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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나의 영웅! 『종의 기원』: 장대익 편 ② 본문

(연재) 과학+책+수다

다윈은 나의 영웅! 『종의 기원』: 장대익 편 ②

Editor! 2019. 8. 20. 17:58

사이언스북스의 「과학+책+수다」, 이번 편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원전 초판 출간 160주년을 기념해 우리말로 번역, 출간한 장대익 서울 대학교 자유 전공학부 교수 편입니다. 지난 1편에서는 『종의 기원』을 번역, 출간하게 된 사연, 여러 판본 중 초판(1판)을 번역한 이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16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시대에 전해 주는 메시지 등을 다양하게 이야기 나눴습니다. 2편에서는 「과학+책+수다」 독자들에게만 공개하는 『종의 기원』 독법, 과학과 종교의 관계, 그리고 장대익 교수의 이후 연구 계획 등 어디서도 읽을 수 없는 정보가 담겼습니다.


「과학+책+수다」 열두 번째 이야기

다윈은 나의 영웅!

『종의 기원』: 장대익 편 ②

 

인터뷰 중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와 『종의 기원』의 표지.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종의 기원』은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나?

 

SB : 그러면 『종의 기원』의 책 내용으로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종의 기원』 출간을 준비하면서 읽는데, ‘궁극의 고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오랫동안 펴내 온 수많은 진화론 책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거의 다 다루고 있더군요. 동식물의 변이와 그 대물림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인간 본성과 심리의 진화적 기원에 대한 문제까지, 이타성의 진화는 물론이고, 예술의 기원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까지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들이 다 『종의 기원』 속에 담겨 있더군요.

 

장대익 : 그렇죠.

 

SB : 플라톤의 『국가』를 가리켜서, 철학자들은 전 세계의 철학 책이 없어져도 이 책 한 권만 남아 있으면 서양 철학을 재건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다윈의 『종의 기원』도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160년 진화학의 역사를 재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을 번역하시면서 선생님께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비둘기 얘기 말고, 한두 가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장대익 : 비둘기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시니, 따개비 얘기를 해 볼까요. (웃음) 『종의 기원』에는 따개비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비둘기만큼은 아니지만. 책에서는 ‘만각류’라고 했죠. 『종의 기원』은 사실 다윈이 8년간 따개비류를 연구하고 나서 1,0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쓰고 난 다음에 쓴 책입니다. 원래 다윈은 당시 50세였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지질학자였죠. 찰스 라이엘 뒤를 잇는 최고의 지질학자로 평가받고 있었죠. 지금과 같은 의미의 생물학자는 아니었어요. 다윈은 비글 호 탐험 이후, 자신의 수집품들과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자기 집의 정원에서 실험하고, 동네 육종사는 물론이고, 왕립 학회의 생물학자 들과 교류하면서 생물 분류학을 공부하고 아마추어 광물학자들하고 소통하면서 화석 기록에 대한 내공을 축적해 나가죠. 그러다가 어느새 생물학의 굉장히 깊은 단계까지 나간 것 같아요. 『종의 기원』을 보면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적 동일 과정설을 기반으로 삼고, 화석학, 분류학, 해부학, 육종학 등 온갖 생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 선택을 통한 생명 진화를 논증해 가잖아요. 그러니까 『종의 기원』은 다윈이 그동안 공부했던 것을 총망라한 책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느낌을 다른 책을 번역할 때도 느낀 적 있어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최 교수님과 번역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죠. 19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인데, 중간에 갑자기 ‘나노 물리학’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이것을 보면서 ‘생물학자가 나노도 알아? 이 사람 지식의 끝이 어디지?’ 하는 생각을 했죠. 지식의 폭이 엄청 넓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종의 기원』도 일종의 ‘통섭’을 이룬 책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물론, 다윈이 당시의 화학이나 물리학 발전 상황 같은 걸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지만 생명 현상과 관련된 수많은 지식들을 섭렵해, 하나로 통섭해 내고 있죠.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이 책 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죠. 지금 현대 생물학자들이 하는 아주 첨예한 논쟁들도 다 들어 있어요. 예를 들면 이타성의 진화 같은 이슈가 대표적이죠. 왜 일개미는 불임인가 하는 문제를 『종의 기원』에서 던지고 있거든요. 이것은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진화 생물학계를 커다랗게 양분하는 큰 주제예요. 그리고 동물 수컷의 정말 화려하지만 비효율적인 기관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던져요. 현대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미학에서는 이런 것들을 성 선택, 적응과 부산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160년 전에 다윈은 벌써 이런 개념을 선취하고 있어요.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에 대한 언급도 그래요.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이 자기 이론이 난점이라고 고백해요. 저는 같은 학자로서 이 부분이 짠하게 다가와요.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책의 후반부라고 할 9장과 10장인데, 그 앞까지는 당당하고 과감하게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를 논증해요. 그런데 책 후반부에 반전을 가져다 놓죠. 우리는 아직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생물의 화석을 캐내지 못했다. 이 지질학적 기록(즉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 때문에 내 설명은 아직은 불완전하다고 고백하는 거죠. 저는 이게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찰스 다윈의 초상화. 1830년대 모습. 위키피디아에서.

