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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바이러스 : 『보이지 않는 권력자』, 이재열 경북대 명예 교수 편 ① 본문

(연재) 과학+책+수다

너의 이름은 바이러스 : 『보이지 않는 권력자』, 이재열 경북대 명예 교수 편 ①

Editor! 2020. 6. 23. 17:00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필수 교양 지식은 뭘까요? 공중 위생 수칙? 당연하죠. K-방역의 우수성? 알면 기분 좋죠. 포스트코로나 시대 경제 변화? 알아두면 손해 보진 않겠죠. 그리고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미생물학입니다. 바이러스 전문가로 한국 미생물학의 기초를 닦아 온 이재열 경북 대학교 명예 교수께서 이번에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를 출간했습니다. 미생물학의 핵심 지식, 인간과 미생물의 관계에 대한 노학자의 성찰이 작고 아담한 책에 빽빽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책과 관련된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이번 과학+책+수다에서 준비해 봤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모두 2편으로 발행됩니다.


「과학+책+수다」

너의 이름은 바이러스

『보이지 않는 권력자』, 이재열 경북대 명예 교수 편 ①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 중인 이재열 교수. 사진: 박기수 ⓒ (주)사이언스북스.

 

SB: 오늘은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의 저자이신 경북 대학교 이재열 명예 교수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눕니다. 마침 이 인터뷰가 진행된 2020년 3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3월 11일에는 세계 보건 기구 WHO에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사태를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pandemic)으로 규정했습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대처를 잘해 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으레 주고받던 안부도 의미심장하게 여쭙게 되고요. 선생님께서도 코로나19 시대에 잘 지내고 계시죠?

 

이재열: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참 힘든 시기죠. 만나서 악수하는 것조차 꺼려져서 손가락 하트를 날리거나 주먹을 맞부딪치곤 하는데,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하니까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SB: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코로나19에 대해 여쭙고자 해요. 한동안 ‘우한 폐렴’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니 하는 표현들이 중구난방으로 쓰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용어를 확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겠거든요. 코로나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이재열: ‘코로나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이름이겠죠. 그렇다면 왜 이름이 코로나바이러스일까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바이러스든 무엇이든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가장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도 먼저 이름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듯이, 바이러스도 이름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코로나바이러스의 이름은 라틴 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왕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전자 현미경으로 촬영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사진을 보면 바이러스 표면에 스파이크, 즉 돌기가 삐죽삐죽 나 있는데, 그것이 왕관처럼 보인다고 해서 코로나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즉 ‘왕관’ 바이러스인 셈이에요.

 

SB: 코로나바이러스에 재미있는 뜻이 담겨 있었네요. 그렇다면 이 바이러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는 다른 종류인 거죠? 예년 같으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유행하지 않습니까?

 

이재열: 물론 이름이 다르다면 종류가 다르겠죠. 새로 발견된 바이러스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하는 건 항상 미생물학자들을 괴롭히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도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묻기도 하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묻기도 하잖아요.

 

동물 바이러스의 경우는 형태나 특징을 보고 이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드시 그런 것은 또 아니에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독감’으로 불리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경우, ‘스페인 독감’처럼 지명을 따 이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이렇게 지어 놓게 되면, 1918년 전 세계를 휩쓴 독감이 스페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넘겨짚기 쉬운데, 사실 스페인 독감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창궐한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 치러지던 때였습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했다는 소식을 전쟁 중에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는 어렵죠.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 먼저 이 소식을 발표하고 언론에 공개했을 뿐인데, 그것을 계기로 마치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된 양 그런 이름이 붙어 버렸습니다. 스페인 독감을 일으킨 바이러스의 과학적 이름은 인플루엔자바이러스 A형(H1N1)이죠.

 

에볼라 바이러스도 그렇습니다. 에볼라는 콩고의 한 지명이거든요. 그곳에서 시작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사실 말씀하셨다시피 이번 코로나19도 맨 처음에는 우한 폐렴이니, 중국 폐렴이니 했죠. 하지만 WHO에서 바이러스의 이름에 지명을 붙이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코로나19로 바꿔 부르게 된 것입니다.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넣은 코로나바이러스. 삐죽삐죽 난 돌기가 왕관처럼 보인다고 해서 ‘왕관’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사진: 박기수 ⓒ (주)사이언스북스.

