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cienceBooks

책 대 책 대담 (12) 「부분과 전체」 vs. 「슈뢰딩거의 삶」 본문

완결된 연재/(完) 책 대 책

책 대 책 대담 (12) 「부분과 전체」 vs. 「슈뢰딩거의 삶」

Editor! 2012. 9. 3. 14:27

책 대 책 8월 21일자 대담


「부분과 전체」 vs. 「슈뢰딩거의 삶」


단절과 연속



과학의 역사에서 이정표가 되었거나 과학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책을 중심으로 인물 대 인물, 이론 대 이론, 명강의 대 명강의 등 두 권의 책을 비교 분석하는 <책 대 책>. 그 열두 번째 대담회가 APCTP(아태이론물리센터)와 사이언스북스, 채널예스 공동 기획․주관으로 지난 8월 21일(화) 저녁 7시 강남 출판 문화 센터 5층 민음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20세기 물리학의 혁명인 양자 역학 탄생의 배경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라는 두 주역이 있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1925)과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1926)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양자 역학을 정립하였다. 한편 이들은 각각 ‘불확정성의 원리’와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입장의 차이를 보임으로써, 양자 역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논란을 심화시켰다.

 8월 <책 대 책> 대담회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인간적 면모가 생생하게 드러난 그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와 슈뢰딩거의 불꽃 같은 인생사와 당시 유럽의 격동하는 사회상을 함께 담아낸 『슈뢰딩거의 삶』을 선정, 물리학자이면서도 철학적 사유에 깊이 물들어 있던 두 천재의 삶에서 물리학과 철학은 어떤 관련을 맺는지, 양자 역학은 어떠한 지적 과정에서 탄생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상욱 한양 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부분과 전체』, 이정민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가 『슈뢰딩거의 삶』의 서평을 쓰고 대담자로 나섰으며 박상준 포항 공과 대학교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대담자와 사회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후, 본격적인 대담이 시작되었다.



박상준(사회자): 오늘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어느덧 만 1년이 된 열두 번째 책 대 책 대담회의 사회를 맡은 포항 공과 대학교 인문사회학부의 박상준이라고 합니다. 저는 전공이 국문학자입니다. 저희 학부하고 아태이론물리센터가 같은 건물 위아래 층을 쓰는 그 인연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네요. 제가 전공까지 말씀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청중 중에 과학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주제가 양자 역학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인데 저는 인문학자라서 아무리 귀동냥을 해도 양자 역학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준비는 많이 했어요. 책 두 권을 꼼꼼히 읽고 그 밖에도 여러 글을 읽고 왔거든요? 그래도 모르겠어요. Quantum이라고, 양자라고 했을 때 이게 무언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먼저 양자에 대해서 선생님께 설명을 구하겠습니다. 먼저 이상욱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면서 기회가 되시면 하이젠베르크가 양자를 정의할 때 슈뢰딩거 입장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걸 자연스럽게 밝혀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양자의 단절을 강조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이상욱(부분과 전체): 기본적으로 하이젠베르크는 자신들이 일궈 낸 양자 혁명, 기존과 다른 방식을 제시하는 물리학이라는 것에 어마어마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이젠베르크는 평생 다르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단절을 일종의 키워드로 삼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전 역학하고 양자 역학은 모든 게 달라서 존재론/인식론적 가정, 세계나 물리학 이론이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 다 닫혀 버립니다. 예를 들어 양자 도약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식으로 말하자면 원자핵 주변을 에너지 준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궤도로 도는 전자가 폴짝 뛰어서 다음 궤도로 가면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주파수만큼 빛이 튀어나온다는 생각. 거기서 어떻게 튀느냐? 모른다는 거죠.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처음하고 끝만 알고 확률은 행렬로 주어지고. 그 이상을 알려는 시도는 자신이 파울리랑 보어와 이룩한 양자 역학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양자라는 말은 영어로 ‘뭉쳐 있는 덩어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개념은 사실 고전 물리학에서도 많이 사용되어 왔어요. 특히 통계 물리학에서. 그런데 고전 물리학의 양자와 양자 물리학의 양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한계가 우리 인식에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끊어서 계산하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자를 가지고 물건의 길이를 잰다고 하면 다양하게 잴 수가 있지요. 센티미터 자로 재면 25센티미터. 밀리미터 자로 하면 248밀리미터(24.8센티미터). 단위 눈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길이가 계속 변하잖아요. 우리가 어느 정밀도로 에너지나 길이를 잴 때 임의로 도입한 단위가 고전 물리학의 양자라면, 양자 역학의 양자는 플랑크 상수로 정해지는, 자연계가 요구하는 단위입니다. 그 단위보다 작은 단위는 의미가 없죠. 자연에 한계가 있습니다.



