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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달이 내려다본다

Editor! 2010. 7. 16. 09:04

<기획회의> 275호에 실린 사이언스북스 한 편집자의 글, "달빛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을 5회에 걸쳐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문과 출신(!)으로 과학 편집자의 길을 걷게 된 한 편집자의 이야기, 재밌게 봐주세요. 
  • 서울문고의 추억

  • 리처드 파인만을 만나다

  • 과학해서 행복합니다 

  •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 

  • 달이 내려다본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편에 이어서... 드디어 완결입니다. 

과학 편집자가 되기 전의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크로아티아까지 가는 페리 갑판 위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수영을 배우자. 어둠 저편의 검은 물, 햇살이 반짝이는 눈부신 파도, 해안선에서 멀어지면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아드리아 해를 통과하는 길고 지루한 항해였다. 선실 표 값을 아끼고자 달빛 아래 잠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가 않았다.

별 것 없는 배낭이나마 부여잡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리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였다. 그래도 아드리아 해의 물은 따뜻하겠지. 국민학교 수영장 현장 학습 시간에 물에 빠졌던 이후 오랫동안 외면해 왔건만 드디어 수영을 배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졌으니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일단 서울로 무사귀환한 후 수영 강습을 등록하는 일 말고는 없어 보였다. 다만 물속에 머리를 다 집어넣는 데 무려 일주일, 본의 아니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갖은 고생 끝에 제법 물 위에 둥둥 떠다닐 정도가 되는 데 남들보다 몇 배는 걸렸던 듯싶다.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에 뜬 둥그런 달 하나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릴 데이비드 보위의 콘서트에 가려고 여행 일정을 말도 안 되게 늘이고 친구의 친구,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에게까지 신세를 지며 유럽을 떠돌던 때였다. “오늘은 뭘 먹을까?”와 “오늘은 어디에서 잘까?”라는 단 두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단순명료한 삶을 살다가 굳건한 대지를 벗어나 물 위를 나서던 그 순간, 수영이 생존의 기술로 등극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달이 내게 수영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침을 내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물가에 내놔도 어지간히 안심할 정도의 상태는 되었다. 하지만 우주 공간이라면, 무중력 상태에서라면 어떨까? 여기서 다시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달 위에서 최초로 골프공을 날린 아폴로 14호의 우주 비행사들을 기억하시는지? 이 이야기가 『역사를 바꾼 17가지 화학 이야기』(사이언스북스, 2007년)에 강모림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담겨 있다. 특히 달 위의 골프 장면이 들어간 장은 고무의 화학적 특성으로 인해 바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예의 우리의 영웅 파인만이 등장해서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 폭발 사건에서 오링의 비밀을 극적으로 벗겨냈던 사건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서를 색다르게 해석한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가서였는지, 아니면 워낙에 내용이 좋아서였는지 이 책은 중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원저작권사도 감동시킨 사연이 있다. 첫 해에 만든 『자크이브 쿠스토』(사이언스북스, 2005년)나 『콘라트 로렌츠』의 초판이 오롯이 남겨진 상황에 익숙하다가 별안간 부지런히 『화학 이야기』 재판 작업을 하면서 나도 생소하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이에 더해 나로서는 중학생 때 친구들과 돌려보던 만화책을 그렸던 바로 그 강모림 씨를 섭외하게 되어 무척 감개무량했다. 항상 행복한 기분에 취해 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런 기쁨은 편집자만의 특권일 것이다.

또 색다른 보람이라면 『사상 최고의 다이어트』(사이언스북스, 2008년)을 만들면서 누린   유쾌한 시간들을 빼놓을 수 없다. 책 전체의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웅변하고 있는 표지 도넛이 보이시는지? 표지에 적합한 도넛을 고르기 위해 미술부와 편집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몇 상자나 열어 젖혔는지 모른다.  

세계 여성 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저자 지나 콜라타에게 한국어판 책을 보여 줄 자리가 생겼다. 크리스피 크림은 저자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몇 년 전 심장 떨리는 뉴욕 인터뷰가 어느새 박진감 넘치는 추억이 된 시점이라 재회가 더욱 반가웠다.

항상 열정과 배려심을 잊지 않는 그 분들에게서 살아가는 데 잊어서는 안 될 가르침을 얻을 수 있어 영광이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 동안이지만 과학책을 만들게 되었고,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얻고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