 

2015년 메르스(MERS,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도 있죠. 메르스는 중동 지역에서 처음 나타난 사스(SARS)거든요. 그래서 이름에 Middle East, 중동이 들어갔고요.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겠죠. 아,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스는 급성 호흡기 증후군,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의 약자입니다. 이 역시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이 일으키는 병이죠.

 

또 인플루엔자라는 말 자체도 원래는 ‘병의 원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 말에서 왔다고 하죠. 그게 특정 바이러스의 이름이 되어 버린 거예요. 영어에서는 flu라고 줄여 쓰기도 하죠. ‘독한 감기’라는 뜻의 일반 명사 ‘독감’이 인플루엔자바이러스 A형이라는 특정한 바이러스 감염증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도 같은 원리죠.

 

그러고 보니까 바이러스의 우리말 번역어는 없네요.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어서 바이러스라 부르죠. 반면 박테리아는 세균으로, 펀자이(fungi)는 진균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진균은 곰팡이라는 순우리말도 있어요. 유독 바이러스를 나타내는 우리말만 없는데,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바이러스도 미생물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 미생물이에요. 크기가 작은 것들이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따져 보면 다 있거든요. 처음에는 미생물의 존재를 몰랐지만, 사람들이 연구하다 발견했고, 그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미생물이 발견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미생물 중 일부가 병원균으로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생물은 크게 세 종류죠.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하지만 미생물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미생물들이 있죠. 그리고 바이러스도 종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모든 바이러스가 다 병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병을 일으키는 게 아니죠. 들어가서 사는 대상이 다 다르고 증식 메커니즘도 다 다르기 때문이죠.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도 있고, 동물에게 들어가는 것도 있으며 식물, 심지어는 세균이나 곰팡이에 들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특징은 살아 있는 세포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그 안에서 숫자가 불어납니다. 숫자가 불어나서 숙주에 피해를 준 걸 가리켜 우리는 “병에 걸렸다.”라고 얘기합니다. 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나 바이러스가 한 마리 들어왔다고 해서,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 마리가 둘이 되고, 다시 넷이 되고, 또다시 여덟이 되고 하는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세포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병이라고 부르는 거죠.

 

바이러스마다 좋아하는 부위도 다릅니다. 어떤 바이러스는 호흡 계통을 좋아하고, 어떤 바이러스는 소화 계통을 좋아해요. 다만 코로나바이러스와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둘 다 호흡 계통을 좋아해서 허파나 인후 등을 중심으로 증식하고, 침을 통해서 전파되거든요. 이것이 비슷한 점입니다.

 

다만 앞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바이러스, 동물에게 들어가는 바이러스가 따로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사람과 동물 둘 다에게 들어가는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그런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을 ‘인수 공통 전염병’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으로는 광견병이 있어요. 개와 사람 모두 걸리는 병입니다. 그렇다고 나무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죠. 그만큼 숙주마다 차이점이 보입니다. 어떤 숙주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바이러스가 구별돼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SB: 말씀 중에 “미생물 안에도 바이러스가 들어갈 수 있다.”라는 점이 흥미롭네요. 같은 미생물이라도 종류마다 제각기 다른 크기와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죠?

 

이재열: 맞습니다. 앞에서 곰팡이와 세균, 바이러스까지 세 가지 미생물을 말씀드렸죠? 그들도 크기가 저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미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세포 안은 굉장히 넓어요. 운동장 같죠. 그 안에 곰팡이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곰팡이보다 더 작은 것이 세균이에요. 진균인 무좀균도 그렇습니다. 세포 안에 들어가 살려면 무좀균이 세포보다 훨씬 작겠죠. 그러니까 수없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운동장 이야기를 했죠?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할 때 두 팀의 출전 선수는 스물두 명이지만, 관중은 수만 명 들어갑니다. 세포에도 세균이 그만큼 들어갈 수 있어요.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더 작습니다. 세포를 운동장이라고 한다면, 세균은 사람, 바이러스는 축구공보다도 작다고 하면 됩니다. 세포 안에 세균보다 더 많이 들어갈 수 있겠죠. 엄청나게 많이 증식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 중인 이재열 교수. 사진: 박기수 ⓒ (주)사이언스북스.

