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어 공부를 연구소 바깥에서 따로 했고, 꽤 능숙한 일본어를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일본어를 들은 일본인들은 제 일본어에 한국인 특유의 억양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일본어를 영어로 배웠거든요. 제가 일본어로 열심히 이야기할 때보다 영어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제게 친절과 배려를 베풀었습니다. 제가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얻지 못했을 도움도 영어로 이야기하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혹여 제 일본어에 묻어나는 한국어 억양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기원』에서도 나오지만, 바로 이 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구원이던 시절에 야쿠자 입회식에 잠입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도 교수께 여쭈어 보았더니 당장 “안 돼!”라는 조언을 들었다는 일화였죠. 사실은 그때 동료 연구원들에게도 조언을 구했습니다. 동료들은 야쿠자 입회식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려할 여지가 추호도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집과 자동차 앞에서


창문 너머로 바다가 바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원룸과 연구실을 저는 경차로 오갔습니다. 단지 미국에서 왔다고 해서, “미국인”이라고 부르면서 저에 대한 배려로 제공된 차였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마다 한숨을 쉬듯 덜거덕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가끔 드라이브를 하면서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계속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신문의 과학 담당 기자가 될 수 있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박사 후 연구원을 끝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자리 잡기를 바랐던 지도 교수께서는 제 계획을 듣고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야쿠자 입회식 사건으로 인해 저에게 불안함을 느끼신 듯합니다. 때마침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근교의 작은 대학교에서 1년짜리 임시 교수직 모집 공고가 났습니다. 별 기대 없이 지원했는데 채용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마침 박사 후 연구원 자리는 끝났습니다. 저는 다시 큰 가방 하나에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에서의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은 2001년에 나온 논문 한 편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정리한 2001년의 논문. 출처: Takahata, N., Lee, S-H., Satta, Y. (2001). Testing multiregionality of modern human origins. Molecular Biology and Evolution, 18(2), 172-183.


대학원 졸업 후,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모든 일은 우연하고도 완벽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제 와서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죠. 하루하루를 겪던 그 시절에는 완벽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았습니다. 




※ 관련 도서


『인류의 기원』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