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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힌 과학사 서술을 위한 ‘막대 구부리기’ : 『과학의 민중사』 옮긴이 후기 본문

책 이야기

균형 잡힌 과학사 서술을 위한 ‘막대 구부리기’ : 『과학의 민중사』 옮긴이 후기

Editor! 2014. 1. 9. 15:31



다음 주 출간 예정인 『과학의 민중사』에 실린 옮긴이 후기를 블로그에 먼저 공개합니다. 

『과학의 민중사』 옮긴이 후기 

균형 잡힌 과학사 서술을 위한 ‘막대 구부리기’



  과학이나 과학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름들이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파스퇴르, 다윈, 아인슈타인, 호킹 같은 이름들이다. 과학사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케플러, 하비, 라부아지에, 멘델, 러더퍼드, 페르미, 왓슨과 크릭 등의 이름들을 손쉽게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기나 과학 교과서를 통해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접하며, 그들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이나 법칙들을 공부한다. 대학의 교양 과학사 과목을 수강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사 강의의 많은 부분은 몇 안 되는 불세출의 과학자들이 어떤 지적, 사상사적 기여를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종종 그들이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때로 박해를 받았는지를 상세하게 다룬다. (그런 점에서 갈릴레오와 종교재판, 다윈과 진화론 논쟁에 관한 에피소드는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주제들이다.) 대중적 과학사 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서술은 과학의 발전 과정에 대해 강력한 인상을 심어 준다. 요컨대 과학의 역사는 소수의 ‘천재’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우호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간헐적으로 이뤄 낸 깜짝 놀랄 만한 업적들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교육자인 클리퍼드 코너는 역저 『과학의 민중사』에서 이와 같은 이른바 ‘과학의 위인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를 마치 장군, 왕, 부자, 귀족, 지식인들의 전유물인 양 다루던 경향에서 탈피해 그간 무시돼 온 기층 민중들(노동자, 농민, 하층 계급, 여성 등)의 관점에서 그려 낸 지난 수십 년간의 민중사(people’s history) 서술 방향에 공감을 표시한다. 그는 이러한 서술 방향을 과학사에 접목시켜, 그간 지식인들의 지적 속물근성 때문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던 광부, 산파, 선원, 기계공 등이 자연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획득하는 데 기여한 바를 정당하게 복원해 내려 한다.

  원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이 엄청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기존의 연구 성과들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사라는 학문 분야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냉전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지형도로 인해 ‘조악한 경제 결정론’으로 부당하게 배척되고 비난받았던 이른바 과학사의 외적 접근(externalist approach)을 다시금 되살려 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보리스 헤센, J. D. 버널, 벤저민 패링턴, 에드거 질셀 같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사가들이 성취해 낸 업적이 여기 속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60년대 이후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주로 지구상의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을 연구해) 발굴해 낸 성과나 1980년대 이후 스티븐 섀핀, 패멀라 스미스처럼 과학의 사회사를 추구한 학자들이 얻어 낸 새로운 이해 등도 곳곳에 흥미로운 방식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물론 기존의 과학사 서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당혹스럽게 여겨질지 모른다. 서양 과학사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뉴턴, 다윈 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극히 소략하게 다뤄지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원흉으로 비난받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러한 서술이 기존의 과학사 연구 성과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과학의 위인 이론’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과학사 서술의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이미 구부러져 있던 막대를 반대 방향으로 휘려는 노력의 소산이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막대가 반대 방향으로 과도하게 휘어지는 또 다른 편향을 낳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기존의 과학사 서술을 완전히 대체한다기보다 그것과 (때때로 상당한 긴장을 수반하는) 보완 관계를 갖는다고 봐야 온당할 것이며, 또 그렇게 읽을 때 비로소 이 책이 갖는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코너는 역사가로서 흥미로운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조지아 공과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0년대에 군수업체인 록히드 항공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영국 연수를 계기로 현대과학의 군사적 속성에 눈을 뜨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이후 20년 가까이 반전 운동, 노조 운동, 좌파 운동에 투신했고 급진 과학 운동을 표방한 《민중을 위한 과학》 같은 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 와중에 그는 FBI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제한되기도 했다.) 그 후 40대 중반에 접어들어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찾던 그는 늦깎이로 대학원에 입학해 과학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장 폴 마라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까지 뉴욕 시립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격동의 20세기 후반기를 치열하게 헤쳐 나온 저자의 여러 경험과 이념, 학문적 성과들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성과물이라고 할 만하다.

  영어 초판이 2005년에 출간된 이 책이 8년이 지나서야 우리말로 선을 보이게 된 데는 약간의 변명의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역자 중 한 사람(김명진)에게 책의 번역이 처음 제안된 시점은 원서가 출간되기도 전인 2005년 봄이었다. 그러나 원서가 출간된 후에도 역자의 게으름으로 책의 번역 작업이 기약 없이 늘어지자 2008년 여름 사이언스북스에서 번역의 짐을 덜어 줄 공역자들의 섭외에 나섰고,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형섭과 안성우가 구원투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섬으로써 번역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번역의 진척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이 못되어서 2010년 여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초역 원고가 만들어졌고, 이 원고에 대한 전체적인 용어 통일과 수차례에 걸친 교열 작업에 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결국 2013년에 와서야 번역서의 출간을 보게 되었다. 번역은 김명진이 1~3장, 안성우가 4~5장, 최형섭이 6~8장을 각각 맡아서 작업했다.

  이 자리를 빌려 예상보다 크게 늦어진 이 책의 출간을 위해 힘써 주신 사이언스북스의 여러 분들과 무려 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책의 출간에 관심을 가지고 종종 소식을 물어봐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부디 이 책에서 제시하는 신선한 시각을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그것이 과학 교육이나 일반 시민들의 과학에 대한 이해에서 흥미로운 토론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3년 12월

역자들을 대표해서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