 

바이러스는 생명체일까, 아닐까?

SB: 그런데 한 가지 헷갈리는 게 있습니다. 바이러스도 미생물이라고 한다면, 미생물도 생물이니, 바이러스도 생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책에서 바이러스가 생장, 증식, 변이라는 생명체의 특성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이러스는 생명체일까요, 아닐까요?

 

이재열: 바이러스가 생물과 무생물 사이, 중간적인 존재가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물의 특성과 무생물의 특성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대체 생물의 특징은 무엇이며 무생물의 특징은 무엇인지 궁금해지죠.

 앞에서 병이 생기는 것은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바깥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바이러스가 살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세포 안에 들어가야 수를 늘릴 수 있어요.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제 수를 늘리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고 몸체를 불려서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먹지 않으면서 세포가 가진 생명 시스템, 정확히는 복제 시스템을 빌려 쓰거든요. 그렇게 해도 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수가 갑자기 증가하는 것이죠.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곧 증식하는 것이므로 생명체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 개체 하나만 놓고 보면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은 무생물로서의 특징을 보여 주죠. 생명이란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에너지를 얻고 움직이며 몸체가 불어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련의 과정으로 정의됩니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먹지도 않으니까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수는 불려 나갑니다. 아이러니이죠.

 

이런 비유는 어떨까요? 한 자동차 기업에서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만듭니다. 소형차부터 대형차까지 다양해요. 그런데 소형차가 3년 지났다고 중형차로 바뀌나요? 중형차가 대형차로 바뀌나요? 그렇지 않죠. 몸집이 불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자동차는 휘발유를 먹어서 움직여요. 만약 외계인이 본다면 움직인다는 점에서 자동차를 생명체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무생물이잖아요.

 

SB: 그렇다면 바이러스가 내 몸으로 들어오지 않게 예방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재열: 바이러스는 자체적으로 증식하지 않고, 살아 있는 세포 안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생명 현상이 가능합니다. 바깥에서는 그대로예요. 오래 살 수도 없고요.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코로나19도 바깥에서 기껏해야 2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 동안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게 증식을 의미하지는 않거든요. 즉 바이러스가 몸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이 조심해서 손을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필요해요. 바깥에서는 바이러스가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그 방법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SB: 역시 손 씻기, 마스크 쓰기를 생활화해야겠죠?

 

이재열: 예.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이러스와 바이로이드를 만나다!

SB: 저도 최근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꼭 손 씻고, 구강 청결제로 가글하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이번 겨울을 감기도 걸리지 않고 넘겼습니다. 매년 한두 번씩 환절기만 되면 감기에 심하게든 약하게든 고생했는데, 제가 평소 공중 위생 습관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 앞에서 바이러스 관련 질문을 몇 가지 드린 건 선생님께서 미생물 중에서도 바이러스 전문가이시기 때문입니다. 박사 학위도 바이러스 연구로 하셨죠. 화제를 좀 바꿔서 선생님께서 바이러스와 미생물 같은 ‘보이지 않는 권력자’들을 연구하겠다 마음을 먹은 계기 같은 게 있었을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 중인 이재열 교수. 사진: 박기수 ⓒ (주)사이언스북스.

 

이재열: 그런가요, 따지고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는 뭐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비록 하더라도 제대로 이룰 수 있는 건, 사실 적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들면, 우연과 인연이 자신을 이끌어 줬다는 걸 깨닫게 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죠. 아무튼, 대학 졸업하고 농촌 진흥청 농업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는데,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우연하지 않게 어떤 자리에서 그 생각을 지도 교수님(곤충학계의 권위자이신 고(故) 백운하 서울대 교수님)께 하게 되었죠. 지도 교수님께서는 그 얘기를 듣고 유학 갈 자리를 알아봐 주셨죠. 그러다 보니까 할 수 없이 유학을 가야 할 형편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1970년대 중후반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였기에 학생이 큰 부자가 아닌 한 자기 돈 가지고서 유학 가기가 힘들었죠. 대부분 외국 대학이나 정부 기관에서 주는 장학금을 따가지고 가서 공부를 해야 했죠. 그런데 어쩌다 보니 독일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됐어요. 그러니까 독일로 가야지요. 당시에는 아마 유학 가는 학생의 90퍼센트 이상이 미국으로 갔고, 5퍼센트 정도는 일본 갔고, 유럽은 그 나머지가 가는 형편이었죠. 독일 갈 생각은 많지 않았는데, 독일 장학금을 받게 되니 아니 갈 수가 없었던 거죠.

