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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편 수학자가 먹고 사는 법, “내 칠판을 봐” 본문

(연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수학한다

28편 수학자가 먹고 사는 법, “내 칠판을 봐”

Editor! 2021. 10. 20. 13:30

‘수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건이 있습니다. 바로 칠판인데요. 수학 천재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수식이 잔뜩 적힌 칠판이 나옵니다. 세상 무엇보다 어렵고 난해한 수학을 다루는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 단순한 도구, 칠판을 쓴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번 고호관의 수학 에세이에서는 서로 뗄 수 없는 수학자와 칠판의 관계를 집중 해부했습니다. 함께 읽어 보시죠.


사진 손문상 Ⓒ ㈜사이언스북스

 

얼마 전에 트위터를 통해 재미있는 글을 접했다. 수학, 수학자와 칠판의 관계에 관한 글이었다. 수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에서, 수학자들이 모여서 연구하는 세미나실에서, 혹은 휴게실에서 쓰이는 칠판에 관한 이야기였다. 칠판이 교육과 연구에 여전히 유용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거꾸로 수학 연구에도 모종의 제약을 가함으로써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내용이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수학자를 인터뷰하러 연구실에 종종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연구실이야 별다를 게 없지만, 다른 분야 과학자와 달리 한쪽 벽에 수식이 쓰여 있는 화이트보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로서야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수학 수식이니만큼 연구실 안에 이보다 수학자를 더 잘 보여 줄 수 있는 게 어디 있을까? 인터뷰용 사진을 찍을 때는 으레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주인공인 물리학자 두 사람이 여자 앞에서 각자 자신의 화이트보드를 뽐내는 장면이었다. 수학 공식이 잔뜩 쓰여 있는 보드를 보고 여자는 (아마도 예의상) 감탄을 해 준다. 빅뱅 이론에는 그 장면 말고도 주인공이 보드를 골똘히 바라보며, 혹은 뭔가를 바꾸거나 써 가면서 연구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때로는 서로 이러쿵저러쿵 논의도 해 가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학교 다닐 때 저런 칠판을 하나 갖다 놓고 공부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다.

 

 

『사이언스북』에 소개된 리처드 파인만의 사진. 수식이 적힌 칠판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있다. Ⓒ ㈜사이언스북스

 

칠판의 추억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칠판보다는 화이트보드를 보는 일이 더 많지만, 위에서 언급한 글은 주로 분필 가루 날리는 칠판을 위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비슷하지만, 수학자들이 쓰기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모양이다. 수학자가 아니라 칠판을 써서 연구해 본 적은 없지만,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 적은 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선생님이 문제 푸는 모습을 보기만 했던 것 같지만, 언급한 글을 계기로 칠판이 내 수학 공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비록 이공계였지만 수학이 중요한 전공은 아니었으니, 내가 칠판으로 수학을 배운 경험을 한 건 사실상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이다. 칠판은 교실의 한쪽 벽에 있지만, 사실상 모두의 시선을 받는다. 바로 앞에 선생님이 서 있고, 선생님은 칠판에 계속해서 식을 쓰며 이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 건지 설명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판서에 굉장히 능한 선생님들이 있었다. 수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가지 기호가 들어간 공식을 마치 인쇄한 것처럼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쓰는 분도 계셨고, 자와 컴퍼스를 쓴 것처럼 좌표나 도형을 그리는 분도 계셨다. 분필을 역방향으로 세우고 힘을 줘 드르륵 하며 점선을 그리는 기술도 있었는데, 나 역시 쉬는 시간이 재미로 따라 해 봤던 기억도 난다.

 

수학 시간은 보통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풀면서 그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 줄 한 줄 식을 써 나가면서 왜 위의 식이 아래처럼 변하는지 설명하고, 도형 문제 같으면 차례로 선을 그으면서 왜 이 각이 저 각과 크기가 같은지 등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 순서는 선생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과정과 똑같았다. 물론 따라오지 못할지도 모를 학생들을 위해 좀 더 작은 단계로 나누었을 수는 있지만.

 

비어 있던 칠판에 하나씩 생기는 식을 따라가는 건 가르치는 사람의 머릿속 논리를 하나씩 따라가는 것과 같다. 수십 명이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으니 상당히 효과적인 수단인 셈이다. 만약 말로만 설명한다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명확히 떠오르지 않아 이해하기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때로는 몇 명씩 앞으로 불려 나가 칠판에 적힌 문제를 푸는 일도 있었다. 이때는 각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논리의 흐름을 꺼내 놓게 된다.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제대로 풀지 못했을 때는 창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몇 대 얻어맞기도 했으니(옛날 얘기다.) 썩 좋은 경험만은 아니다.

