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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과학자'와 함께하는 양자 공부 : 김상욱 편 ② 본문

(연재) 과학+책+수다

'경계의 과학자'와 함께하는 양자 공부 : 김상욱 편 ②

Editor! 2018.03.30 11:08

이번 「과학+책+수다」의 주인공은 바쁜 현대인을 위한 양자 역학 교양서를 펴낸 김상욱 경희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다. 2017년까지 부산 대학교 물리 교육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최근 경희대로 옮겼다. 지난 겨울 어느 날 연구와 교육의 거점 변동으로 바쁜 김상욱 교수를 모셔 짧지만 깊은 수다를 나눴다. 양자 역학은 골치 아픈 가설이나 대학 상아탑 속 박제화된 이론이 아니다. 양자 역학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고, 현대 문명을 가능케 한 절대 반지 같은 필수 지식이기도 하다. 우리 삶 전체가 양자 역학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상욱 교수의 평생 화두를 확인했던 1회에 이어 2회에서는 김상욱 교수를 양자 역학의 세계로 이끌었고, 그가 사랑했던 과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SB: 사이언스북스 편집부)





과학+책+수다 여섯 번째 이야기

'경계의 과학자'와 함께하는 양자 공부,

『김상욱의 양자 공부』 김상욱 편 ②



만약에 닐스 보어가 없었다면……


SB : 양자 역학은 상대성 이론이나 뉴턴 역학과 달리 수많은 과학자들의 합작품이잖아요. 양자 역학의 완성 과정에 기여한 수많은 과학자들 중 선생님이 제일 높게 평가하시는 물리학자를 한 사람 꼽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특별히 ‘애정’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김상욱 : 아마도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닐스 보어겠죠. 누구한테 물어봐도 닐스 보어라고 할 거예요. 보어는 물리학자치고는 철학자 같은 측면이 강했고, 엄밀한 추론보다는 직관에 의존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죠. 실제로 물리학자들 중에는 보어가 실제로 기여한 건 얼마 없다고 폄하하는 이들도 꽤 있어요. 보어는 수소 원자에 대한 간단한 모형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래서 양자 역학이 지금 같은 최종 형태를 갖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큰 기여를 안 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보어는 양자 역학이 미미한 실마리에서 출발해 지금 같은 형태를 가질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최전선에서 총지휘를 한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이였어요. 양자 역학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나 볼프강 파울리 같은 사람들이 모두 다 보어 밑에서 일을 했죠. 그런 의미에서 양자 역학 역사의 최대 공헌자를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보어를 뽑게 되죠.


책에도 썼지만 보어가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을 붙들고 설득하는 거였어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내놓고, 논문만 쓰고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도 안 받아들였을 거예요. 보어는 이 이론을 들고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설득했죠. 그 덕분에 보어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지요. 특히 강력한 반대자였던 아인슈타인을 붙들고 싸우고 논쟁했던 것은 최고의 홍보 수단이었을 거예요.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양자 역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믿게 되었죠. 한 명의 학자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새롭고 그만큼 생소하고 또 그 이상으로 거부감을 주었던 학문 분과 전체를 끌고 가면서 반대자들을 하나하나 논파하고 설득해 가는 과정에서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생산해 냈죠. 많은 악담과 폄하를 뚫고 최후까지 버티며 결국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의 공격까지 정면으로 맞서 분쇄해 낸 사람. 그게 보어였죠. 그가 제안한 해석 같은 것들보다 이런 인간적인 노력이 저 같은 후배 물리학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법이죠.


양자 역학 완성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 그가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하나하나 논파하고 설득한 끝에 양자 역학은 오늘날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SB : 만약 보어가 없었다면 현재 같은 양자 역학이 이렇게 빨리 만들어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김상욱 :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질문은 늘 어려운 법이죠. 하지만 보어가 없었으면 하이젠베르크 같은 젊은 연구자들이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만 봐도 그렇죠. 코펜하겐에 자리 잡고 있던 보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이 양자 역학을 오늘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 주죠. 보어는 연구와 토론의 장을 제공했고 독려했죠. 하이젠베르크의 책들만 봐도 보어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사람의 모임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 흩어지는 법이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에 매료된 20대 중반의 젊은 과학자들 역시 보어가 없었다면 그들이 아무리 세상 둘 없는 천재라 해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보어가 없었다면 양자 역학의 역사는 달라졌겠죠.