연속을 강조한 물리학자 슈뢰딩거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이상욱 선생님 설명을 보충하자면 퀀텀이라는 말이 물리학자 사이에서는 불연속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우리가 계단을 올라갈 때 발이 계단을 거쳐서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양자 비약은 그런 식으로 어떤 중간을 거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불연속입니다. 전자 궤도를 옮겨갈 때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걸 상상해 보세요. 양자 이론은 원자 안의 세계가 그렇게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막스 플랑크가 시작한 양자 개념을 원자에 끌고 들어와서 물질계가 정말로 불연속적인 구조, 불연속적인 물리량이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 준 사람은 닐스 보어입니다. 슈뢰딩거는 양자라는 개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사실 평생 불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식으로는 우리가 물리학을, 물리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밑바탕에 연속적인 물리 과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평생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연속성을 양자 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 보어나 하이젠베르크와 대립했습니다.


박상준(사회자): 그렇다면 양자 역학은 뭘까요? 먼저 슈뢰딩거가 본 양자 역학은 어떤 것인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자 역학은 변화를 기술하는 체계이다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역학이라는 것은 물리학의 제일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뉴턴의 작업도 역학 체계를 세운 겁니다. 단지 행성 운동만을 묘사하고 기술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힘이 작용해서 운동이 일어나는지 체계적으로 기술해서 지상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보편 이론을 구성한 거예요.

1925년에 하이젠베르크와 보른, 요르단이 마찬가지 작업을 양자에 하려고 했고요. 1926년에는 슈뢰딩거가 하게 되죠. 이때 역학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뉴턴이 한 것은 시공(시간과 공간) 하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체계였는데 양자 역학에서는 그런 식으로 뭐가 변하긴 변하는데 그게 시공에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그냥 변화해 가는 무언가입니다. 그래서 양자적인 대상이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계속 논쟁이 있었죠.


이상욱(부분과 전체): 이정민 선생님 말씀에 보충하자면, 물리학자들이 다루는 역학은 생물학에서 다루는 진화 개념과 같아요. 물리학자가 관심을 갖는 대상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느냐. 이게 역학입니다. 생물학자가 관심을 갖는 대상, 그러니까 형질이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느냐라는 개념이 진화고요. 다만 물리학자의 관심이 더 추상적이고 근본적이에요. 예를 들어 질량이 변하느냐. 속도가, 위치가 변하느냐. 중요한 건 얘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뉴턴 법칙을 적용해서 시간에 따라 위치와 속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계산할 수 있단 말이에요. 원칙적으로 직접 계산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양자 역학은 우리가 계산하긴 해요. 슈뢰딩거로 예를 들면 파동 함수라는 걸 계산해요. 파동 함수 방정식을 풀어요. 그러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가 곧바로 얘의 위치나 운동량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한 단계가 더 있어요. 파동 함수에 그것의 복소 짝, 복소수 부분에다 마이너스 붙인 것을 곱한 값. 즉 파동 함수 절댓값의 제곱이죠. 그것으로 위치하고 속도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내는 장치가 있습니다. 일종의 알고리듬이 하나 더 들어가는 셈이죠.

예전에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 양자 역학에서는 안 됩니다. 얘한테 일단 파동 함수라는 걸 부여하자. 그게 뭔데? 따지지 말고. 어려운 이야기니까. 이걸 잘 계산하면 결과가 나와. 이걸 제곱해서 이런이런 일을 하면 얘 위치를 쟀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올 확률을 알 수 있어. 이게 이상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뉴턴 역학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죠. 몇백 년 동안 뉴턴 역학에 우리가 속도라든가 위치를 부여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한 거죠. 갑자기 “프사이(ψ)라는 것을 계산해 봐.” 그러니까 왜 계산해야 하지? 이 생각부터 나는 거예요. 물리학 자체가 실재하고 딱 들러붙어 있었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한 단계 넘어가서 추상적인 함수를 가지고 알고리듬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니까 말썽이 일어난 거죠.


