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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지막 낭만의 수상기 본문

완결된 연재/(完) 비행기, 역사를 뒤집다

2. 마지막 낭만의 수상기

Editor! 2017. 6. 12. 13:29


2. 마지막 낭만의 수상기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92년 개봉작 「붉은 돼지」에 나오는 명대사다. 25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받은 감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마지막 낭만을 불태웠던 지중해의 파일럿들. 상상의 산물 같지만 이 이야기는 현실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이 슈나이더 트로피다. 주인공 포르코의 라이벌인 커티스는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 우승자였고, 포르코의 전투기를 수리하던 피콜로 영감은 ‘지브리(GHIBLI, 제작사 이름을 집어넣음)’ 엔진을 자랑스레 내놓으며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를 언급했다.  


슈나이더 트로피(By Original image Trounce: This edit by Eric Menneteau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비행기가 걸음마를 떼던 1913년, 프랑스의 부호 자크 슈네데르(Jacques Schneider, 1879~1928년)가 주최한 수상기 속도 경주 대회가 바로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이다. 왜 하필 수상기였을까? 당시 비행기들은 이착륙 거리를 단축시키는 플랩(flap, 항공기 날개 단면 모양을 변형시켜 양력을 늘리는 장치로 종류가 다양함)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이러다 보니 속도가 빠른 비행기는 속도에 비례해 착륙 거리도 길어졌다. 그렇다고 한정 없이 활주로를 길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이때 등장한 게 수상기다. 바다나 호수는 착수(着水)를 걱정할 필요가 없이 좀 큰 강이나 호수만 있으면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 활주로 때문에 속도 경쟁을 할 수 없다는 소리가 쑥 들어가고 남은 것은 비행기 제작사들의 ‘의지’였다.  


비냐 디 발레 이탈리아 공군 기지 박물관의 M.39(By Bergfalke2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세계 최고속 비행기 타이틀을 따기 위해 각국의 비행기 제작사는 미친 듯이 덤벼들었고, 덩달아 국민들도 열광했다. 오늘날의 스포츠 민족주의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초창기에는 비행기 제작사들이 자금을 조달했지만, 항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돈과 시간을 더 많이 필요로 했다. 매년 개최되던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도 1927년이 되면 비행기 제작 기간이 길어져 격년제로 바뀐다. 제작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제작비도 상승해 감당하기 어려웠던 비행기 제작사들이 정부에 손을 내미는데 이때 힘을 발휘한 게 ‘스포츠 민족주의’다.


1926년 이탈리아의 마키 사(Macchi)의 우승과 1931년 영국 슈퍼마린 사(Supermarine)의 우승은 민족주의의 우승이라고 볼 수 있다. 1926년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엄청난 압력(?!)으로 마키 사에 지원을 해 준다. 마키는 이 지원을 등에 업고, 당시로는 최신형이던 피아트의 12기통 800마력 엔진을 마키 M.39에 탑재해 그해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1931년 당시 영국 왕립 항공 클럽은 영국 공군과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이를 묵살했다. 그러자 여론이 들끓어 결국 휴스턴 여사(Lucy, Lady Houston, DBE , 1857~1936년)가 10만 파운드를 슈퍼마린에 기부하면서 그해 우승을 거머쥐고 덤으로 슈나이더 트로피를 영구 보유한다. (월드컵과 똑같이 3회 연속 우승 결과 영국이 영구 소유함)


“국가의 스폰서로 비행하는 게 최고야.”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페라린의 말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시절이 되면, 개인이 비행기를 만들어 날아오른다는 것은 꽤 난망한 일이 됐다. 비행기는 비싸고, 더구나 최신형 기체는 더 비싸서였다. 「붉은 돼지」 내내 민족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변질된 파시즘을 배격하는 모습이 나왔지만,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에도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슈나이더 트로피를 두고 다투던 이 시기가 항공기의 마지막 낭만을 불태웠던 시절인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렇게 낭만을 불태우며 만든 비행기와 조종사 들이 이후 벌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이다.



