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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심리 극장 (12) 도덕적 딜레마 - 참을 수 없는 선택의 무거움 본문

완결된 연재/(휴재) 한밤의 심리 극장

한밤의 심리 극장 (12) 도덕적 딜레마 - 참을 수 없는 선택의 무거움

Editor! 2014. 7. 11. 14:16



한밤의 심리 극장 (0관) 

한밤의 심리 극장 소년 (1관) 질투는 나이 들지 않는다 

한밤의 심리 극장 (2관) 구애의 정석 : 썸남, 썸녀를 만나다 

한밤의 심리 극장 (3관) 거울이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 

한밤의 심리 극장 (4관) 선하지만 '공감제로'인 그와 공존하는 법 

한밤의 심리 극장 (5관) 친절한(?) 악마, 사이코패스의 두얼굴 

한밤의 심리 극장 (6관)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은?

한밤의 심리 극장 (7관)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입맛 

한밤의 심리 극장 (8관) 열 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 

한밤의 심리 극장 (9관) 끝나지 않은 잔혹 동화 

한밤의 심리 극장 (10관) 나는 냄새난다. 고로 존재한다.


제12관 도덕적 딜레마 - 참을 수 없는 선택의 무거움

-- 도덕적인 인간의 부도덕한 선택,「소피의 선택」

 

"나랑 어머니랑 강에 빠졌어. 물은 깊고 둘 다 헤엄을 못 쳐. 당신은 누굴 먼저 구해낼 거야? 나야? 어머니야? 한 명만 선택해." 사랑을 확인하려할 때 우리는 이따금 상대에게 몹시 곤란한 선택을 강요한다. 상황은 극단적일수록 좋으며,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에게 지니는 나의 무게가 쉽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연인들이 장난처럼 주고받은 이 난감한 질문은 어쩌면 만약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받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과 실제로는 그런 일이 결코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실제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선택하는 입장에서도 또 선택당하는 입장에서도 이보다 더 잔인한 순간이 또 있을까?

소피 자비스토프스카가 좁아터진 열차 객실에서 서른 시간을 흔들리며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 그러했다. 그녀에게는 각각 8살과 10살이 된 어린 자식이 있었는데 군의관은 그 중 한 명만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선택할 수 없다며 저항하지만 군의관은 그러면 둘 다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고 선언한다. 둘 다 죽느냐, 아니면 하나라도 살리느냐. 그녀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더 어리고 병약한 딸 에바를 내주고, 아이는 끌려가면서 계속 비명을 지르고 울며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나중에 소피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아이의 마지막 표정을 보지 못했고, 항상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소피가 내린 선택에 대해 아마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진 못할 것이다. 뇌가 멈추고 심장이 뜯기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만 내면의 괴로움 때문에 두 자식을 모두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살리는 것이 어쩌면 부모로서의 의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순간적으로 딸을 버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은 그녀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새겼고, 그렇게 구한 아들 얀마저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소피는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상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의 줄거리다.


영화 ‘소피의 선택’의 한 장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소피는 두 아이 중 한 명을 직접 선택해 가스실로 보내라는 괴로운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러면 여기서 줄거리를 조금 틀어보자. 소피에게 버림받은 에바는 가스실로 끌려가던 도중 최근 어린 딸아이를 잃은 어떤 친절한 독일인 장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가장 믿고 의지했던 존재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은 그녀의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고 에바는 원망과 분노 속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과 원한을 키우며 비뚤어진 인간으로 성장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에 보복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무차별적인 테러를 계획한다. 마침내 결전의 날, 그녀는 자신이 일으킨 테러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법의 처벌을 피해 무사히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그 후 그녀는 신문사로 편지를 보내 이 사건의 배후가 된 것은 자식의 가치를 물건처럼 판단하고 그 생명을 좌지우지할 선택을 내린 부도덕한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말한다.

방금 덧붙인 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물론 내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없었던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줄거리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떠올리게 한다. ‘몬스터’는 자신이 수술로 살려낸 연쇄살인마 요한의 뒤를 쫓는 어느 외과의사 덴마의 이야기다. 덴마는 추적 끝에 요한의 범죄의 배경에는 구동독의 한 고아원에서 행해진 엘리트 육성을 위한 심리실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소피의 선택이 등장한다. 요한의 어머니는 두 쌍둥이 남매 중 한 명을 실험에 참가시키라는 통보를 받는다. 당장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선택하는 일만큼이나 급박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품안의 자식을 떼어내 정체불명의 괴상한 심리실험에 참가시키는 것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선택은 즉각 내려져야 했고, 어머니는 고심 끝에 한 명을 넘겨준다. 반전이 있다면, 어머니가 끔찍한 정신실험에 참가시킨 사람은 요한이 아니라 쌍둥이 누이 니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 두 사람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어느 쪽을 택할지 몹시도 망설이며 요한을 내밀었다가 다시 니나를 보내버렸기 때문에 요한은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니나에 대한 미안함과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이 선택으로 인한 상처는 살아 돌아온 니나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와 합쳐져 요한을 괴물로 성장시킨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소피의 선택은 두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만일 에바를 선택해 가스실로 보낸 것이 소피가 아니라 군의관이었다면 에바는 그렇게까지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의구심을 품거나 니나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피가 내린 선택은, 또 요한의 어머니가 내린 선택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가? 만약 아니라면 소피가 느낀 죄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또 에바가 알고 보니 소피의 친자식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혹은 소피가 두 아이들의 부모가 아니라 가정교사였다면? 소피의 선택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은 달라지는가? 또 그녀가 느낀 죄의식의 강도는 부모였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덜어졌을까?

