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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오라 - 전염병과 의료 윤리 본문

완결된 연재/(完) 무서운 의학사

5.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오라 - 전염병과 의료 윤리

Editor! 2020. 3. 5. 18:54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200편 이상의 의학사 관련 칼럼을 쓴 이재담 교수님의 『에피소드 의학사』(2020년 3월 출간 예정)에서 전염병과 관련된 6편의 글을 미리 보는 특별 연재 '무서운 의학사'. 이제 어느덧 2회 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전국 초··고등학교의 개학이 연기되고,  마스크 5부제가 이루어지고,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 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코로나19의 유행은 이제 '함께 살아간다'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확진자 수 6,000명에 사망자 수 100명을 넘기지 않은 지금이 이럴진대, 전 유럽 인의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 가고 치사율 70퍼센트를 기록했던 흑사병의 위협에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무서운 의학사 연재 5회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오라'에서는 사람들이 이 신의 천벌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 비밀을 풀어 봅니다.


무서운 의학사

5.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오라
전염병과 의료 윤리

전염병을 피해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을 그린 1630년의 목판화. Credit: Wellcome Collection. CC BY

“자신이 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전염병 환자를 끝까지 돌보아야 하는가?”는 의료계의 오랜 화두였다. 현대인의 생각과는 달리 유효한 예방이나 치료 수단이 없는 유행성 질병에 대처하는 의료인의 자세에 관해서는 중세 이후까지 뚜렷한 규범이 없었다. 히포크라테스를 계승해 서양 의학을 체계화한 고대 로마의 명의 갈레노스조차 역병이 돌자 고향 그리스로 도망쳤던 사례에서 보듯이, ‘아픈 사람을 돌볼 의무’는 역병이 닥칠 때마다 의사를 갈등케 했다. 그래서 고대의 많은 의사는 히포크라테스가 유행병이 발생한 지역 사람들에게 했다는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오라(cito, longe, tarde).”라는 처방을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

 14세기 이후 흑사병이 유럽 전역에 빈번히 유행하고 그때마다 도망치는 의사가 속출하자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도시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고용 계약에 포함시켰다. 이 의사들에게는 어떤 역병이 유행하더라도 주민과 도시에 남아야 하는 법률상의 책임이 있었다. (이 밖에 역병이 유행할 때면 죽음을 무릅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고액의 보수를 받는 조건도 존재했다.) 즉 페스트가 유행할 때면 많은 의사가 도시에서 탈출했고, 일부 의사는 자비심, 애국심, 혹은 계약 때문에 할 수 없이, 혹은 금전적 이득을 바라고 위험한 도시에 남아 환자를 돌보았다.

17세기 영국 런던의 페스트 대유행 시기 도시를 지켰던 사람들. CC BY 4.0

 누가 마지막까지 환자 곁을 지키는지 여부는 의사의 교육 과정,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했다. 17세기 영국에서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는 귀족 출신이거나 신분이 높은 의사 및 영국 국교도 목사가 대거 런던을 떠났지만, 신분이 낮은 약제사(서민의 의료를 담당하던 약사 겸 의사)와 비국교도 성직자들은 어려운 사람을 찾아 봉사하며 자리를 지켰다. 당시 약제사 중 한 사람은 “전문직의 일원으로서 일을 맡았거나 직장을 책임진 모든 사람은……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쁨과 고통, 이익과 불편 중에서 하나만을 따로 선택할 수는 없다. 성직자는 설교를 해야 하고, 지휘관은 전투를 해야 하고, 의사는 환자 옆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많은 양심적인 의사를 곤혹스럽게 했던 ‘죽음의 위협과 환자에 대한 신의 사이의 갈등’이 명확하게 정리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봉사해야 한다.’라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2015년의 중동 호흡기 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 유행은 우리나라 의료 및 방역 체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온 나라가 휘청거렸으며, 다수의 의료인이 감염되는 희생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빨리 떠나, 멀리 가서, 늦게 돌아온’ 의료진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 의료계에도 의료 윤리가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이재담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시립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과학사학 교실 방문 교수와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 생화학 교실 및 인문 사회 의학 교실 교수,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부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의학사 관련 칼럼을 썼으며, 번역서로 『근세 서양 의학사』, 『의료 윤리 Ⅰ, Ⅱ』와 저서로 『의학의 역사』, 『간추린 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이재담의 에피소드 의학사 1: 무서운 의학사』
(출간 예정)

 

『의학의 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서양 의학의 역사

 

『미생물의 힘』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바꾼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의 흥미진진한 역사

 

『아름다운 미생물 이야기』
미생물의 탄생과 진화 다 모았다!

 

『전염병의 문화사』
인류를 만들어 온 것은 병원성 미생물들일지도?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병과 의학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스트레스』
치명적인 질병을 부르는 현대의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