20세기 중반 당시까지의 진화론을 집대성한 에른스트 마이어가 『종의 기원』을 가리켜 “긴 논증(a long argument)”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이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을 다룬 부분이 이것을 잘 보여 줘요. 변이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현상이 있는데, 이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은 이것이다, 그런데 대안적 설명들이 있는데, 이 대안적 설명들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원래 가설이 더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가설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들이 이러저러한 게 있다, 하는 식의 글쓰기를 보여 주고 있죠. 그런데 이게 바로 현대 과학 논문을 쓰는 방식이거든요! 이런 측면 때문에 독자들은 『종의 기원』이 좀 늘어진다고 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공평하게 서술하면서 어떤 현상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렇게 본다고 길게 설명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변명 투죠. 그래서 늘어져요. 또 다윈의 조심스러운 성격이 글 곳곳에서 잘 드러나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대담한 추론을 하고 대담한 이론을 낸 사람이지만 글쓰기 방식은 정말 뭔가 예민한 사람인 거예요.

 

SB : 저희가 「드디어 다윈」 시리즈의 다윈 원전으로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이 세 권을 고른 게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를 논증하는 ‘진화 3부작’이기 때문인 것과 연관이 있는 얘기군요. 첫 책인 『종의 기원』이 1859년에 나왔고, 두 번째 책인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 1871년,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 1872년에 나왔으니 13년에 걸친 정말로 ‘기나긴 논증’을 한 셈이군요.

 

장대익 : 네. 제가 생물 철학을 공부하지 않습니까. 생물 철학의 상당 부분이 『종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탐구하죠. 그러니까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자연 선택 이론의 구조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들을 연구하는 거죠. 그만큼 『종의 기원』에 담겨 있는 논증의 구조가 재밌고 의미 있다는 뜻이에요. 그냥 자연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나 현상을 나열하거나 그냥 제시한 게 아니고요. 궁극적 설명을 향해 가는 어마어마한 긴 논쟁을 하고 있는 거죠. 더 놀라운 건 다윈이 『종의 기원』을 스케치 또는 일종의 초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썼다는 겁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었다는 거예요. 건강상의 이유나 기타 이유 때문에 못했지만 말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의 기원』은 엑기스인 겁니다.

 

다윈과 비슷한 예를 그의 후배 진화학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리처드 도킨스는 35세에 『이기적 유전자』를 썼죠. 그 책의 한 챕터, 한 챕터가 다음 책으로 발전해 나왔죠. 예를 들어 13장 「유전자의 긴 팔」에서 『확장된 표현형』이 나온 게 좋은 예죠. 위대한 소설가의 데뷔작에 그의 후속 소설이 다 들어 있고, 어떤 학자의 박사 학위 논문에 평생 연구 주제가 다 녹아 있는 것처럼 말이죠.

 

SB : 선생님 박사 논문은 뭐죠? (웃음)

 

장대익 : (웃음) 노 코멘트.

 

SB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볼까요? 독자들을 위한 독서 팁을 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윈의 책은 어떤 순서로 읽으면 좋을지요? 정글처럼 깊고 복잡하고 그리고 방대한 다윈의 사상을 바라보고 머뭇거리는 독자들의 용기를 북돋을 수 있는 가이드를 좀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장대익 : 진짜 많은 사람들이 『종의 기원』 1장을 읽다가 다 그만두죠.

 

SB : 그렇죠.