 

 

수학자들의 칠판을 다룬 책 『지우지 마시오(Do Not Erase)』의 표지 Ⓒ Princeton University Press

 

연습장은 논리의 기록

 

혼자 수학을 공부할 때 내게 칠판 역할을 한 건 연습장이었다. 줄도 쳐지지 않은 빈 종이를 묶어 놓은 게 연습장인데, 다른 과목보다 주로 수학에 많이 썼던 것 같다. 수학을 공부한다는 건 곧 연습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다 쓴 연습장을 모아 놓으면 내가 이만큼이나 공부했구나.’ 하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다.

 

연습장에 수학 문제를 풀면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나중에 돌이켜 볼 수 있다. 연습장은 틀린 부분을 지우면서 깔끔하게 쓰는 공책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 나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멈추고, 몇 단계 앞이나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른 방법을 써서 다시 푼다. 이런 식으로 문제 하나를 푸는 데 종이를 몇 장씩 쓸 때도 있다.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내가 겪은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저장되는 셈이다. 하도 안 풀려서 볼펜으로 벅벅 그으며 성질을 부려 놓은 부분까지.

 

수학 기호를 사용해 구체적으로 식을 적어나가는 건 어렴풋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어떤 문제를 봤을 때 막연하게 풀이 방법이 떠오르는데, 막상 식으로 나타내서 정리하다 보면 풀리지 않는 경우를 다들 겪어 보았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아이디어는 종이 위에 적어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습장은 내 머릿속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 주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엉성한 논리를 가다듬는 도구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연습장은 칠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크기가 작아서 친구 한두 명에게나 보여 줄 수 있었을 뿐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당시 대입에 있었던 본고사에 대비해 몇몇 친구들과 문제 풀이 모임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는 빈 교실에서 칠판을 이용해야 했다.

 

 

 

 

칠판과 분필이 수학의 지형을 바꾼다?

 

고작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적어 놓고 몇 명이 모여서 어떻게 풀까 궁리하는 걸 수학자들의 연구와 세미나에 비교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 자체에는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글에서 칠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교실이든 세미나실이든 칠판의 위치는 시선이 가야 할 곳, 사람들이 앉아야 할 곳을 자연스럽게 정해 준다. 설명하는 사람은 칠판 앞에 서서 말을 하고, 뭔가를 쓰거나 그리고, 몸짓과 손짓을 해 가며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과 비슷하게, 청중은 순서대로 늘어나는 수식이나 도형을 보며 논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연사가 오류를 깨닫거나 청중의 지적에 따라 칠판에 쓴 내용을 바꾸기도 한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틀린 부분을 지우개조차 쓰지 않고 손으로 쓱쓱 문질러 지우고 다시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논리적인 흐름에 따라 식이 변하는 과정에서도 앞선 식을 쓱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기도 한다. 수학은 과정이 중요해서인지 앞선 식과 나중의 식 사이의 연속성을 만들어 주는 건 수학자에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칠판을 이용하면 이런 일을 간단히 할 수 있다.

 

반대로 칠판이 수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만약 연구하는 내용이 칠판 혹은 종이에 적어서 나타내기에 적절하지 않다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컴퓨터 같은 첨단 장비를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칠판은 여전히 수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수학은 너무 복잡해서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내기는 어렵다. 공동 작업이 필수적인데, 만약 그 내용이 칠판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많은 수학자에게 전달하기 어려워 공동 연구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다. 저자는 가장 추상적인 원리를 다루는 수학이 칠판과 분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쓰기 매체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라고 말한다.

 

흔히 천재들의 머릿속에는 커다란 칠판이 있어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기억하고 생각하고 계산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천재로 유명한 수학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의 경우 머릿속에 1만 제곱미터 크기의 칠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좁은 칠판에다 써 가면서 설명하는 게 영 답답할지도 모른다. 이제 머릿속에 연습장 한 장조차 들어가지 않는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참고 문헌

Michael J. Barany, Donald MacKenzie, A Dusty Discipline, http://mbarany.com/DustyDisciplineBWM15.pdf


 

고호관

대학에서 건축과 과학사를 공부했다. 과학동아기자, 수학동아편집장으로 일했고, 현재 과학 저술가이자 SF 작가 또는 번역자로 활동 중이다. 우주로 가는 문 달을 썼고,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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