아마 한동안 지금의 양자 역학과는 전혀 다른 이론이 등장해 학계를 지배했을지도 몰라요.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내놓은 어떤 해석이 한동안 지배했겠지만, 몇 년도 안 돼 문제에 봉착했을 거예요. 하다 하다 안 되면 새로운 모형이나 이론을 내놓고, 또 하다 하다 안 되면 다시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 이런 과도기를 몇 번씩 겪었을지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보어의 역할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코펜하겐 해석 등장으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해석과 관련해 논쟁이 되고 있잖아요. 보어가 없었다면,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출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겁니다. 


SB : 물리학자가 아니더라도 보어의 리더십을 깊이 살펴봐야겠군요. 과학이 아무리 사실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역시 사람이 일일 테니까요.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이야기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저희 편집부에 선생님이 양자 역학의 어떤 해석을 지지하시는지 궁금해 하는 이가 있더군요. 선생님은 어느 해석을 지지하시나요? 코펜하겐 해석인가요? 




결어긋남 이론과 코펜하겐 해석만이 유일한 과학적인 이론과 해석이다!?


김상욱 : 책을 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텐데, 저는 이 책에서 양자 역학을 결어긋남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결어긋남 이론은 코펜하겐 해석의 가장 정교한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당연히 저는 이 이론이, 그러니까 코펜하겐 해석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지한다기보다는 말이죠. 저는 “해석을 지지한다.” 이런 말이 물리학에서는 참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하죠. 하지만 물리학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실험적으로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게 대단히 중요해요. 뭐라 할까요. 저는 물리학 이론이라면 정합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다중 우주론, 정보 우주론,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 이론 들처럼 코펜하겐 해석과 경합한다고 여기는 이론들을 늘어놓고서 무엇을 지지하냐고 묻지만, 이중에서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건 결어긋남 이론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다른 것들은 경쟁이 되질 않아요.


물론 여전히 결어긋남 이론 또는 코펜하겐 해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죠. 그러나 결어긋남 이론을 가지고는 실험과 계산을 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측정을 하는 세기를 바꿨을 때 어떤 물체가 보이는 입자성과 파동성이 어느 정도가 될지 계산할 수 있죠. 또 그런 시스템들을 여러 개 모았을 때 몇 퍼센트의 확률로 측정된 결과가 나오고, 측정 안 된 결과가 나올지도 계산할 수 있죠. 아니면 결어긋남이 일어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도 계산할 수 있어요. 책에서도 소개했지만 풀러렌 같은 큰 분자를 가지고 이중 슬릿 실험도 하잖아요. 이런 검증 실험이 가능한 것은 코펜하겐 해석에서 나온 결어긋남 이론뿐이죠. 이것만이 양자 역학적 과학 이론이에요. 


거대 분자 풀러렌의 이중 실험을 성공시킴으로써 결어긋남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물리학자 안톤 차일링거. 현재까지는 결어긋남 이론이 코펜하겐 해석을 설명하는 ‘유일한 과학 이론’이다. Ⓒ Jaqueline Godany/ASAblanca


다중 우주론의 경우엔 검증 실험은커녕 실제로 수행 가능한 검증 실험이 제안된 적도 없어요. 숨은 변수 이론은 검증 실험을 통해 기각됐죠. 그 실험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딴죽 거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지지자들만 그렇게 보는 거지, 과학 이론으로서는 끝났다고 판단돼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코펜하겐 해석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결어긋남 이론만이 유일한 양자 물리학 이론에요. 적정한 이론. 그런데 그게 완벽하지 않다는 게 문제인 거지요. 완벽하지 않다는 건 여전히 이해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깔끔하지가 않은 거예요. 측정 후에 뭔가 손으로 계속 지우고 다시 써야 해요. 코펜하겐 해석의 반대자들은 그게 기분 나쁘다는 건데 제가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기분 나쁘다는 게 그 이론을 거부할 이유가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실험 결과와 안 맞으면 모를까, 그게 참 이해가 안 된다거나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만으로 과학 이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SB : 말씀하신 대로 실험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죠.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미학적 관점이라고 할까요, 미감 같은 것도 중요시하지 않나요?


김상욱 : 물론 중요하지요. 


SB :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은 가능하면 간단한 이론, 깔끔하고 단순한 방정식 이런 것들을 우아한 이론이라고 높게 평가하고 추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금 말씀 주신 것들은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김상욱 : 아니죠. 질문이 지금 뭘 지지하냐는 거여서, 어떤 해석을 지지한다는 게 물리학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드렸던 거죠.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물리학적으로 의미 있는 이론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말씀드린 거죠. 그것과 별개로 지금 말씀하신 대로 어떤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른 가능성에 대한 탐구 같은 건 당연히 중요한 일입니다. 실제로 숨은 변수 이론같이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으면 ‘얽힘(entanglement)’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물리학에서 뭔가 찜찜한 게 있다고 해서, 그리고 지금 당장 검증 실험을 제안할 수 없다고 해서, “지금도 충분한데 찜찜한 게 검증되겠어? 하지 마.”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거죠. 


