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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 최재천 본문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 『지구의 정복자』가 언론에서 상찬받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겨레》, 《동아일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두 언론 모두 “오로지 진리 추구를 위해” 오랫동안 지지해 온 이론을 비판한 윌슨의 지적, 학문적 용기에 대해 높이 평가했습니다.
『지구의 정복자』에는 에드워드 윌슨의 하버드 대학교 제자이자 그의 진화 생물학과 사회 생물학, 그리고 ‘통섭’을 한국 사회에서 확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최재천 국립 생태원 원장의 해설 및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지식 대통합의 방향성을 제시한 『통섭』의 옮긴이 서문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과 마찬가지로 유려한 문장 속에서 현대 과학의 최첨단 이슈와 논쟁이 펼쳐집니다.
아직 책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그 글 중 일부를 맛보기로서 조금 공개합니다. 『자연주의자』를 바탕으로 한 최재천 교수의 분석은 『지구의 정복자』 책을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사진: 박기호 / (주)사이언스북스
2005년 6월 1~5일간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서 열린 인간 행동 진화학회 제17회 컨퍼런스는 당대 진화학계의 거물들이 거의 총출동했던 매우 특별한 행사였다. 기조 강연을 맡은 스티븐 핑커를 비롯하여 쇄그넌, 알렉산더, 모크, 버스, 트리버즈, 윌슨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양한 주제의 특별 강연을 했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특별 강연을 하는 날이었다. 늦지 않게 도착해야겠다고 찾은 강연장에는 이미 빈자리가 몇 개 남지 않았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뒤에서 몇 줄 앞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자리가 학자로 살아온 내 인생에서 가장 불편한 자리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윌슨 교수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강연을 이어 갔다. 그의 강연이 중반을 넘어서며 강연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윌슨 교수는 그 강연에서 그동안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지지했던 윌리엄 해밀턴의 혈연 선택 이론을 버리고 학문적으로 거의 뇌사 상태에 이른 집단 선택의 품으로 귀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컨퍼런스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 테면 '해밀턴교'의 광신도들인데 윌슨 교수가 그 소굴 한복판에서 나름의 개종 선언을 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미시건 대학교에서 함께 지내던 알렉산더 교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서양 사람들이 어이가 없을 때 하는, 어깨를 치켜세우는 몸짓을 해 보였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 역시 똑같은 몸짓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강연을 끝낸 윌슨 교수는 당신이 투척한 폭탄에 초토화된 현장을 그대로 둔 채 조용히 그러나 황급히 뒷문을 열고 퇴장했다. 그러자 마치 닭 쫓던 개들 같았던 사람들은 애꿎은 내게 몰려들었다. 사실 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윌슨 교수는 사실 그 해 봄, 그러니까 불과 한두 달 전 《사회 연구》라는 사회 과학 학술지 제72호에 「이타주의의 핵심으로서 혈연 선택-그 성공과 쇠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전면전으로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지구의 정복자』는 윌슨 학문에 있어서 방점과 같은 저술이다. 『곤충 사회들』과 『사회 생물학』에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 『통섭: 지식의 대통합』, 『초유기체: 곤충 사회들의 아름다움, 우아함, 그리고 기이함』에 이르기까지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사회성 진화에 관한 그의 이론을 지구 생태계에서 가장 화려하게 성공한 인간과 사회성 곤충에 적용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구성한 역작이다. 그러다 보니 표절 논란이 지나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자기 표절마저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독자에게는 내용의 일부가 이전에 출간된 그의 다른 저술에서 읽은 듯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진취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이 책은 윌슨 사상의 처음과 끝을 두루 음미할 수 있는 완벽한 책이다. 이런 멋진 책을 소개하며 내가 2005년 인간 행동 진화 학회 참관 경험을 자못 장황하게 서술한 까닭은 이른바 '선택의 단위'에 관한 그의 갑작스러운 전향은 이 책 전반을 꿰뚫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래전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격 저서 『자연주의자』와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2012년 8월 19~25일간 대구에서 제24회 세계 곤충학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Entomology)가 열렸다. 나는 ‘사회성 곤충 생물학의 최근 연구 발전’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 특별 강연자로 초대받아 「’아(亞)사회성’에서 ‘진(眞)사회성’으로(From ‘subsocial’ to ‘eusocial’)」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회성 곤충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나는 왜 윌슨 교수가 뒤늦게 혈연 선택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나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이 글에 나는 그 논문의 핵심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 설명하려 한다.
(중략)
『자연주의자』 , 『지구의 정복자』
(중략)
『지구의 정복자』는 우리 인간이 이미 수백만 년 전 침팬지와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지만 현생 인류는 불과 수십만 년 전에 출현하여 지난 6만 년 동안에 지구 전역으로 퍼져 가며 농경을 개발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하며 언어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킨 대서사를 기록하고 분석한 대작이다. 사고의 깊이와 범주는 통섭을 주창한 학자답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다. 앞에서 내가 길게 논의한 선택 논쟁에 관한 내용은 언뜻 이 책의 일부에서만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주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윌슨 교수가 이 책에서 다루는 실로 다양한 모든 주제의 기저에 흐르는 기본 개념이다. 어찌 보면 하나의 주제만 분석한 듯 보이는 나의 다분히 편협한 이 글이 윌슨의 저술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물론 오랫동안 그의 학문 궤적을 함께 추적해 온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거의 10년간 그를 지근지지(至近之地)에서 관찰해 온 나는 윌슨 교수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천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순발력이 특별히 좋아 현장에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천재가 아니다. 생물학계 내에서 비교한다 해도 그는 결코 홀데인이나 하버드 대학교 같은 학과의 동료 교수 르원틴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학자이다. 홀데인은 물리학자들이 뉴턴, 아인슈타인, 파인만 등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들을 앞세워 윽박지를 때 우리 생물학자들이 제일 자주 내세우는 전설의 인물이다. 대학가의 술집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던졌다는 촌철살인의 어록들이 지금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르원틴 교수는 내가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회 생물학 논쟁에서 윌슨 교수를 공격하는 선봉장이었던 그였지만 그의 수업과 더불어 그 유명한 그의 연구실 점심 세미나에서 보여준 그의 지적 걸출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의 점심 세미나에 초대된 연사가 아무리 낯선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하더라도 그저 한 시간 만 듣고 나면 수십 년 연구한 연사보다 더 정확한 분석과 예리한 통찰을 보여 주던 그였다.
그에 비하면 윌슨 교수는 토론을 거의 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느낌까지 들 지경이었다. 토론의 열기가 막 고조될 즈음이면 어느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그를 나는 여러 번 보았다. 때로 질문을 직접 받더라도 종종 농담 수준의 답을 흘리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다음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설전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를 떠나 연구실 문을 닫고 논문과 책을 쓰기 시작한다. 얼마 후 저술로 만나는 그는 그저 한 마디씩 탁월함을 뽐내던 우리들 모두가 한몸에 들어앉은 듯한 최고의 지성으로 우뚝 선다.
내가 관찰한 그는 순간적인 분석력이 예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홀로 앉아 주어진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고 다양한 학문의 관점을 통틀어 종합하는 능력은 내가 아는 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다. 세상에는 사실 다양한 천재가 있는 법이다. 그는 그가 설파한 그대로 말하자면 통섭형 인재의 전형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통섭형 학자가 그의 학문 여정의 정점에 다가서며 내놓은 걸작이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또 읽을 책이다. 건설적인 비판의 눈은 부릅뜨고 말이다.
-최재천(국립 생태원 원장), 『지구의 정복자』 해설 「학문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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