박상준(사회자): 양자, 양자 역학에 조금 감이 잡히셨나요? 지금부터는 『부분과 전체』와 『슈뢰딩거의 삶』 두 책의 특징을 좀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욱 선생님부터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기변호조차 매력적인 천재 과학자

이상욱(부분과 전체): 이 책에는 두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하이젠베르크가 자기가 천재라는 사실을 은근히 강조합니다. 그는 굉장히 독특한 물리학자였어요. 당시에. 우리가 가진 물리학자 이미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뭔가 방정식 하나로 세계를 꿰뚫어보는 이론 물리학자잖아요. 그런데 이론 물리학자는 현재도 미국 물리학회 회원의 5퍼센트 이하에요. 1할이 안 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의미로는 최초의 이론 물리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험물리학 훈련을 하나도 안 받고 이론물리학만 연구한. 그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또 한 가지는 정치적인 문제인데요. 좀 비판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자신을 정당화하죠. 하지만 다른 증거들로 볼 때 그는 나치에 암묵적 동의 내지 지지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안에서 최고 과학자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어요. 하이젠베르크는 자기가 전쟁 기간 내내 일종의 태업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치가 원자 폭탄을 개발하려고 했는데 그건 나쁜 짓이며 종전이 곧 올 테니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필요해질 때를 대비해서 기초 연구에만 집중하고 상부에는 거짓 보고를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게 결정적으로 보어하고 기억이 안 맞아요.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연합국 과학자하고 연락이 닿는 자신에게 와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의 진척도를 염탐하더라. 그렇게 기억하고 있거든요. 여러 증거로 볼 때 보어 쪽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죠. 그런 것을 조금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박상준(사회자):  저도 처음 읽었을 때 놀랐던 게 ‘아, 이건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재구성한 내용이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대화가 대단히 세세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자기가 뭐라고 했을 때 보어가 이만큼 말하고요. 또 자기도 이만큼 말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부를 다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그러니까 당연히 만들어 낸 거구나 싶은데. 어쨌든 읽다 보면 그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도록 쓰여 있습니다.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하신 것 같고요.

『슈뢰딩거의 삶』은 최근에 읽었어요.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대단히 충격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다른 분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슈뢰딩거의 삶』에 대해서 그런 것도 염두에 두시면서 설명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생에 걸쳐 합일을 추구한 로맨티시스트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제 서평 제목이 ‘슈뢰딩거, 양자 및 여자와 함께한 삶’인데요. 물리학자가 쓰는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이 있잖아요? 제가 그걸 슈뢰딩거의 삶으로 치환해서 방정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래 파동 방정식에는 플랑크 상수가 들어가는데 여기서는 플랑크 상수 자리에 여자가 들어갑니다. 슈뢰딩거 삶의 상수.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여자가. 어딜 가나 안 빠지고. 번갈아서. 제가 세어 봤는데 이 책에 기록된 것만 10여 명 되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파동 함수로 미분을 취하는데요.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게 슈뢰딩거에게는 양자가 되겠죠. 슈뢰딩거는 파동 함수에 굉장히 독특한 의미를 부여해서 양자를 해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또 이 둘을 묶어 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무어가 보기에는 그게 슈뢰딩거만의 고유한 철학이라는 거예요. 그 뿌리가 인도 철학, 베단타 철학이고 무어는 베단타 철학에서 이 둘을 묶을 공통분모를 발견합니다.