 

장대익 : 비둘기 얘기가 너무 길죠. 사실 비둘기 이야기를 현대 독자 중 누가 좋아하겠어요. 육종의 역사를 연구하는 수의사들이나 관심 가질지 모르죠. 도대체 이놈의 비둘기 이야기는 어디서 끝나나, 그리고 또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나,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데 이게 뭐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다 책장을 덮고 마는 거죠. 어떻게든 2장까지 넘어간다고 해도 온갖 동식물의 변이 얘기가 또 길게 길게 이어져요. 여기서 또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죠.

 

그런데 다윈 시대에는 이 1장과 2장이 정말로 재미있는 부분이었어요.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는 지금의 육종가나 수의사나 하는 선택적 교배를 통한 희한한 변이 만들기가 일종의 취미로서 유행하고 있었어요. 비둘기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그리고 장미나 튤립 같은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흔하게 보는 다양한 동식물의 변이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계층과 상관없이 유행했어요. 품평회 같은 것도 유행이었죠.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1장, 2장은 너무나 흥미로운 얘기였죠. 오늘날 독자들이 보기엔 지루하기만 하지만 말이죠. 다윈이 되살아나 다시 『종의 기원』을 쓴다면 아마 이렇게 시작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현대 독자들에게 저는 1, 2장은 과감히 뛰어넘고 3, 4장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3장이 바로 「생존 투쟁」이죠. 오랫동안 ‘생존 경쟁’이라고 번역되던 struggle for existence를 저는 이번에 ‘생존 투쟁’이라고 번역했어요. 다윈은 competition, 즉 경쟁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써요. 그렇기 때문에 생존 투쟁으로 번역하는 게 더 맞겠죠. 그리고 자연 선택 이론의 핵심을 명징하게 해설해 놓은 게 바로 4장이에요. 변이의 조건, 적합도의 조건, 그리고 대물림 조건의 순서로 현대 진화론의 핵심 이론 구조가 그대로 나와요.

 

그래서 저는 3, 4장을 먼저 읽기를 권해 드려요. 이 두 챕터만 읽어도 『종의 기원』이 왜 세계를 바꾼 책으로 평가받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그런 다음에 1, 2장으로 돌아가 보세요. 그러면 비둘기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늘어놓았는지, 자연 상태의 변이를 왜 이렇게 길게 나열했는지 알 수 있어요. 나아가 다윈의 기술이 무척 풍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자연의 신비까지 느낄 수 있어요. 그다음에는 어디를 읽어야 할까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변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얘기를 못 했잖아요. 그것을 설명하는 챕터인 5장 「변이의 법칙들」인데 이 챕터는 사실 읽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스킵’하셔도 됩니다. 변이의 법칙들에 대한 다윈의 설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 부분 틀린 얘기가 많기 때문이죠.

 

5장을 건너뛰고 6장을 읽으세요. 「이론의 난점」이라는 장제목 그대로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의 난점을 고백하고 있는 챕터죠.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 여러분은 다윈에게 ‘빙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7, 8, 9, 10, 11장이 바로 이 난점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이 한계라고 고백한 부분들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치밀하게 반박해 나가고 있어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부분이 정말 재밌어요. 하지만 이 부분을 꼼꼼하게 읽을 시간이 없을 경우에는 모두 건너뛰고 14장으로 가는 거죠. 사실은 다윈의 요약을 읽는다고 다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3장, 4장을 읽으신 다음에 요약을 갈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장들만 읽어서는 요약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3장, 4장, 14장 요약을 읽어 보시면 다윈의 이론이 큰 틀에서 어떤 이론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3, 4장을 먼저 읽기를 권해 드려요. 이 두 챕터만 읽어도 『종의 기원』이 왜 세계를 바꾼 책으로 평가받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그런 다음에 1, 2장으로 돌아가 보세요. 그러면 비둘기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늘어놓았는지, 자연 상태의 변이를 왜 이렇게 길게 나열했는지 알 수 있어요.” 인터뷰 중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SB : 3장, 4장, 14장을 읽으라는 거군요.

 

장대익 : 네. 3장, 4장, 14장 이게 제일 빠르게 읽는 순서가 되겠죠. 좀 더 풍요로운 독서를 경험하시고 싶은 분들은 3장, 4장 읽으시고, 1, 2장 읽으시고, 5장 스킵한 다음, 6장 읽으시고, 7, 8, 9, 10, 11, 12, 13장 중 한두 장을 읽으면서 다윈에 빙의되는 체험을 하시고, 14장으로 넘어가 다윈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요약한 걸 음미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독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죠. 당연히 시간 나시는 분들은 다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들여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니까요.