1925년 슈나이더 트로피 우승 파일럿 둘리틀. 17년 뒤 도쿄에 불벼락을 떨어뜨린 장본인이다.


‘붉은 돼지’ 포르코의 라이벌인 커티스의 실제 모델은 1925년 커티스 R3C-2 경주기로 1925년 슈나이더 트로피를 미국에 안겨 준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1896~1993년)이다. 그가 세운 시속 245.7마일(시속 395.4킬로미터) 기록은 당시 공학 기술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복엽기, 게다가 무게와 항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플로트(float, 수상에 달려 있는 부주(浮舟))를 달고도 400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를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복엽기로서는 마지막 우승이다. 재미난 사실은 이때 R3C-2에 장착된 엔진이 커티스 사의 V-1400 수랭식 엔진이었다는 대목이다. 커티스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겠는가? 둘리틀 준장(이 보복 작전으로 중령에서 바로 준장이 됨)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첫 보복 작전을 주도한 바로 그 둘리틀이다. 항공모함에 육군의 쌍발 폭격기인 B-25미첼 폭격기를 싣고 가,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와 오사카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온 인물이다.


당시 일본은 종횡무진 태평양과 인도양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그 충격은 대단했다.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했지만 군 수뇌부들은 적잖이 동요했고, 이 동요가 이후에 있을 미드웨이 해전의 실마리가 됐다. 일본인들에게 둘리틀이 어떻게 보였을까? 작품 내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 커티스의 모습은 어쩌면 소심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슈퍼마린에 3회 연속으로 우승 트로피를 안겨 준 S 시리즈, 그중 S6A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구해냈다. 슈퍼마린 설계 주임인 레지널드 미첼(Reginald Mitchell, 1895~1937년)은 저익 단엽기를 설계하는데, 700마력짜리 네이피어 라이언(Napier Lion) 엔진을 장착한 S5 기체로 우승한다. 다음 대회에는 네이피어 라이언보다 훨씬 강력한 롤스로이스 엔진을 탑재한 S6A가 등장해 우승하고 그 다음 대회에서는 S6A를 개량한 S6B로 우승해 3회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세운다. 이 기체가 제2차 세계 대전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의 주역으로 재탄생한 것이 바로 스피트파이어(Spitfire)다. 레지널드 미첼은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에서 증명된 S 시리즈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영국 최초의 전금속제 전투기 스피트파이어를 제작한다. 그리고 이 기체는 1940년 온 유럽을 집어삼킨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영국을 정복하려 할 때 최일선에서 영국을 지켜낸 최고의 검으로 활약한다.  



1929년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에서 우승한 슈퍼마린 S6. 스피트파이어와 비교해 보면 실루엣에서 닮은꼴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붉은 돼지」의 애기(愛機), S.21는 유감스럽게도 역사상 실존하지 않는다. 명칭은 경주용 수상기 SIAI S.21에서, 디자인은 마키 M.33에서 (거기에 지브리 엔진을 얹고) 가져온 듯하다. 이제는 국가의 스폰서가 없으면 날아오르기 힘든 세상이 됐기에 더욱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 없이 그저 개인의 욕망 하나로 날아오를 수 있었던 마지막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슈나이더 트로피 대회와 수상기는 잃어버린 낭만의 한 자락을 선사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하늘과 바다를 꿈꾸며 날아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54~55쪽 「속도 신기록 세우기」와 112~115쪽 「스피트파이어」도 보자.





펜더 이성주

《딴지일보》 기자를 지내고 드라마 스토리텔러, 잡지 취재 기자,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SERI CEO 강사로 활약했다. 민간 군사 전문가로 활동하며 『펜더의 전쟁견문록(상·하)』와 『영화로 보는 20세기 전쟁』을 썼다. 지은 책에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1』, 『글이 돈이 되는 기적: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 『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아이러니 세계사』, 『역사의 치명적 배후, 성』  등이 있다.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지방으로 이사해 글 쓰는 작업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