언제나 새로운 물리학은 그러한 고민에서 나왔어요. 예를 들어 전자기학과 고전 역학 사이의 어긋남을 찜찜하게 느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고안해 낸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물리학자들이 양자 역학을 보면서 느끼는 찜찜함이 물리학을 다 바꿀지도 모르죠. 다중 우주론이나 정보 우주론이나 하는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는 건 물리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현 수준에서 어떤 이론이 현재 가장 타당한 이론이냐, 이렇게 물어본다면 답은 이미 있는 거라는 이야기에요. 지금 경합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지요. 지금은. 


“물리학자들이 양자 역학을 보면서 느끼는 찜찜함이 물리학을 다 바꿀지도 모르죠.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는 건 물리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라는 김상욱 경희대 교수. Ⓒ (주)사이언스북스.




양자 공부의 첫 스승


SB : 알겠습니다. 그럼 또 여기서 이야기를 좀 바꿔서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에 폐사에서 『김상욱의 양자 공부』와 함께 유니스트 이해웅 교수님의 『양자 정보학 강의』가 출간되었는데, 이해웅 교수님이 박사 학위 지도 교수였다고 들었습니다. 


김상욱 : 제가 양자 역학을 정식으로 처음 배운 게 대학교 3학년 때 이해웅 교수님의 수업에서였어요. 제 양자 공부의 정식 첫 스승인 셈이지요.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물리학과에 간 것도 양자 역학을 배우기 위해서였잖아요.


SB : 그렇지요.


김상욱 : 입학했는데 양자 역학을 안 가르쳐 주더라고요. 물어봤더니 3학년 되어야 배운다고 하더군요. 3학년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래서 3학년이 되어 양자 역학 수업을 처음 들을 때 정말 두근두근거리는 가슴 안고 들었죠. 이해웅 교수님은 강의를 굉장히 쉽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에요. 가능하면 쉽게 또 쉽게. 또 뭐든지 사례를 들려고 하세요. 저희 랩 미팅 할 때도 언제나 학생들이 수학으로 멋지게 증명하고 나서 발표를 마치면 이 교수님이 항상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죠. “예를 하나만 들어 보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지.” 이런 스타일이세요. 그런데 이게 저하고는 잘 안 맞았죠. 저는 좀 더 명징하고 수학적이고 엄밀한 걸 원했는데 교수님은 계속 쉽게 풀어 설명하려고 하셨어요. 그게 오히려 제게는 더 혼란스러워 보였어요. 사실 공부를 따로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이해웅 교수님의 방식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보니까, 저도 학생들을 비슷하게 지도하고 있더군요.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해 낸 학생에게 예를 하나 들어 봐라 하는 거죠. 이런 스타일이 생긴 것도 교수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강연 중인 이해웅 유니스트 석좌 교수. 국내에 양자 정보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 세대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정보학 관련 스테디셀러인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사이언스북스, 2013년)는 물론, 최근 출간된 『양자 정보학 강의』(사이언스북스, 2017년)에서 양자 정보학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촬영: 손문상 Ⓒ (주)사이언스북스. 


SB : 그렇군요. 유튜브 강연을 보면 선생님도 개념을 설명하신 다음 반드시 그것을 보충하는 예를 하나 꼭 들어 다시 한번 설명하시더군요. 그 스타일이 이해웅 선생님의 영향이군요. 


김상욱 : 그렇지요. 이해웅 교수님은 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셨어요. 어떤 문제든 그것을 간단한 물리적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없으면 당신 스스로도 잘 받아들이시지 않았죠. 저희 실험실에 수학을 아주 잘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대학생 수학 경시 대회 나가 상도 받은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죠. 이 친구는 언제나 수학적으로 완결된 발표를 했어요. 논문도 많은 시간을 들여서 그런 식으로 쓰고 싶어 했죠. 그런데 교수님을 납득시킬 수 있는 간단한 예를 잘 들지 못했어요. 심지어 본인은 예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수학적으로 이렇게 명확한데 왜 이걸 더 설명하냐는 거지요. 그래서 선배들이 그 친구를 이해시키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어쨌든 교수님은 그런 스타일이셨죠. (웃음) 


SB : 혹시 그 후배 분은 졸업을 못 하신 건가요? 


