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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계 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감기 - 스페인 독감 본문

완결된 연재/(完) 무서운 의학사

4. 세계 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감기 - 스페인 독감

Editor! 2020. 2. 28. 16:06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200편 이상의 의학사 관련 칼럼을 쓴 이재담 교수님의 『에피소드 의학사』(2020년 3월 출간 예정)에서 전염병과 관련된 6편의 글을 미리 보는 특별 연재 '무서운 의학사'. 어느덧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연재의 주제는 최근 코로나19와 자주 비교되며 이젠 우리에게도 그 존재가 친숙한, 인류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로 손꼽히는 1918년의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세계 인구가 16억 명이던 시절, 감염자만 6억에 2000만 명에서 5000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내며 대유행(pandemic) 했던 이 전염병. 세계 보건 기구(WHO)의 코로나19 판데믹 선언이 과연 이루어질지, 이루어진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지 전 세계가 숨 죽이고 있는 지금 이 무서운 독감의 기록을 보며 우리 마음가짐을 새롭게 바로잡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서운 의학사

4. 세계 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감기
스페인 독감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1918년경, 캔자스 주 포트 라일리의 캠프 펀스턴 내 군병원의 모습. public domain

중세의 페스트 이후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강력한 유행병으로는 1918년부터 1년 동안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이 꼽힌다. 세계 인구가 16억 명이던 시절, 감염자만 6억에 2000만 명에서 5000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낸 큰 재앙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8년 봄 미국에서 시작된 이 병은 유럽에 파견된 미군을 통해 프랑스, 또 스페인으로 퍼졌는데, 처음에는 전염성은 매우 강했지만 금방 낫는 단순한 감기였다. 6월 말까지 스페인에 약 800만 명의 환자가 발생하자 사람들은 이 병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만은 ‘프랑스 독감’으로 불렀다.)1)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1918년의 풍자화. Ernest Noble, CC BY 4.0

그러나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양상이 일변했다. 전염성은 그대로였지만 독성이 강해진 것이다. 두 번째 유행은 빠르게 지나가면서 조용히 사람들을 죽였다. 밤늦도록 카드 게임을 같이 한 여성 4명 중 3명이 다음 날 아침에 죽을 정도로 병의 진행 속도는 빨랐다. 세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보건 담당자는 도로에 화학 약품을 살포했고, 사람들은 균을 막기 위해 당국에서 지급한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담배 연기가 바이러스를 죽인다는 루머가 돌자 직장마다 흡연을 권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트밀을 많이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도 진실로 여겨졌다. 상점은 영업을 중지했고 장례식은 15분 이내에 끝내도록 제한되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가 없는 여행객의 출입을 금했다.

 전쟁으로 많은 의사가 군의로 차출되어 있기도 했지만, 전선에서 돌아오는 부상병이 늘어나던 시기에 발생한 이 유행병은 일부 지역에서의 의료 인력 부족을 초래했다. 밤에 병원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한 사람을 낮에는 쉬도록 배려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자원 봉사만으로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비상 사태에 직면한 의과 대학은 3, 4학년 과정을 폐쇄하고 학생을 병원에 투입해 인턴이나 간호사 업무를 맡겼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의사가 늘어가자 의사는 더욱 부족해졌고 급기야 군의관이 민간인 진료에 동원되기도 했다.

월터 리드 미국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인플루엔자 환자. public domain 

 누구도 인플루엔자로부터는 안전할 수가 없었고 어떤 대책도 효과가 없었다. 도시마다 관이 동나고 묘를 파는 인부와 장의사가 부족한 비참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 독감으로 인한 희생자는 독일에서만 40만 명, 영국에서는 22만 8000명에 달했다. 미국에서는 1918년 9월과 다음 해 6월 사이의 10개월간 67만 5000명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이는 양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의 전사자 합계(42만 3000명)보다 월등히 많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14만 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는 인도로 약 1600만 명에 이르렀다.

 보통 인플루엔자에 의한 치사율이 0.1퍼센트 미만인 반면, 1918년의 유행은 전체 환자의 2.5퍼센트를 죽음으로 이끌 정도로 무서웠다. 특히 15세에서 34세 사이의 젊은 환자들은 치사율이 다른 연령대 평균보다 20배나 높았다. 이 유행은 14세기 중반의 4년간 약 3천만 명을 희생시킨 페스트보다 총 사망 수는 적었지만, 1년 동안에 발생한 사망 수로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질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희생에도 이 병은 그에 걸맞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잊혀 갔다. 전쟁 뉴스가 언론을 장식하던 때였고, (젊은이의 치사율이 높았기에) 병으로 죽은 저명 인사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독일 수상, 프랑스 수상도 이 감기에 걸렸지만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모두 회복되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년)의 「스페인 독감 후의 자화상」. 그 또한 이 질병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public domain

 그런데 오래된 조직에서 유전자를 찾아내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미국 군사 병리 연구소의 제프리 토벤버거(Jeffry Taubenburger, 1961년~) 팀이 2005년에 이 바이러스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1918년에 사망한 어느 병사의 조직 표본과 1998년 알래스카의 묘지에서 파낸 원주민 시체 조직을 사용해 당시 바이러스를 되살리려는 9년에 걸친 연구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들의 논문에 따르면, 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조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논문 발표 전에 열린 ‘생물학적 안전에 관한 국가 자문 위원회(National Science Advisory Board of Biosecurity, NSABB)’는 대량 살상 생물 무기의 설계도나 마찬가지인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 발표에 큰 부담을 느꼈으나, 격론 끝에 이를 공표함으로써 얻는 인류의 이득이 손실보다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전혀 불필요할뿐더러 해만 끼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이란이 이를 보고 바이러스를 만든다고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복원된 바이러스는 엄중한 감독 하에 연구용으로만 쓰인다고 한다.

 몇몇 언론은 이 바이러스가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했던 조류 독감 바이러스와 유사하다며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설사 당시의 바이러스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다시 대유행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이 대유행을 걱정하며 대처에 분주한 것은, 토벤버거의 연구가 조류 독감과 맞물리며 1918년의 악몽을 상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1) 이처럼 잘못된 작명 방식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 WHO는 2015년 지역명이나 동물, 특정 직군을 병명에 사용하지 말기를 권고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재담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시립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과학사학 교실 방문 교수와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 생화학 교실 및 인문 사회 의학 교실 교수,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부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의학사 관련 칼럼을 썼으며, 번역서로 『근세 서양 의학사』, 『의료 윤리 Ⅰ, Ⅱ』와 저서로 『의학의 역사』, 『간추린 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이재담의 에피소드 의학사 1: 무서운 의학사』
(출간 예정)

 

『의학의 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서양 의학의 역사

 

『미생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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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미생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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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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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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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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