 

SB : 그렇죠. 궁극의 책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자세한 『종의 기원』 독서 지침은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저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읽었을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씀 감사합니다.

 

 

 

다윈은 나의 영웅

 

SB : 그러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죠. 장대익 선생님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윈이 창조설을 버리지 않았다는 루머가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다윈이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강경한 무신론자는 당연히 아니었고, 불가지론자, 더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자’였다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죽을 때 ‘회개’해 기독교로 돌아왔다고도 하죠. 다윈 자신도 자식들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에서 자신을 ‘무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자’라고 기술하기도 했고, 종교에 대한 자기 입장을 공개 표명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진화론이 가져다준 충격을 완화하려는 일종의 ‘물타기’일지도 모르죠. 또 앞에 말씀하신 대로 다윈 스스로 『종의 기원』 2판부터 마지막 문장에 “창조주에 의하여” 같은 문구를 넣은 탓이겠죠. 그런데 이번에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초판을 보니까, 다윈이 창조설을 집요하게 논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종의 기원’이라는 현상은 창조설이 아니라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을 통해 더 명징하고, 더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더군요. 또 창조설의 한계에 대해서도 계속 비교해 가면서 지적하고 있고요. 챕터마다 하나씩 나오는 것 같더군요.

 

장대익 : 네. 그렇습니다.

 

SB : 이렇게 많이 나올지는 몰랐어요. 결국 다윈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강경한 불가지론자였고, 유신론적 진화론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을 여지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다윈이 21세기를 살았다면 도킨스 같은 강경한 무신론자로서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대익 선생님과 다윈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청년 시절에는 신학도였던 다윈이 결국 불가지론적 자연주의자가 되었던 것처럼 기독교 복음주의 잡지였던 《복음과 상황》의 편집 위원도 역임하시는 등 유신론적 진화론자로서 활동하시다가 이제는 “종교의 유통 기한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시면서 기독교 계열 종교의 한계를 지적하시는 무신론적 진화론자로 진화하셨잖아요.

 

장대익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다윈이 먼저 갔던 길을 똑같이 걸었다고 생각해요. 다윈은 자연 선택을 통해 그가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고 부른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난 후 세계관 전복을 경험했겠죠.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 다양성을, 다시 말해 온갖 생물의 다종다양한 놀라운 형태들, 놀라운 기능들, 놀라운 행태들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겠구나, 여기에는 신이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 같은 건 필요 없겠구나 하고 깨달았겠죠.

 

역사가들에 따르면, 다윈이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쓴 게 1842년 6월인데, 이때 부인인 엠마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부인, 생물 종의 발생과 진화에 관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엠마는 굉장히 걱정하면서, 당신이 그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 하고 말했다고 하죠. 국교회에 반기를 들 생각이냐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윈은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에 대한 이론 연구를 부인 모르게 진행하죠.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다가 “I think”로 시작하는 종 분화 그림도 그리고, 이론도 다듬어 나가죠.

 

아무튼 생각을 한번 하게 되면, 사실 신은 필요 없어요. 적어도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신은 필요하지 않아요. 물론 신을 믿어서 내 마음이 편해졌다, 삶의 목적이 생겼고, 그래서 인생이 참 풍요로워졌다 하는 건 좋아요.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실용주의적’ 덕목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나 학문 세계에서는, 적어도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데서는 더 이상 신의 설계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거죠.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는 아주 기계적이고 알고리즘적인 메커니즘이니까요. 저도 이런 세계관 전복 과정을 그대로 겪었습니다.

 

사실 제가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러한 다윈주의적 진화와 제 종교, 즉 기독교를 어떻게든 타협시켜 보려고 했어요. 어떤 교점을 찾아보려고도 했고요.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게 원래 이런 시도지요.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 이 둘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생명체들이 점점 더 복잡, 정교해지고, 그리고 다양해지는 세계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 또는 그것이 있을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어요. 바로 인간의 머릿속, 뇌의 신경망 안이죠. 그리고 그 뇌는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산물인 거죠. 다윈의 진화론과 기독교의 창조설은 완전히 다른,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일 뿐입니다. 여기가 제가 도착한 지점입니다. 아마 다윈 선생님도 160년쯤 전에 여기에 도달했을 거예요.