 

SB: 무슨 시험 같은 걸 보셨던 건가요, 장학금 받기 위해서?

 

이재열: 그런 건 아니었어요. 사실은 지도 교수님 통해 제출한 연구 계획서가 독일 연구 기관에 채택되어 돈이 나오게 된 거예요. 참, 운이지요. 당시 연구 계획서를 바이러스를 연구하겠다고 썼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바이러스 연구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아마 그걸 높게 산 거겠죠. 지금 생각하면 참 희한한 얘기지요.

 

SB: 그러면 그 전에는 독일과 아무런 인연이 없으셨던 건가요? 독일어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이재열: 사실, 고등학교 독일어 수업 시간에 배운 게 전부였죠. 연구 계획서가 괜찮다고 해서 채택이 되었고 독일 유학이 결정이 된 다음에야 대학에 있던 어학 연구소에서 독일어를 좀 배우고 그랬죠.

 

SB: 유학 가신 학교가 우리말로는 주로 ‘기센 대학교’라고 번역되는 유스투스 리비히 기센 대학교(Justus-Liebig-Universität Gießen)잖아요.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엑스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교수로 일하기도 했던 유서 깊은 대학교더군요. 그곳에서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 살짝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현미경 같은 걸로 미생물 보고 그랬을 거잖아요.

 

이재열: (웃음) 현미경 이야기가 나오니까, 잠깐 설명하고 가야 할 듯해요. 제가 미생물학과에서 근무했고, 또 미생물 전공 연구자라고 얘기하면, 어휴, 사람들이 다들, “거기 현미경 많이 보겠네요.” 같은 말씀들을 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럴 때마다 “현미경을 많이 안 봅니다.”라고 답해요. 그러면 왜 그러냐고 묻죠. 답은 간단하죠. “현미경으로는 곰팡이나 세균까지 볼 수 있지만, 제가 공부하는 바이러스는 크기가 더 작기 때문에 현미경으로도 안 보입니다.”라고 답하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곰팡이보다 세균이 작고 세균보다 바이러스가 더 작죠. 세균은 1마이크로미터 정도, 바이러스는 0.01마이크로미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1마이크로미터는 100만분의 1미터라는 건 알고 계시죠? 따라서 바이러스를 연구하려면 전자 현미경으로 봐야만 하는데, 전자 현미경이 실험실마다 있는 건 또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지금이야 컴퓨터 기술이 발달해서 탁상용 전자 현미경, 그러니까 책상 위에 놓고 쓸 수 있는 전자 현미경도 시판되고 있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전자 현미경은 그 크기가 실험실 하나였어요.

 

말이 현미경이지 전자 현미경은 광학 현미경과 완전히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장비거든요. 일단 수십 킬로볼트에서 수백 킬로볼트에 달하는 높은 전압을 걸어서 전자를 가속시키는 변압기 같은 장치도 있어야 하고, 만들어진 전자선을 시료에 쏴 주고, 반사된 전자선의 흐름을 유도하는 장치도 필요하고, 전자선이 지나다니는 진공관의 진공을 유지하는 진공 펌프 장치도 있어야 하죠. 또 이 모든 전자 장비를 관리하고 청소할 수 있는 전문 장비와 인력도 필요하죠.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학 중 세계 수준의 연구를 그나마 따라갈 수 있는 전자 현미경을 가지고 있는 대학도 손에 꼽을 정도였죠. 지금도 바이러스 연구하는 사람들이 전자 현미경을 다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SB: 신기하네요.

 

이재열: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보지도 않고 연구를 할 수 있냐?” 하고 묻기도 하죠. 하지만 미생물학자들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인가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복음」 20장 29절)라는 말씀이 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은 믿지도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보세요. 다들 마스크 쓰고 다니잖아요. 보이지 않아도 공기 중으로, 비말을 통해서, 먹고 마시는 음료수를 통해서 세균과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틀림없는 증거겠죠. 따라서 보지 않아도 연구는 다 할 수 있답니다.