아까 슈뢰딩거가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양자 개념이 불연속을 함축하는 것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생각했다고 했잖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입자를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았습니다. 물리학에서 입자는 서로 분리되어 개체성을 가진 존재인데 그는 입자마저 파동, 연속적인 전파에서 잠깐 솟아오른 일종의 물방울. 같은 파동 속으로 곧 사라지고 마는 파동의 한 모습 정도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무어가 보기에 이 해석은 우리의 개체적 영혼과 자아 개념을 부정하는 베단타 철학과 이어집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절대 정신의 구성물이고 실재하는 건 모두를 아우르는 절대론적 하나일 뿐이라는 베단타 철학의 부정과 개체성을 가진 입자 대신 파동으로만 세상을 파악하려고 했던 슈뢰딩거 물리학의 부정에서 유사성이 보인다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화려한 여성 편력도 그가 여성을 통해서 자아가 부정되는 합일의 체험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평생토록. 그래서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박상준(사회자): 부인이 둘인 것도 모자라서 두 부인하고 한집에 살았죠. 긴밀한 관계를 맺은 여성만 10명이 넘고. 우리하고는 수준이 다르죠. 그래서 좀 충격적이었고 놀랐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의 상대가 물결처럼, 파동처럼 가는데 그중에서 몇 명이 올라오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보다. 이런 생각을 지금 했습니다.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웃음)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그건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박상준(사회자): 해석을 말씀해 주시니까. 두 물리학자가 양자 역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우리가 읽으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대립하는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 이런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첫 번째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일반인도 알고 있는 게 운동량과 질량 이 두 가지를 양자 차원에서는 동시에 확정할 수 없다. 질량을 확정하면 운동량을 정할 수가 없고. 역으로도 마찬가지. 이런 것을 불확정성 원리라고 한다는데 그걸 일반화하면 양자 차원에서는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로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주나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상욱 선생님부터 저희가 알아듣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세상은 ‘원래’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상욱(부분과 전체): 선생님 질문에 답을 드리면 양자적 현상에서 측정 행위가 측정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조건 맞고요. 어떤 해석을 택해도 뾰쪽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널리 퍼진 오해가 하나 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내놓은 제일 처음에 제시한 설명이 너무 유명해서요. 전자현미경 사고 실험인데 불확정성 원리를 우리말로 설명한 웹사이트를 보면 거의 그렇게 쓰여 있어요. 우리가 빛을 가지고 보는데 제가 여러분을 본다고 안 흔들리죠. 질량이 워낙 크니까. 그런데 전자나 중성자 정도 되면 질량이 굉장히 작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측정 도구인 빛조차 걔를 교란시켜 다른 곳으로 가서 알 수 없게 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을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그러다 나중에 취소합니다. 그걸 이제 설명해 드려야 하는데.

과학 이론을 가지고 무엇을 이해, 설명, 예측한다는 것에 우리가 두 가지 입장을 가질 수가 있어요. 하나는 세상은 원래 어떻게 되어 있는데 그게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론을 사용해서 필요로 하는 정보만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건 우리 책임이지 세상이 그렇기 때문은 아니에요. 대표적인 게 주사위예요. 주사위를 던지면 1이 나올 확률이 6분의 1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도 그것을 못 피하죠. 그런데 사실 주사위는 고전 역학적 계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위치와 운동량을 결정론적으로 가진 대상이란 말이에요. 여기서는 복잡계 이론……. 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아무튼, 원리적으로는 주사위를 내가 딱 들었는데 그걸 어떤 각도로 들었고 주사위 무게가 어떻고 튕길 때의 힘 이런 것을 다 알고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으면,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하는데 이러면 확률이 필요 없어요. 무슨 숫자가 나올지 정확히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악마가 아니거든요. 인식에 제한이 있는 인간이기에 확률을 사용하는 거예요. 주사위라는 계에는 확률이 없죠. 결과는 결정되어 있는데 그걸 알 방법이 없으니까 확률을 사용하는 거예요.