 

종의 발생과 분화 과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록한 찰스 다윈의 비밀 노트. 나무 모양 그림 위에 “I think”라는 글자가 읽힌다. 위키피디아에서.

다만,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던 당시, 다윈은 독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쓸 때 머릿속에 둔 독자는 크게 두 부류였죠. 첫 번째, 창조설 지지자들이었죠. 당연히 당시 창조설은 ‘가설’이 아니었죠. ‘정설’이었죠.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정설이었고, 고대 그리스 이후 서양 지성사 속에서도 굳건한 정설이었죠. 우리가 아는 수많은 위대한 지식인들 모두가 창조설을 믿었어요. 다윈은 자신의 주장이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을 다 알고 있었죠.

 

두 번째 독자는 광물학과 지질학을 통해 수집된 지식을 바탕으로 생물 종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부 지식인 독자들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죠. 임시방편적으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정향 진화설 따위가 설명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죠.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독자들에게 지적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보완적이며 독창적인 설명임을 알고 있었죠.

 

하나의 긴 논증이었던 『종의 기원』이 거론하고 논파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이 두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들이었죠. 그러니 창조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나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공격적 언급이 『종의 기원』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다윈을 만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터뷰 중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SB : 다윈의 길을 밟는다는 게 힘드시지는 않았는지요? 다윈은 자신이 신앙을 완전히 버렸음을 신중하게 감췄지요. 그래야만 했던 시대적 이유도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셨고, 심지어 한국 무신론자들의 선봉에 나서시기도 했죠. 어떤 고통이나 후회는 없었는지요?

 

장대익 : 후회라뇨? 저는 이 세계관 전복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더 풍요로워졌고 사상적으로도 더 깊어졌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도 얻었죠. 인간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그리고 강력한 관점을 갖게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잘한 일이라고,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다윈을 만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 본성이 깃든 사회를 꿈꾸며

 

SB : 인생에서 잘한 일은 다윈을 만난 거라, 카피로 쓰기 좋네요.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려 보죠. 선생님께서는 진화학자로서 『종의 기원』을 번역하는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게 선생님께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텐데 진화학자로서는 다음에 이루고자 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장대익 : 연구에 대한 건가요, 아니면 다른 활동에 대한 건가요?

 

SB : 앞으로의 연구하고 활동 또는 실천에 대한 질문입니다.

 

장대익 : 연구부터 얘기해 볼까요. 지금은 공감이나 도덕성 같은 것들이 어떻게 우리 마음에 각인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도덕 심리학 혹은 사회 심리학의 범주 안에 들어갈 만한 주제지요. 그러니까 ‘공감의 진화’를 연구한다고 할 수 있겠죠. 앞으로도 한동안 공감의 진화, 사회성의 진화, 이런 걸 계속 연구할 생각입니다. 이런 주제를 연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감과 사회성의 본능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지금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살고 있어요. 인공 지능(AI) 기술과 유전체 편집 기술은 인류의 진화 방향을 조정하거나 나아가 확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인류의 심리 구조,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오래된 거거든요. 그래서 인류가 만든 기술 문명과 우리의 마음 사이에는 일종의 ‘갭’이 있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왜 우리는 어떤 AI는 편하게 생각하고 다른 AI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왜 블록체인의 어떤 부분은 무척 편한데 다른 부분은 꽤 불편한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마음의 반응은 미묘한 구석이 있어요. 이런 문제를 우리 서울 대학교 인간 본성 및 생물 철학 연구실(연구실 링크)에서 연구하고 있죠. 그런 문제들에 답을 해 보고 싶어요.

 

장대익 교수가 주임 교수로 있는 서울 대학교 인간 본성 및 생물 철학 연구실 홈페이지. 홈페이지의 연구실 소개에 따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와 철학적 탐구를 총동원”한 “본성학(nature studies)” 연구가 중심 주제이다. 사진: 인터넷 갈무리.

SB : 기술 문명이 만든 인공 환경 속에서 인간 본성의 진화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과 문명의 상호 작용의 산물인 밈(meme)들의 생존 투쟁을 연구한다고 보면 되겠군요. 나아가 이 진화와 생존 투쟁이 인간이라는 생물 종의 물리적 생존 또는 진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연구하는 거고요.