 

특히, 세균과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의 움직임과 흔적을 보여 줍니다. 이건 거대한 전자 현미경이 없어도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독감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고 목이 붓고 기침이 나오잖아요. 의사가 보기엔 병이 있음을 나타내는 병증이지만, 미생물학자가 보기엔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증식한 결과랍니다. 동물만 이런 게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죠.

 

벼에 생기는 검은줄오갈병이라는 병이 있어요. 벼의 크기가 줄어들고 잎에 검은색 또는 갈색 반점이 생기는 병인데, 이삭이 거의 패지 않게 만들어요. 벼검은줄오갈병 바이러스(rice black-streaked dwarf virus, RBSDV)라는 바이러스가 곤충을 매개로 해서 감염되어 생기는 병이지요. 미생물학자는 이삭도 패지 못하고 병든 벼를 보고 RBSDV라는 바이러스를 연상하지요.

 

또 산에 가면 나무들이 쌓여 있는 걸 보면, 도시 사람들은 좀 지저분하지 않나 생각하지만 농업이나 삼림업 종사자들이 보면 퇴비 생각을 하겠죠. 하지만 미생물학자들은 그 안에서 부패 또는 발효 작용을 열심히 하고 있는 미생물들을 생각해요. 사실 미생물은 지구 상 어디에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무수히 볼 수 있어요. 그런 흔적들을 보면 미생물 연구의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죠. 꼭 고가의 대형 현미경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웃음)

 

이재열 교수의 최신작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본문.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SB: 하지만 독일에 가서는 바이러스보다 더 작은 바이로이드 연구를 하셨잖아요? 아차, 그러고 보니까 말씀하신 벼검은줄오갈병 바이러스(RBSDV), 선생님께서 제1저자로 있는 1977년 논문의 주제더군요. (「한국에서 벼 흑조위축병의 발생에 대하여」, 《한국식물보호학회지》 1977년. (링크)) 유학 가시기 직전에 쓰신 논문일 듯싶습니다.

 

이재열: 그런 것도 찾아봤나요? (웃음) 독일 유학을 갔더니 기센 대학교의 바이러스 연구소는 대학 병원에 있더군요. 사실 바이러스든 뭐든 미생물이라면 다 모아놓고 연구하는 곳이었죠. 그러니까 사람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동물 바이러스와 식물 바이러스까지도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죠. 당연히 전자 현미경도 거기 있었죠. (웃음) 하인츠 루트비히 섕어(Heinz Ludwig Sänger) 교수님이 지도 교수님이셨는데, 그분이 주로 연구했던 것이 식물 바이러스와 바이로이드(viroid)라는 거였어요.

 

1971년에 처음 발견된 바이로이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특이한 존재였죠. 바이러스는 일단, RNA나 DNA로 이뤄진 유전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핵산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이것이 다른 생물의 세포 속으로 들어가 증식하죠. 그런데 바이로이드는 유전 물질인 RNA를 포함한 핵산은 있지만 그것을 둘러싼 단백질 껍질은 없어요. 그래도 다른 세포 속에 들어가면 바이러스처럼 자기 복제, 즉 증식이 가능해요. 그래서 바이러스와 비슷한 입자라는 뜻에서 바이로이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이러스보다도 더 작죠, 단백질 껍질이 없으니까요.

 

생어 교수님은 이 ‘헐벗은 바이러스 비슷한 자기 복제 물질’, 즉 바이로이드의 첫 발견자 중 한 사람이셨어요. 이 바이로이드 중에는 감염된 식물을 병들게 하는 게 있었죠. 그래서 저는 바이로이드 연구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 바이로이드 연구는 당연히 유전 물질인 바이로이드 핵산에 대한 연구잖아요, 단백질 껍질이 없으니까. 그래서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분자 생물학까지 공부하게 되었지요.

 

 

독일 유학 시절 이재열 교수. 왼쪽에 있는 남자는 바이로이드의 초기 발견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루트비히 섕어 교수. 사진: 이재열 제공.