양자 역학에서 사용하는 확률을 쓰는 이유는 다릅니다. 양자 역학의 확률은 우리가 무식해서,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진짜 그렇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두 개 있어요. 10초 후에 얘는 붕괴하고 얘는 붕괴하지 않았어요. 왜 얘는 붕괴하고 얘는 붕괴하지 않았느냐. 거기에 대응하는 존재론적 사실이 없어요. 세상이 그런 거예요. 붕괴할 확률이 존재하는데 그냥 한쪽은 붕괴가 실현되고 다른 쪽은 안 돼요. 왜? 물으면 안 돼요. 그냥 그런 것이거든요. 그렇게 불확정성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섭을 하는 건 사실이에요. 빛이 쏘여지고 파동 함수가 변한다는 맞는데 원칙적으로 그것들은 무한히 작게 만들 수가 있거든요. 얘는 잘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몰라서 불확실해진다고 자꾸 인식론적으로 설명하는데, 물리학의 표준 해석이나 하이젠베르크가 최종적으로 견지한 입장은 “세상이 원래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며, 거기에 더해서 우리가 측정 과정에서 하는 요동이 작용한다.”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박상준(사회자): 책을 보면 슈뢰딩거는 하이젠베르크하고 계속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읽히는데요. 이정민 선생님께는 그런 불확정적인 측면,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슈뢰딩거가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슈뢰딩거가 고양이를 괴롭힌 진짜 이유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일단 불확정성 원리 자체는 양자 이론에서 수학적으로 유도되기 때문에 식 자체에 의문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과연 그것이 우리 세계에 무얼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원래 슈뢰딩거가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면 발생하는 문제를 보이려고 한 것이거든요. 이걸 파동 함수의 붕괴라고 하는데, 고양이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중첩된 상태에 있다가 여는(관측하는) 순간 고양이가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둘 중 하나로 갑작스럽게 바뀌는 거죠. 슈뢰딩거는 그런 관측은 고양이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슈뢰딩거는 기본적으로 파동 함수 프사이가 상자 안 고양이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동 함수는 대상 세계를 기술하는 관계에 있고 파동 함수가 어떻게 변해 갈지는 순전히 물리적인 상황으로 결정이 되어야지, 관측 행위가 변화를 가져와서 고양이가 죽지도 살지도 않고 있다가 갑자기 죽거나 살아 있는 식의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그는 보지 않았습니다.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런 변화가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관측자가 아니라. 상자를 열었다/열지 않았다 식의 뭘 알고/알지 못하는 것이 대상 세계, 파동 함수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박상준(사회자): 제가 사회자로서 책을 통해서, 그리고 두 물리학자를 통해서 양자 역학을 일반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했을 때 첫 번째로 말씀을 들어야 할 항목이 지금까지의 이야기였거든요.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자면 이런 거예요. 슈뢰딩거는 이른바 파동 방정식, 파동 함수로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어서 양자 역학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행렬 방정식을 이용해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요. 실제로도 한 해 사이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않습니까. 이 의미를 여쭙고 싶어요. 먼저 이정민 선생님께서 양자 역학 발전 과정에 슈뢰딩거가 파동 함수, 방정식을 통해서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방정식에 배신당한 슈뢰딩거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처음 슈뢰딩거가 파동 함수에 부여했던 물리적인 의미, 전자를 공간 속에 퍼진 물질 분포, 전자 밀도, 전자 확률 분포로 이해하려 부분은 결국 전자는 어느 한 군데에서 나타나던가 나타나지 않던가 둘 중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사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방정식이 남았죠. 파동 함수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나타내는 방정식이 남아서, 물리학자들은 슈뢰딩거가 거기에 부여하려고 했던 의미는 다 버리고 결과만 가지고 실험 결과를 해석합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를 해석할 때 파동 함수가 과연 거기서 어떤 일을 하느냐. 아까 이상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건데 거기에 어떤 간접적인 결과를 준다고 하는 거죠. 물리량이 여러 가지 있는데 위치, 운동량, 아니면 양자 이론에서 스핀 이런 것도 물리량이 되거든요. 이런 물리량을 측정해서 어떤 특정 물리량이 나올 확률을 파동 함수가 줍니다. 어떤 한 값이 나올 확률을 이야기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계산해서 알 수 있는 거죠. 파동 함수를 계산해서 나오는 ‘물리량에 대한 확률적 정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보른이나 나중에 하이젠베르크도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박상준(사회자): 그러면 하이젠베르크의 기여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우리가 말씀을 드린 게 어떤 수식, 수학으로 표현된 식이 있을 때 수식의 기능이 그걸 적용해서 우리가 해석하고자 하는 물리적 실제라든가 물리적 현상을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공식이 있을 수 있죠. 그런 공식의 의미는 대상의 어떤 본질이나 본성, 특성을 말해 주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이제 아닌 수식들도 있지 않습니까? 연구 대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수식이 아니라 특성을 읽어내는 여러 방편 또는 방법 중 한 가지로 활용되는 수식이 있는데. 행렬은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요?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을 쓸 때는 어떤 의미였는지. 슈뢰딩거가 처음 파동 함수를 만들 때에 대상의 실체를 읽어내는 것으로서 생각한 건지 아닌지를 포함해서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혹은 확률 이론이라는 게 양자 역학의 발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행렬 역학의 철학적 의의

