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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이 답이다 : 진화 심리학자의 한국 사회 보고서 본문
본성이 답이다
: 진화 심리학으로 본 사회와 문화
“인간 본성이 문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또한 그 해결책이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빈 서판』
경희 대학교에서 내가 담당하는 과목 중에 ‘신입생 세미나’가 있다. 예술, 체육, 공학, 인문학, 자연 과학, 국제학 등 다양한 전공에 속한 신입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이다. 과목의 주요 활동으로 독서 토론이 있다. 옳다구나(?) 하고 진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번역본을 선정했다. 한 학기 동안 함께 읽고 토론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내가 핵심 내용을 2주간 강의하고 조별 토론도 3주를 하는 만큼 학생들이 책의 대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리라 믿었다. 적어도 핑커를 외부 환경의 중요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유전자 결정론자로 간주하는 학생은 없으리라 믿었다. 핑커는 자신이 극단적인 본성론자가 아니라고 책에서 정말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니 말이다.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마지막 3주에 걸친 전체 토론 시간에 학생들이 가장 흔히 제기한 비판은 이랬다. “핑커는 본성만 강조하고 양육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학생, 핑커도 동의하지 않는단다.
우리는 사실 아주 특별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진화 심리학을 필두로 인간 본성의 과학들이 인간 삶과 사회에 대해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말하기는 쉬운데 글쓰기는 어려운가? 왜 정치인들은 자신만이 대의에 헌신하고 남들은 사리사욕을 추구한다고 굳게 믿는가? 왜 십대 청소년들은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을 ‘쿨’하다고 여기는가? 왜 콩쥐팥쥐, 신데렐라 등 전 세계의 민담에서 계부모는 유독 사악하게 그려지는가? 왜 성을 구매하는 쪽은 주로 남성인가? 이런 흔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들어 온 대답은 옹색하고 공허했다. “그냥 그런 거야. 아무 이유 없어.” “가부장제 혹은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어.” “신의 섭리야.”
대개 이런 대답들은 실제 증거를 통해 반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한 과학 분야에서 얻어진 성과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예컨대, 배우 송일국 씨의 세쌍둥이나 타요 버스, 러버덕 등을 둘러싼 귀여움 열풍이 불었을 때 어느 문화 평론가는 귀여움에 대한 애호가 ‘내가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매우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애벌레나 개미는 왜 안 귀여운지 모르겠다.
이 책은 지극히 당연하고 뻔한 논증을 펼친다. 사회와 문화는 인간 마음의 산물이다. 우리의 마음이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지 이해한다면,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더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텍사스 대학교(오스틴)에서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 교수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계속 진화 심리학자로 살고 있다. 한국인 진화 심리학자로서, 이 책은 마음이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목적을 알려 주는 진화의 관점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여 과연 무엇을 보았는지 지난 몇 년간 기록한 글들을 묶었다.
물론 잘 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객관적인 진리 추구는 핑계일 뿐 다른 불순한 의도를 숨긴 것 아니냐는 의심을 종종 받는다. 이 사람은 남자의 바람기를 옹호하려는 마초 아닐까?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이니 복지는 헛수고라는 수구 반동 아닐까? 인문학, 사회 과학, 예술 등을 진화론으로 집어삼키려는 생물학 제국주의자 아닐까?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유전자 환원주의자 아닐까?
이상하다. 일반 대중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은 잘 이해가 안 되어도 과학으로 받아들인다. 그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화 이론은 선뜻 과학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심지어 저명한 철학자나 인류학자, 심리학자들 중에서도 인간 행동을 진화적 시각으로 연구한다면 외면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끈질긴 거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혹시 나에게 정말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진화 심리학자들은 가끔 자신을 의심하고 괴로워한다. 타인들의 뜨악한 시선이나 차가운 비웃음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진화라는 분석틀은 기쁨과 만족감을 줄 때가 훨씬 더 많다. 대다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인간 본성의 내면을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혜택을 감안하면 타인들로부터 의심과 냉대를 받는다는 비용은 응당 치를 만하다.
진화적 접근은 무질서하게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여러 사실들을 하나로 간결하게 통합하는 이론틀을 제공해 준다. 예컨대, ‘간통죄는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였다’ 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만난다. 첫째, 고대 이집트, 시리아, 극동, 아프리카, 아메리카, 북유럽에는 유부녀의 외도만 간통으로 처벌하는 법률이 있었다. 둘째, 아내의 간통을 목격한 남편이 행사하는 폭력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정상을 참작할 사유로 여러 국가에서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2014년 6~9월에 선고된 간통 사건 92건 가운데 남편이 간통한 아내를 고소한 사건이 60.9퍼센트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여성과 달리 남성은 자식이 유전적 친자식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내를 자신의 성적 소유물로 착각하는 심리를 진화시켰다는 설명으로 수렴된다.
뿐만 아니라, 진화적 설명으로부터 검증 가능한 새로운 예측이 풍부하게 얻어진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꾸며 내기에만 급급한 사이비 과학이라는 오해와 정반대로, 진화 심리학은 대단히 깨지기 쉬운(fragile), 그래서 건전한 과학이다. 예를 들어, ‘보수와 진보는 왜 다른가’ 장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의 개인차는 부분적으로는 일부일처제적 성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과 문란한 성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에서 유래함을 소개했다. 그 증거로 일부일처제적인 성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마약 사용이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에 더 강하게 동의함을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나온 새로운 증거로, 이처럼 전통적인 성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동성 간의 결혼에도 더 강하게 반대함이 밝혀졌다.
진화 심리학이 종종 폭력이나 살인, 아동 학대 같은 사회악을 정당화한다는 오해에 대해서 간략히 짚어 보자. 과학은 어떤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한다. 결코 그 현상이 정당하다고 면죄부를 발급하지 않는다. 마치 암을 연구하는 의학자들이 암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암을 치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진화 심리학은 전쟁, 살인, 영아 살해, 아동 학대 같은 사회악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인과적 설명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사회악을 보다 효과적으로 줄이는 해결 방안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복지, 간통, 성매매처럼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행동에 대해서도 진화 심리학은 어느 한편이 옳다고 편들지 않는다. 진화 심리학은 논쟁이 벌어지는 어떤 행동이 왜 일어나는지, 어떤 조건 하에서 그 행동이 줄어들지 설명함으로써 이를 장려 또는 억제하는 정책에 따르는 이득과 손실을 보다 정확히 가늠하게 해 준다. 이 책의 제목만 읽고서 저자가 “폭력, 성매매, 바람기 등은 인간 본성이니 괜히 규제하지 말고 마음껏 내버려두는 게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길 부탁드린다. 우리는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비도덕적인 행동을 응징하는 인간 본성도 지니고 있다.
2016년 한 해 동안 텍사스 대학교의 데이비드 버스 교수님 연구실에서 방문 교수로 지내고 있다. 대학원생 때 썼던,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을 다시 쓰고 있다(미국 대학원생들은 연구실 선배가 방문 교수로 왔으니 제일 좋은 방을 비워 주는 배려 따윈 없다.). 10여 년 전 진화 심리학 학위를 받고자 분투하던 공간에서 진화 심리학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를 기록한 원고를 검토하자니 기분이 묘하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이 글은 전중환 교수님의 『본성의 답이다』 머리말인 '진화 심리학으로 본 사회와 문화'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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