 

 

SB: 바이로이드 연구라는 최신 분야가 막 발전하고 형성되던 핫한 현장에 계셨던 거군요. 보통 사람인 저는 바이러스도 작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더 작은 생명체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있는 거군요. 생명체에 대한 저의 좁은 선입견을 좀 넓혀야겠는데요.

 

이재열: 바이로이드는 RNA라는 유전 물질을 담은 핵산이라도 있어 자기 복제 입자라는 걸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기는 하죠. 그런데 거꾸로 핵산 없이 단백질이 혼자서 자기 복제를, 증식을 하기도 하죠. 거짓말 같은 사실이지만 프리온(prion)이라는 입자가 그런 일을 합니다. 10여 년 전에 우리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 단백질성 감염성 입자가 광우병이라고 불리는 소해면상뇌증이나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하죠. 이 ‘변형’ 단백질이 다른 생체에 한번 들어가면 어떤 신호 같은 것을 주위 단백질에 줘서 정상적인 단백질들이 모양을 바꾸게 되고 이게 불어나는 거예요. 증식하는 거죠. 이런 것까지 있죠. 이런 것도 생명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SB: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이재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시 뒤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보죠. (웃음) 기센 대학교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제가 한 연구는 주로 그 바이로이드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박사 학위 논문도 따지고 본다면 바이로이드를 더 쉽게 검출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것이었죠. 그리고 여기에 핵산을 찾아내는 분자 생물학적인 기법을 도입하는 것이었죠.

 

유학 시절 바이러스 연구소가 대학 병원 구내에 있었다는 얘기를 잠깐 했지요? 저는 거기서 식물을 감염시키는 바이로이드를 연구했기 때문에 수시로 병원과 병원 밖에 있는 온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연구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동 과정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게 되었죠. 그래서 이 핵산 물질을 좀 더 빨리, 좀 더 쉽게, 정확히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되었어요. 유학 중에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가거든요.

 

핵산은 분자이니까 당연히 분자 수준에서 연구를 해야 하고, 그러니까 분자 생물학의 최신 기법을 도입해서 핵산을 검출해야 하고, 이것을 보이게 만들어서 ‘눈으로’ 확인하는, 이 모든 것들을 망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게 제 연구의 핵심이었어요.  일단 바이로이드를 증식시키고, 핵산 교잡법(Nucleic acid hybridization)이라는 분자 생물학적 기법을 통해 표지 기능이 있는 염기 서열을 핵산에 붙여 보는 거죠. 그렇게 붙은 염기 서열을 살펴봄으로써 바이로이드의 핵산을 검출하는 방법들을 고안해 논문을 썼고 박사 학위도 땄지요.

 

요새 코로나바이러스 찾아내는 방법하고 원리적으로는 똑같은 거예요. PCR 또는 중합 효소 연쇄 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이라고 하죠. PCR 기술이 1984년에 개발되었으니, 그 초창기 방법을 연구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죠. 요즘은 더 빠르고 쉽게, 더 간단하게 찾아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 코로나 양성, 음성 여부를 6시간 만에 알아내니 많이 발전했죠.

 

SB: 선생님의 박사 학위 연구가 지금 코로나19 시대와도 연결이 되는군요! 그런 자랑을 책에도 좀 써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재열: 그런가요? (웃음)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 중인 이재열 교수. 사진: 박기수 ⓒ (주)사이언스북스.


이재열의 독일 유학기

SB: 네, 그럼 다음 질문을 해 볼까요? 잠깐 가벼운 얘기를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유학 생활과 관련해서 얘기해 주실 만한 에피소드가 따로 있을까요?

 

이재열: 사실 유학할 때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요. 하지만 옛날이야기들일 텐데요. 1977년에 유학 갔다가 1983년에 돌아왔으니까, 정말 오래전 얘기잖아요?

 

SB: 그래도 몇 가지 얘기해 주시죠.

 

이재열: 재미 삼아 들어주세요. 좀 멋쩍은 이야기들도 좀 있을 테니까. 당시에는 참 외국 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때라 유학 간 사람들은 컬처쇼크, 그러니까 문화적인 충격 같은 걸 많이 받아서 외국에서 잘 지내지는 못했어요. 말은 안 해도 다들, 유럽에 있든, 미국에 있든 조금씩 불편했을 거예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게 음식 문제겠죠. 특히 김치 먹고 싶은 거.