사실 질문을 던지기란 쉽다. 나는 얼마든지 새로운 상황을 생각해내어 추가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질문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정답을 말 할 능력은 없다. 사실 이 질문에는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소피의 선택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적절한 사례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몬스터’의 한 장면

가발을 쓰고 똑같은 복장을 한 쌍둥이 남매의 모습. 만화 ‘몬스터’는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소피의 선택’ 그 후 이야기에 해당한다.(사족을 덧붙이자면 몬스터는 HBO에서 곧 미드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 ‘도덕’ 시간에 배운 수많은 철학자들의 영향인지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과 이성을 대조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도덕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련의 도덕 원칙이 존재하며, 도덕성은 그 원칙에 따라서 이성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에는 행위의 원인과 결과, 절대적인 도덕 원칙뿐만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서로 갈등하는 여러 가지 의무들, 시대적 배경과 관습 등 다양한 조건들이 함께 고려된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데 소피의 사례를 읽으며 많은 분들이 느꼈겠지만 생각보다 도덕적 판단은 재빨리 즉각적으로 내려진다. 오히려 고민은 그 뒤에 시작된다. 추가된 정보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반추하다보면, 내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을까부터 도덕의 경계와 정체에 대해서까지 혼란과 의구심이 생겨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핫한 지식인 중 한 명인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을 ‘직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피해자가 없는 일련의 금기 위반 사례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했다. 이 금기 위반 사례들에는 ‘이제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국기를 여러 장으로 잘라 화장실 청소용 걸레로 사용한 여자 이야기(그녀의 이런 행동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와 ‘상호 합의하에 비밀리에 나눈 남매간의 성행위(임신할 가능성은 없다)’ 등의 이야기가 포함되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등장인물의 행위의 도덕성을 즉각적으로 판단했는데, 그 판단 근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상당수가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자신이 제시한 판단 근거의 논리적 오류(예: 임신 가능성이 없는 남매간 성행위를 근친상간의 결과로 기형아가 태어날 수 있어서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함)를 지적받았을 때에는 당황하면서 보이지 않는 피해자를 꾸며내는 등 추론 근거를 사후에 조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상당수의 피험자들은 더 이상 논리적인 추론 근거를 댈 수 없을 때에도 처음의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이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도덕적 당혹감’이라고 명명하고 도덕적 판단이 직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근거로 삼았다. 도덕적 판단은 도덕적 직관과 이성적 추론이라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직관이 먼저이고, 이성적인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직관을 커다란 코끼리에, 이성적 추론을 그 위에 올라탄 기수에 비유하며, 기수는 코끼리의 행보를 지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방향은 거대한 코끼리가 어디로 몸을 틀었는지에 따라 결정되며, 대부분의 경우 기수는 이미 내려진 판단에 대한 사후 합리화나 강화 작용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코끼리가 몸을 튼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여러 연구들이 도덕이 이성의 산물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수행한 뇌영상촬영 연구는 도덕적 판단에 감정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뇌의 특정 부위(배쪽안쪽앞이마겉질(ventral medial prefrontal cortex))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을 연구하고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이들은 감정에 관련된 능력이 거의 제로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IQ나 인지 능력 등에서는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으며, 콜버그의 도덕적 추론 능력 테스트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정이나 일터로 돌아가 스스로 생활을 영위해야 했을 때,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고는 했다. 다마지오는 이러한 결과를 ‘합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직감 및 신체의 반응이 필요하다로 해석하고 뇌의 이 부위가 의식의 활동에 직감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외에도 여러 연구들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감정 처리와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이성적 추론 능력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6개월 정도의 어린 영아조차도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반면 이성적 추론능력은 멀쩡한데 도덕적 감정이 결여된 대표적인 존재로 사이코패스를 들 수 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도덕 능력이 정서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과 태어나자마자 발휘되는, ‘도덕 본능’이라고 부를만한 선천적인 영역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일찍이 다윈은 인간이 가진 도덕 감성을 진화의 산물로 보았다. 그는 모든 인간이 대중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인정에 대한 애착과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때의 감정”은 본능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유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1975년 자신의 저서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에서 “윤리 철학자들은 ... 감정 중추에서 의견을 구해 도덕의 의무론적 규범을 직관으로 알아낸다 .... 이러한 규범들의 의미는 감정 중추의 활동을 생물학적 적응으로 해석할 때에만 비로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다”고 얘기하며 인간이 가진 도덕적 직관이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한 바 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러한 윌슨의 주장을 도덕 심리학에 있어 하나의 예언으로 평가하며 도덕 본능을 진화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는 도덕성을 ‘(일련의 진화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직관들과 학습의 산물’로 설명한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아래와 같은 6가지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반을 토대로 문화와 학습이 작용하여 각 문화에 고유한, 혹은 개인에 고유한 도덕 매트릭스가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하이트의 6가지 도덕적 기반>

 

1) 배려와 피해 : 자식 혹은 혈연 관계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고 보살피기 위해 진화함. 고통과 필요의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 잔혹함에 대한 경멸, 약한 존재에 대한 배려와 친절, 동정심 등으로 나타남.