 

장대익 : 그렇죠. 다윈 선생님은 자연 환경만 생각하면 됐죠. 당시에도 증기 기관에 의한 산업 혁명이 한창이었으니,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던 시대였죠. 그렇다고 인간의 조건 자체를 바꿀 만큼은 아니었어요. 보조하는 정도였다고 할까요. 우리의 팔이 육체 노동하는 것을 도와주고, 우리의 다리가 좀 더 빨리 가도록 도와주는 근육 강화 장치 또는 보조 장치였죠.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고, 인간의 정체성과 동등한 역할을 할 어떤 것을 만들지도 모를 정도의 기술들이 막 나오고 있죠. 그중 어떤 것은 인간 조건을 확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옥죄고 있죠. 이건 다윈이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죠. 아니, 안 한 부분이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수 없었던 주제죠. 따라서 저나 다윈 포럼의 선생님들 같은 우리 다윈의 후예들은 이제 인류가 만들어 낸 인공물로 재구축된 환경에서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변해 갈지,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갈지 다윈처럼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다윈보다 더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찰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공물은 자율 주행 자동차나 로봇 같은 기계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BTS 같은 그룹과 그들이 만드는 브랜드와 콘텐츠 같은 문화적 변이들 역시 일종의 인공물이에요. 왜 BTS가 그렇게 글로벌 시장에서 널리, 빠르게 확산되었는가, 왜 안 뚫릴 것만 같았던 북아메리카 시장, 영어권의 청소년들이 BTS에 열광하게 됐을까? 같은 인종도 아닌 데다가 영어도 아닌데. 외국의 BTS 팬들은 한국어 노랫말에 “내 인생에 의미를 줬어!” 하고 감동하죠.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이런 현상을 문화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떨까? 무척 흥미롭지 않을까요? 그런 연구의 결과가 나오면 어떻겠습니까? 그걸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고 좋아할 만한 상품이나 조직을 만들어 내는 데 응용할 수 있죠. 기초 연구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응용 연구의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연구가 될 겁니다. 산학 협동 연구 하면 보통 전자 공학과 소재 공학과 같은 데서 주로 하지만 진화학 연구실도 산학 협동의 길을 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새로운 비즈니스로 연결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저는 요즘 기업 강연 갈 때면 인간 본성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설명하고 나서는 인간 본성이 깃든 그런 비즈니스를 한번 꿈꿔 보시라고 권하고는 하죠. 요즘 좀 먹히고 있어요. ‘결국 인간을 알아야지, 인간이 사용하는 제품들을 만들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우리 기업 쪽에서도 아주 진지하게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부분을 실험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으면 좋겠고요.

 

SB : 말하자면 ‘인간 본성에 기반한’ 연구를 하시는 셈이군요. ‘인체 공학적’이라는 표현 있지 않습니까. 의자나 침대 같은 가구에 카피로 잘 붙이는. 그런 것처럼 ‘인간 본성 공학적’이라는 표현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장대익 : 그렇죠. 하지만 저는 ‘기반’이니 ‘공학적’이니 하는 표현보다는 좀 더 시적으로 ‘인간 본성이 깃든 공학 기술’, ‘인간 본성이 깃든 비즈니스’, ‘인간 본성이 깃든 조직’, ‘인간 본성이 깃든 사회’ 같은 표현이 좋군요. ‘인깃’이라고 줄여 볼까요. (웃음)

 

SB : 멋진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기업 강연 갈 때면 인간 본성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설명하고 나서는 인간 본성이 깃든 그런 비즈니스를 한번 꿈꿔 보시라고 권하고는 하죠.” 인터뷰 중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다음 편에 계속)


장대익

서울 대학교 자유 전공학부 교수. 문화 및 사회성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학자로 학술, 문화, 산업 등 분야를 넘나들며 지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제11회 대한민국 과학 문화상을 수상했다. 『다윈의 식탁』, 『다윈의 서재』, 『다윈의 정원』, 『종교 전쟁』, 『울트라 소셜』, 『통섭』 등의 책을 쓰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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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다윈: 『종의 기원』 깊이 읽기 * 수강료 : 총 6강, 12만 원 * 신청 기간 : ~2019년 9월 17일(화) * 도서 『종의 기원』(찰스 다윈,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9년) 개별 필수 지참 (문의) Tel : 02-515-2000 (내선 376) E-mail : islet@minumsa.com 나의 강연 결제 내역을 조회하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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