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Books
과학해서 행복합니다 본문
서울문고의 추억
리처드 파인만을 만나다
과학해서 행복합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
달이 내려다본다
"리처드 파인만을 만나다"편에 이어서...
선배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역시 책은 만들수록 어렵다. 그래서인지 신입 편집자 시절 어렵다, 힘들다 하소연하던 것은 슬그머니 웃어넘길 만한 모험담으로 승화되어 버리는 것 같다. 어쩌면 처음 2년 동안 『과학해서 행복한 사람들』(사이언스북스, 2006년)에 매달려 있느라 더 박진감이 넘쳤는지도 모르겠다.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와 함께 소위 과학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성 과학자와 이공계 여대생이 만나는 자리를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맡게 되었다.나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던 여학생들에게 행여 우습게 보이는 실수라도 할까 잔뜩 긴장한 채로 첫 해외 출장에 나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우스웠을 것이다.) 어쨌든 학생들을 이끌고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이케부쿠로 거리를 헤매면서 인터뷰를 진행할 조용한 식당을 물색했다. 첫 번째 임무 완료.
해 저물 무렵 접선 장소에서 첫인사로 꽃다발을 건네던 순간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숙소에서 학생들이 고맙다며 준 병아리 만주를 받고서는 거의 울 뻔했다. (먹을 것에 넘어간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인터뷰를 의뢰하는 이메일과 전화 통화에서 짐작했다시피 인터뷰의 첫 번째 주인공, 도쿄 대학교 응용 화학과의 가와이 마키 교수님은 무척 상냥했다.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 앞으로 그런 사람을 여섯 명이나 더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 행운에 힘입어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한국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 나도 점점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진로가 고민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눈을 빛내면서 나도 어쩐지 학생 때로 돌아가고는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박진감 넘치는 모험 중의 압권은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 시작되었다. 인터뷰를 앞두고 보이스레코더를 시험해 보던 중 버튼을 잘못 눌러 녹음 설정이 바뀌어 15초마다 녹음이 멈추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사실을 알아챈 것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지나 콜라타와의 정식 인터뷰가 시작되고 1분쯤 흘렀을 때였다. 물론 그 순간에는 꿈에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모종의 이유(뉴욕에도 수맥이 흐르나?) 때문에 보이스레코더가 고장 났다고 믿으며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한줄기 희망은 혹시나 해서 전날 현지 사진작가에게 부탁해 둔 비디오 카메라의 녹화 테이프였다. 그러면서도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의 속기 수준으로 인터뷰 답변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수첩을 꺼내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이 전해올까 두려워 차마 열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저 비디오 테이프에 무사히 녹화가 되었기만을 바라며 인터뷰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해맑은 학생들은 큰 숙제 하나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라이온킹 뮤지컬 극장으로 흩어졌다. 나도 나름대로 오후를 재충전할 계획이 있었지만(뉴욕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카놀리 가게를 구글맵에서 뽑아갔다고는 말 못하겠다.) 충격에서 해방되지 못한 상태로 일단 시간대가 얼추 맞기를 기다려 서울의 선배들에게 구원 요청을 하러 갔다. 행인지 불행인지 보이스레코더를 새로 사기에는 첨단 기기에 길든 눈에 한참 모자란 종류밖에 없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그만큼 무거운 비디오 카메라 장비까지 챙긴 채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루 이동하고 인터뷰, 바로 다음날 이동 후 인터뷰가 이어지는 강행군 길에 메릴랜드 대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서은숙 교수님을 처음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결국 졸고 말았다. 천체 물리학과에 자리를 잡고 크림 프로젝트를 지휘하려고 남극으로……. 어이없게 그 와중에도 수첩을 꼭 쥐고 놓지 않아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따뜻한 교수님의 격려에 힘을 얻고 다음날 연구실 인터뷰를 준비하러 숙소로 돌아오자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가 알려준 위니레코더 프로그램을 쓰자 이제 더 이상 비디오 테이프가 중간에 모자라 녹화가 끊기는 상상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본 인터뷰에 임할 수 있었기에, 한층 의욕적으로 인터뷰 정리를 겸한 회의를 한밤중까지 실시해 버렸다. 물론 마지막 인터뷰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그 정도쯤이야. 그날 선배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그래서 앞으로 평생 부모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먹은 불효자마냥 훌륭한 후배가 되어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결심했다. 앞으로 더 잘 하면 되지요.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편으로 이어집니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이 내려다본다 (0) | 2010.07.16 |
---|---|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 (0) | 2010.07.14 |
리처드 파인만을 만나다 (0) | 2010.07.09 |
서울문고의 추억 (0) | 2010.07.08 |
'이카로스' 팀 리더가 말하는 이카로스 (0) | 2010.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