 

SB: 지금도 그런 사람 적지 않을 겁니다.

 

이재열: 당시 한국 사람이라면 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건데 외국에서야 김치 한번 먹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지요. 그래도 당시 독일에는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광부들도 꽤 남아 있었고, 간호사들도 활약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장 때면 기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배추, 무 같은 것들을 갖다 주는 한국 상인들이 좀 있었어요. 그래도 수시로 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요. 그러다 보니까 양배추 가지고 김치를 담가 먹기도 했죠.

 

SB: 양배추요?

 

이재열: 그랬죠. 몇 년 하다 보니까, 참 우여곡절 많았지만, 독일에서 김치 담그는 법도 좀 손에 익고 그랬죠. 그때 재밌는 경험을 하나 얻었죠. 독일에서는 김치를 담가 김장독에 넣고 땅속에 묻어둘 수 없잖아요? 하지만 겨울에 김장독에서 김치 내먹는 게 별미잖아요. 당시에는 김치 냉장고도 없었고.

 

SB: 그렇지요.

 

이재열: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김치를 담근 걸 실험실에서 쓰던 큰 비닐봉지에 담고 스티로폼 상자에 넣어서 아파트 베란다에 내놨어요.

 

SB: 베란다에요?

 

이재열: 네. 이게 꼭 되리라 생각하고 한 건 아닌데, 김장 김치처럼 잘 익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을 해 봤어요. 비닐봉지에 담아서 스티로폼 상자에다 넣었으니까 스티로폼 상자는 저온 상태를 계속 유지해 줬을 테고, 그다음에 비닐봉지는 산소와 김치의 접촉을 줄여 주었겠죠. 그러니까 우거지가 생기질 않았겠죠. 나중에 한국에 와서 해 보니까 시장이나 마트 같은 데서 이렇게 비닐봉지에다가 넣어서 파는 그런 김치들이 있더라고요. 만약 실험실에서 질소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면, 비닐 봉지에 넣을 때 남은 공간을 질소로 채웠을 거예요. 산소보다 무거우니까 산소가 들어가지 않겠죠. 그럼, 김치가 부패하지 않고 잘 발효되었겠죠.

 

SB: 그것까지는 못 해 보셨군요.

 

이재열: 이런 얘기도 해 드릴까요? 당시 독일 사람들은 한국 남자들이라고 하면 전부 다 태권도 하는 줄 알아요. 한국에서 왔다고 그러면.

 

SB: 중국 무협 영화나 이소룡 영화가 유행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는 군대에서 다들 태권도 배울 때 아니었나요?

 

이재열: 네. 웬만한 실습만 나가도 첨 만난 외국 사람들이 다들 나 보고 태권도 하냐고 물었죠. (웃음) 또, 인삼이 유명했죠. 강장제, 정력제 이런 식으로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까 담배에 얽힌 얘기도 하나 생각나네요. 지금이야 담배 피우면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눈치 주지만, 1970∼198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카페는 물론이고 비행기에서도 승객들이 담배를 피웠죠. 백화점 가도 1층 입구 매장에 지금은 명품 매장들만 있지만 그때는 담배 가게가 있었어요. 남자들의 필수품이었으니까요.

 

SB: 필수품이었군요?

 

이재열: 네. 그래서 독일 도착하자마자 담배 피우고 싶어서 백화점 갔더니 입구 쪽에서 팔더군요. 바로 샀지요. 그런데 담배만 있으면 뭐해요? 어떻게 불 피우지요?

 

SB: 그러게요. 라이터.

 

이재열: 그때는 라이터가 아니라 성냥을 썼죠.

 

SB: 아, 그렇군요.

 

이재열: 네. 눈에 보이는 대로 큰 통을 하나 샀어요.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보니까 담배는 서울에서 피우던 것과 똑같은 궐련인데, 성냥 통이 좀 길쭉하더군요. 처음에는 성냥갑 여러 개가 든 것인 줄 알고 이거 좋겠다 하고 사왔는데 딱 보니까 그냥 길고 굵은 성냥인 거예요. 나무젓가락만 했죠, 성냥개비가.

 

SB: 성냥인데 그렇게 굵어요?