2) 공평성과 부정 : 쌍방향의 주고 받기 관계에서 은혜는 되갚고 부정행위자나 사기꾼은 처벌하기 위해 진화함. 인과응보. 결과에 대한 공평한(기여한 바에 따른) 분배도 여기에 속함. 관련 덕목으로 공평성, 정의, 신뢰 등이 있음.

3) 충성심과 배신 : 단결력 있는 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진화함. 소속 집단에 충성하며 집단에 대한 위협과 도전에 맞서려는 마음. 훌륭한 팀플레이어에 대한 보상과 배신자에 대한 응징이 포함됨. 관련 덕목으로 충성심, 애국심, 자기 희생 등이 있음.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심리도 여기에 속함.

4) 권위와 전복 : 위계 서열 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다지기 위해 진화함. 집단을 이루어 사는 많은 종에서 위계서열이 확립되어 있음. 위계서열은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집단 내 갈등을 제어하고 해결하며, 질서를 수립해 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 윗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며, 아랫사람을 잘 이끌려는 마음. 존경과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표출되며 관련 덕목으로 복종과 경의가 있음.

5) 고귀함과 추함 : 병균이나 기생충, 독성 물질을 피하는 과정에서 진화한 것으로 여겨짐. 신성한 가치를 높이 사고 청결을 추구하며 음탕한 행위, 더럽고 불순한 것을 천시하거나 피하려는 마음으로 나타남. 본능적인 구토감으로 표출되며 관련 덕목으로 절제, 순결, 경건, 청결 등이 있음.

6) 자유와 압제 :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며 구속하려는 개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진화함. 불한당과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마음. 자유와 평등을 추구함. 지역주의. 경제적 신자유주의도 이런 도덕성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음.

 

하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도덕성은 피해와 공평성처럼 기존에 도덕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가치를 넘어 관습이나 종교 같은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부딪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자극을 만나면 감정적으로, 빠르게 반응을 일으키는 심리적 경향들이 진화했다고 가정할 때, 도덕성의 기반이 인간사의 전영역에 걸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어떻게 보면 도덕이란 인간의 삶과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친 여러 삶의 문제들, 관계들, 사회적 이슈들을 원활하게 해결해 나가기 위해 발달한 지침인 것이다. 어쩌면 과거 인간의 삶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 가장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피의 선택에서 시작해 다소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선택에 대한 내 입장을 밝히자면, 분명 에바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녀를 비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피의 선택이 픽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을 옮겨 적으며 나는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였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여자 아이의 모습 위로 어린 딸 아이의 얼굴이 겹쳤다. 부모가 되어서 느낀 소피의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괴롭고 처참한 것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그녀에게 이입하려는 감정을 멈춘다. 만약이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저 내게 그녀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한다.

철학 지식이 전혀 없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그 예정대로 행동했다고 해도 그가 자유의지대로 행동했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유사하게, 슈퍼 컴퓨터가 세상의 현 상태와 자연 법칙들로 미루어 어떤 인물의 범행을 20년이나 앞서 예견했고, 그가 이러한 예언을 아는 상황에서 20년 후 정말로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는 자유롭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소피가 느낀 죄의식에 이 같은 심리가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소피가 느낀 죄의식의 본질은 물론 ‘자식을 저버린 부모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강압적인 상황’이 그녀의 죄의식을 덜어줄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 데에는 이 같은 심리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우리는 여러 번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진정 ‘자유의지’라는 것을 발휘할 수 있을만한 대안들이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으며 약간의 융통성이 발휘된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그마저도 이미 유전자와 환경의 제약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윈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있음을 의심한다 ...... 모든 행동은 유전적 성향, 타인이 보인 모범이나 가르침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비난이나 칭찬을 받는 모든 행위들이 어떤 영적인 ‘내’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육체적 필요 때문에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이런 견해를 갖고 있으면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 사람은 우쭐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 또 타인을 비난할 권리도 없다.”라고 얘기했다. 그는 인간 행동에 영향을 주는 환경이나 유전자는 모두 생물학(광의의 의미로)적으로 조절된다고 생각했다. 다윈의 견해를 정리한 로버트 라이트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는 생물학의 노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윈이 썼듯이 우리는 악인을 “병자처럼” 보아야 하며 “증오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동정하는 것이 더 타당”한지도 모른다. 자유의지에 대한 다윈의 견해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소피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저 그녀를 동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