이상욱(부분과 전체): 처음에 대조하신 두 가지가 과학 이론이 “어떤 게 있다.”라고 할 때 이걸 정말 ‘있는 것’으로 보고서 그것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실재론적 해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도구주의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얻고 싶은 정보를 알아내게 하는 하나의 장치. 실제로 그 대상에 정말 그런 속성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그렇게 볼 것인지에 관한 굉장히 역사 깊은 문제인데요. 어려운 점이 뭐냐면 개념적으로 과학 이론은 실재론적 해석과 도구론적 해석이 분명하게 구별되는데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이 정확히 어디 속하느냐고 물으면 간단하지가 않아요. 왜 간단하지 않느냐면 그게 시기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고요.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이 나오면 바뀌고요. 그다음에 하이젠베르크의 생각하고 지금 물리학자들이 하이젠베르크가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일단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상호 작용을 하면서 행렬 역학을 처음 만든 시기를 생각해 보면 단순히 문제만 풀겠다는 생각만 있지 않았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가졌던 문제는 스펙트럼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수소 원자가 빛을 쬐면 그 빛이 다 튕겨 나가면서 스펙트럼선이 나오는데 그 패턴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기존 이론으로. 데이터는 다 있어요. 데이터는 숫자들이죠. 뭐 하면 뭐가 나온다. 무슨 조작을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이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놓고서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하는 게 아니라 단절적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이에요. 기존 물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걸 고민하다가 나온 결과가 행렬 역학이에요.

행렬은 기본적으로 그냥 숫자를 곱해서 더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조작을 했다는 것에 대응되는 숫자들을 좍 쓰고요. 그 숫자들에 어떤 조작을 가하는 행렬을 곱해요. 그러면 나오는 결과가 스펙트럼선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를 보여 주는 거예요. 수학적인 조작 자체도 굉장히 단절적이죠. 숫자가 있고 숫자를 곱해서 더하면 실험 결과가 나와요. 이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슈뢰딩거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게 하이젠베르크에게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거예요. 어차피 세상은, 미시 세계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고 단절적인 세계니까 그 세계에 대해서 틀린 이야기를 안 하고서도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행렬 역학의 장점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구태여 원자가 어떻게 전자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이야기 하나도 안 하고도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기적처럼. 하이젠베르크가 행렬 역학을 발견할 당시에 행렬 역학이 하이젠베르크에게 도구적이었냐? 아니죠. 그때는 실재론적이었어요. 실제로 세계가 그렇다고 믿었던 거죠. 정확히 이야기하면 물리학 이론은 이래야 한다고 믿은 거예요.


박상준(사회자): 제가 질문을 다시 드리면요. 행렬 역학을 낳게 된 하이젠베르크의 의도라든가 태도는 분명히 실재론적인 측면에서 수학을 계속 탐구한 거라고 이해가 가는데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행렬이라는 수학 자체가 무언가를 실체적으로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수학인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겁니다.



이상욱(부분과 전체): 이제 그다음 이야기인데요. 그게 바뀌거든요. ‘보른 해석이 들어온 다음’부터 물리학자는 대부분 도구주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해요. 그게 코펜하겐 해석의 보편적인 설명이 되고.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지금 선생님 질문하신 것의 답변인데 행렬을 곱하잖아요. 컴퓨터로 치면 집어넣고 결과 나오고 그 중간은 그야말로 블랙박스인데 이걸로 무슨 실재론적 해석이 가능하냐고 물으신 거잖아요? 그 점에 대해서 반박을 한 게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 설명하면 실재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도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여태까지 익숙해져 있는 뉴턴 역학에 기반을 둔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죠.