 

이재열: 네. 아, 이게 바로 교과서에 실렸던 그 이야기의 실물 증거구나 생각했죠. 당시 제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교과서에는 유럽 여행기가 하나 실려 있었는데 독일 사람들은 근검절약을 하기 때문에 담배를 피울 때도 열 명 이상 모여 한 개비를 나눠 피웠고, 성냥도 하나만 불붙여 돌려가면서 담배에 불붙였다 같은 이야기였어요.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에 나왔던 성냥이 이건가 하고서 담배에 불을 붙여 봤는데, 한 번 쓰고 버릴 생각을 하니 너무 아까운 거예요. 담배 한 개비 피우는 데 이 큰 걸…….

 

SB: 그러게요.

 

이재열: 그래서 두 번 쓸 수는 없을까 하고 반으로 쪼개 봤지요. 되기는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다음 날 담배 가게로 다시 가서 작은 걸로 샀어요. 그건 서울에서 쓰던 작은 성냥개비였어요. 그리고서 그 큰 성냥은 잊어버리고 집에 놔뒀어요. 버리기도 뭐해서요. 그런데 나중에 독일에 먼저 와 사시던 한국 교포 한 분이 제 방에 와서 그걸 보더니만 “어, 이 선생, 이거 말이야. 이걸 왜 샀어? 왜 필요해?” 이러시는 거예요. 알고보니 페치카용 성냥이었어요.

 

SB: 치카요?

 

이재열: 그러니까 벽난로, 러시아식 벽난로를 말해요. 벽난로에 장작이나 불쏘시개 불붙이는 데 쓰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긴 거죠.

 

SB: 아하.

 

이재열: 그러고 나니까 확실히 알게 되었죠.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세계 기행문, 서구 사회 이야기 같은 게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해외 여행을 가기에는 전 국민이 너무나 가난한 시절, 급하게 보고 지나쳐 가며 흐릿하게 남은 인상을 팩트체크 없이   생각만으로 쓴 것이구나!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저는 한국에서 독일 사람들은 정직하기 때문에 길거리에 사과나무가 있어도 사과가 열려도 따먹지를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죠. 한국 사람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길거리 사과나무가 남아나질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겠죠. 아무튼, 독일에 와서 사과나무를 보니 진짜로 사과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 좀 친절하게 굴던 독일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저기 있는 거 왜 안 먹냐?” 그랬더니 맛이 없대요.

 

SB: 맛이 없어서 안 먹던 거였군요?

 

이재열: 독일은 위도가 높기 때문에 사과가 잘 안 익는다는 거예요. 색깔은 불그스레해도 맛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에서 재배한 사과를 먹어요. 자기들 것은 맛이 없기 때문에 그냥 안 먹고 설탕을 넣어서 졸여 먹어요. 잼 같은 걸 만들어 먹지요. 

 

SB: 독일 사람들의 사과나무 이야기도 팩트체크 없는 가짜 뉴스였군요!

 

이재열: 우리랑 교류가 없으니까 글쟁이들이 상상만으로 그렇게 쓴 거예요. 그래도 교과서에 실리고 그랬죠. 그런 것들이 좀 재미있더라고요.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된 이재열 교수의 미생물 관련 책들, 『보이지 않는 권력자』와 『담장 속의 과학』, 『미생물의 힘』.


이재열

서울 대학교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기센 대학교에서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 플랑크 생화학 연구소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경북 대학교 생명 과학부 교수로 근무했다. 현재 명예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모두들 어렵다고 말하는 과학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 『바이러스는 과연 적인가?』, 『보이지 않는 보물』, 『바이러스, 삶과 죽음 사이』, 『미생물의 세계』, 『우리 몸 미생물 이야기』, 『자연의 지배자들』, 『자연을 닮은 생명 이야기』, 『담장 속의 과학』, 『불상에서 걸어나온 사자』, 『토기: 내 마음의 그릇』 등의 책을 펴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과 인간에 관하여』

코로나19 시대의 필수 교양

 

 

『미생물의 힘』

인류 역사를 바꾼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의 진실

 

 

『담장 속의 과학』

과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인의 의식주

 

『파스퇴르』

과학을 향한 끝없는 열정

 

 

『아름다운 미생물 이야기』

미생물학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