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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물리의 정석』 이종필 옮긴이의 글: 자연 원리 이해의 정석

Editor! 2017.09.01 09:00

『물리의 정석』 이종필 옮긴이의 글:

자연 원리 이해의 정석



세계적인 석학 레너드 서스킨드의 『물리의 정석』은 번역자인 나에게도 아주 각별하다. 이 책은 서스킨드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물리학 강의를 엮은 것이다. 보통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는 (특히 한국에서는) ‘최대한 쉽게’가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교양 과학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온갖 수식들로 가득하다. 서스킨드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강의를 ‘수학을 써서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일반인을 상대로 수학을 써서 물리학을 강의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항간에는 교양 과학책에 수식이 하나 들어갈 때마다 판매량이 10퍼센트씩 감소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스킨드는 왜 이렇게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수강생들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자연의 기본 작동 원리를 그 본래의 언어인 수학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 또한 한국에서 이런 독자들을 많이 만났다. 대략 2000년대 중반부터 교양 과학책을 읽는 독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유명한 교양서는 거의 다 섭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지적 허기가 생긴다. 과학을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생긴다. 이는 굉장히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일상의 언어로만 첨단 과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교양서 한 권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무언가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물리 전공자들은 수학의 언어로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바로 그 희열 때문에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 그 희열은 일상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을뿐더러 느낄 수도 없다. 비전공자들은 그 희열을 알 길이 없다.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유일한 길은 직접 수학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과학 도서 동호회 회원들이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결정체인 중력장 방정식을 직접 손으로 풀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제안이었다. 중력장 방정식은 물리학과에서도 대학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제대로 풀 수 있는 방정식이다. 나에게 도움을 청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거나 가정 주부들로, 미적분조차도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중력장 방정식을 풀려면 미적분이 처음 등장하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부터 다시 공부해야만 했다. 결국 이듬해에 수십 명의 비전공자 수강생들이 1년에 걸쳐 고등학교 수학에서부터 대학교 수학과 일반 물리학을 거쳐 일반 상대성 이론의 중력장 방정식을 푸는 과정에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단언컨대 인생에서 가장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였다. 그런 기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처음 보자마자 무척이나 기뻤다. 나와 나의 수강생들만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자연의 기본 원리를 향한 인간의 호기심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책을 옮기면서 서스킨드가 느꼈을 법한 어려움이나 당혹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도 기본적인 수학과 미적분부터 시작한다. 번역하는 내내 나와 서스킨드의 접근법을 계속 비교하게 되었다. 여기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좋을 텐데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하는 대목이 훨씬 많았다. 


특별한 경험 때문인지 『물리의 정석』에는 나의 여타 번역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 일종의 유대감과 애정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번역을 하는 나부터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스킨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이 책으로 물리학을 배울 독자들 생각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물리학의 가장 기본인 고전 역학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준은 상당히 높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짐작컨대 서스킨드의 포부는 양자 역학과 양자장론, 더 나아가 끈 이론까지 뻗어 있는 것 같다. (서스킨드는 끈 이론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물리의 정석』은 고전 역학 단독 편이라기보다 양자 역학을 배우기 위한 사전 작업의 성격이 강하다. 이 책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이라면 적어도 양자 역학까지의 큰 그림을 미리 그려 놓는 편이 좋겠다.


이 책의 원제는 『최소한의 이론(Theoretical Minimum)』이다.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의 이론은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어판에서는 이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물리의 정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바둑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정석부터 익힌다. 정석을 제대로 배워야 헛된 수에 시간 낭비 않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복잡한 변화를 따라갈 수 있다. 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물리의 정석』은 정석 중에서도 주옥 같은 고급 정석들을 많이 담고 있다. 책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은 더 그렇다. 독자 스스로 공식을 직접 써 보고 증명 과정과 풀이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지 않는다면 별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물리의 정석』은 대충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물리학자가 안내하는 과학의 향연이라 더욱 그렇다. 이 책을 통해 대가의 숨결과 함께, 자연의 기본 원리를 수학의 언어로 맛보는 희열을 만끽하길 바란다. 건투를!


2017년 여름
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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