김상욱 : 했지요. 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아주 괴로워했어요. (웃음) 또 이해웅 교수님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많이 배운 것은 인간적인 면이랄까, 학자로서의 자세 같은 것이었어요. 흔치 않은 분이죠. 사실 예를 들어 이런 거예요. 실험실이든, 대학원 학생들 사이에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항상 있거든요. 어떤 선배는 논문을 빨리 쓰고, 많이 쓰고, 졸업도 빨리 하고, 뭐 졸업하면 금방 좋은 데도 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논문도 못 쓰고, 항상 스트레스 받고 그렇잖아요. 


SB : 그렇지요. 


김상욱 : 같은 실험실에서 같이 연구하는 동료이고 한솥밥 먹는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서로 끊임없이 경쟁을 하게 돼요. 그런데 이해웅 교수님 같은 경우는 어떤 특징이 있냐면 예를 들어서 실험실에 누군가 논문을 써요. 그럼 출판이 되어야 하잖아요. 논문이 출판되려면 ‘억셉트’되어야 하죠. 논문 쓴 사람에게 있어 논문이 억셉트되었다는 ‘억셉턴스 레터’를 받는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고, 대개의 실험실들은 그런 날 다 같이 회식을 하고 그러죠. 특히 좋은 학술지에 논문에 실리면 인생 자체가 바뀌죠. 《네이처》에 논문이 출판되면 서울대 교수가 되는 것 아니에요. 모두가 알죠. 억셉턴스 레터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이해웅 교수님은 그런 날 회식 안 해요. 학생 논문이 억셉트되었다고 큰소리로 치하를 하거나, “누구 논문이 억셉트됐으니 다 함께 축하하자. 하하하.” 이런 게 없어요. 누가 실험실을 떠날 때나 해마다 돌아오는 무슨 철이 되었을 때나 회식을 했죠. 그게 참 이상했어요. 저희들끼리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죠. 다른 실험실과 다르다고. 


그런데 뭐라고 할까, 실험실에서 지내면서 보니까 다른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는 논문을 많이 못 쓰는 스타일이었어요. 저는 석사 때에는 실험 물리학을 전공했고 박사 1년 차 때는 뇌 과학 공부를 했고요, 비로소 박사 2년 차 되어서야 이제 양자 카오스를 공부하기 시작했죠. 방황을 많이 한 거죠. 암튼 양자 공부 하러 이해웅 교수님 실험실에 왔더니 저보다 1년 빠른 선배가 논문을 벌써 3편씩 써놓고 있던 거예요. 그 선배는 졸업할 때까지 7편을 썼죠. 보고 있자니 굉장히 짜증 났죠. 부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 교수님은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고 하셨죠. 학위 과정을 밟을 때에는 논문을 많이 쓰는 것보다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바로 서는 게 중요하다고 늘 말씀하셨죠. 이런 이 교수님의 말씀과 생각이 실험실 분위기에도 은근하게 퍼져 있었죠. 대놓고 우리 실험실은 논문 억셉트됐다고 회식 갖지는 않는다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실험실 동료들 사이에서 서로 시샘하고 서로 비교하고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생기는 걸 경계하셨죠. 진정한 의미의 깊은 배려였죠. 그런 게 저 같은 사람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어요. 그렇게 사려 깊은 행동과 그 뜻을 암암리에 느끼며 교수님을 인간적으로 많이 존경하고 그랬던 같아요.


저희 졸업하던 날에도 자주 찾아오는 건 좋지만, 올 때 절대로 선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저희가 그래도 되냐고 여쭤보니,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선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많이 찾아오지 않을 테니 그래서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고 하셨죠. 그래도 나오면서 저희끼리는 실제로 진짜로 안 가져와도 되나 했죠.


SB : 실험실 선배들에 여쭤보지 그러셨어요. 


김상욱 : 실제로 안 가져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도 안 가져갔죠. (웃음) 어쨌든 그런 부분에서 결벽증이 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셨어요. 


SB : 그렇군요. 『김상욱의 양자 공부』가 이해웅 교수님의 『양자 정보학 강의』와 같은 달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이 이해웅 교수님께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양자 사제(師弟)의 책을 함께 내게 되어서 저희도 좋고요.


사제지간인 이해웅 유니스트 교수(오른쪽)와 김상욱 경희대 교수(왼쪽)는 차세대 양자 정보 연구의 최전선에서 나란히 활동하고 있다. 2017년 12월 20일 「양자 번개」 때 찍은 사진이다. Ⓒ (주)사이언스북스.

(다음 편에 계속)



※ 관련 도서 ※

『김상욱의 양자 공부』 [도서정보]


『양자 정보학 강의』 [도서정보]


※ <양자 번개> 강연 영상 ※



※ <5분의 과학>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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