“‘물리 이론은 반드시 시공간의 과정을 기술해야지 만족스러운 물리 이론이고 실재론적 해석이지 처음하고 끝만 주면 제대로 된 물리 이론이 아니다.’ 라는 해석 자체가 잘못이다.” 이렇게 그들은 만족스러운 물리 이론 자체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어요. 적어도 초반에는. 그런데 슈뢰딩거의 대안적 해석이 나오죠. 워낙 자만심이 강해서 하이젠베르크도 이 책에는 안 쓰지만, 그가 깨달은 게 뭐냐면 내가 주장하는 존재론적인 해석이 유일하게 맞는다고 볼 근거는 없구나. 왜? 그것과 수학적으로 동등하면서 파동이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한데 어느 주장이 맞느냐. 그건 알 수가 없거든요. 수학적으로 어차피 똑같이 나오니까. 그래서 하이젠베르크가 물러서기 시작해요. 점점 더 불가해성을 강조해요. 모른다. 미시 세계는 우리가 모르고 알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정통적인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게 있거든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냥 파동 함수를 구한 다음에 그걸 제곱해서 그것이 측정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률만 준다. 그게 이제 도구주의적 해석의 대표격인데 그 해석으로 후퇴하는 거죠. 지금은 하이젠베르크나 보어가 초창기부터 도구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처럼 알려졌는데 그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슈뢰딩거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기진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를 이깁니다. 우리가 양자 역학으로 계산할 때 하이젠베르크 방식을 안 써요. 양자 역학 교과서는 다 슈뢰딩거 방식을 쓰죠. 하이젠베르크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긴 했는데 자기의 직접적인 연구 결과 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건 사실 별로 없어요. 그에 비해서 슈뢰딩거는 자기 방정식에 배신당했을지는 몰라도 이 사람의 서술 방식은 물리학 교과서의 표준이거든요. 세상은 공평한 거죠.



두 대담자가 본, 거장들의 서로 다른 인생관

박상준(사회자): 양자 역학에 관한 학술적인 면은 이제 일단락 짓고요. 약간 방향을 틀어서 나이는 다르지만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잖아요? 잠시 나왔지만 이때가 역사적으로 나치가 등장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슈뢰딩거는 아일랜드 가서 피신하다시피 살았죠. 반면에 하이젠베르크는 주변에서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권유해도 그렇지 않고 끝까지 남았단 말입니다. 그런 것 관련해서 과학과 국가……. 사회가 되겠죠. 과학과 현실, 또는 정치적인 현실 관련해서 두 과학자의 삶에 차이가 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이정민 선생님께서 하이젠베르크의 삶에 어떤 느낌이 있으신지. 또 이상욱 선생님께서는 슈뢰딩거에게 어떤 느낌이 있으신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정치 현실과 관련된 부분에서 아까 이상욱 선생님도 지적하셨는데 보어를 방문하는 장면이 굉장히 짧게 되어 있는데요. 보어의 기록이 하이젠베르크하고 일치하지 않는 게 보어가 기억하는 하이젠베르크는 전승국의 과학자로 의기양양했다는 거죠. 이미 독일이 이긴 전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과연 이 시점에서 피지배국이 된 덴마크 같은 나라의 과학자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고 보어는 굉장히 위협처럼 생각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순전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보어를 방문했다고 하죠. 제 생각으로는 보어의 느낌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정치적인 부분에서, 특히 철학에서도 그런 게 드러나는데 기회주의적인 부분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어떤 시점에서 굉장히 민첩한 판단을 하는데 그 판단이 전체적으로 일관된 무엇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약간 시류에 편승한다고 하는 느낌. 양자 역학의 해석에서도 하이젠베르크는 뭔가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분명히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욱(부분과 전체): 이정민 선생님 지적이 재미있는데요. 저도 동의하고요. 정치적으로 문제가 안 되는 선에서 이야기하자면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인이죠. 보어가 그 장에서 독일의 단점으로 철저한 복종,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 같은 걸 언급하는데 하이젠베르크에겐 그게 안 보입니다. 독일의 장점만 보이는 거죠.

그런 면에서 슈뢰딩거도 전형적인 빈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 초 빈이라는 곳이 굉장히 독특한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조들이 거기서 다 나왔고요. 철학적으로도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철학이 태어난 곳이거든요. 과학적 이론의 본성이 뭐냐. 실재론. 도구주의.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철학적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빈 서클입니다. 그런 지적 분위기에서 철저한 빈 시민으로 태어나서 교육받고 빈식으로. 아까 충격받으셨다는 것도 우리 기준으로 보거나 하이젠베르크 기준으로 보면 펄쩍 뛸 노릇인데 빈 기준으로 보면 뭐……. 이건 폄하가 아닙니다. 당시 인텔리겐치아들의 삶이라는 게 굉장히 자유분방했었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자 역학이 교란하고 또 교란받은 것

박상준(사회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 드리겠습니다. 양자 역학이 물리학, 혹은 과학 분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 또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다면 뭐가 있을지 혹시 생각나시는 것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이정민(슈뢰딩거의 삶): 보어 이야기를 해 볼게요. 보어가 상보성이란 아이디어를 양자 이론에서 발전시켰는데 상보성이란 뭔가 겉으로는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세계를 더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한 쪽도 버릴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는 두 생각을 이야기하는데요. 보어는 이걸 양자 물리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더 폭넓은 인간 사고 유형에 적용시켜서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우리가 친숙한 문화를 통해서만 볼 게 아니라 우리와 전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화를 통해서 인간을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문화들 사이의 관계도 상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양자 이론이 세계에 대해서 도를 터득하는 식의 그런 학문은 아니지만, 양자 이론을 통해서 체득한 인식이라고 해야 하나? 깊이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보통의 인문학과는 다른 나름의 통찰을 부여해 주는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과학이 그런 방식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상준(사회자): 저는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문화를 연구하는 문예학적 측면에서 보면 20세기 전기에 19세기까지와는 전혀 다른 문화 경향이 생겨납니다. 바로 모더니즘 운동인데 물론 세밀하게 보면 복합적입니다. 시기를 세밀하게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없어요. 아방가르드, 전위주의 예술들은 1910년쯤 해서 다 생겨나고요. 코펜하겐 해석이 나오기 전부터 그런 운동이 있긴 했는데 어쨌거나 큰 틀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문화 예술이 양자 역학적 사고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선형주의적인 사고, 결정론적 사고, 역사주의적인 사고를 버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다른 많은 요인이 있어요.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과학이 여타 다른 분야의 학자, 예술가, 지식인 들에게 미친 영향을 인정하는 데 우리가 인색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 끝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생각만 해도 어렵고 머리가 아픈 양자, 양자 역학,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런 어마어마한 주제들을 두 시간 동안 두 분 선생님의 명쾌한, 그리고 단순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강압적이지만 의미 있는(웃음) 설명을 통해서 우리 이해가 한 겹을 깨고 한 단계 더 나아간 것 같아요. 소중한 시간을 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귀한 시간 들여 서평과 대담을 해 주신 두 대담자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박수)

 


숨 가쁜 1년간의 여정을 결산하는 자리에 걸맞게, 8월 책 대 책 대담회는 대담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수준 높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자신의 철학적 입장은 잠시 접고서 기꺼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견해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은 두 과학철학자와 사회자는 과학과 철학, 사회,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풍요로운 향연을 청중에게 베풀었다.


양자 역학의 선구자인 두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서평 소개 글의 제목이기도 한 행렬과 파동, 즉 단절과 연속이다. 그러나 슈뢰딩거가 자신이 생각했던 파동 방정식의 원래 의미와 ‘단절’되고 하이젠베르크가 나치라는 시대상황에 ‘결합’하는 과정, 고전 물리학과 단절을 꾀했지만 모더니즘 예술에 영향을 준 양자 역학 등 단지 과학 설명에만 머무르지 않은 두 시간의 대담 속에서 청중들은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되새겼고, 세계에 대한 해석인 양자 역학이 그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를 낳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비단 과학과 타 분야만이 아니라 과학 분과 내에서도 단절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연속성을 회복할 실마리가 양자 역학의 철학적 함의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담자의 발언과 함께 8월 대담회는 앞으로 ‘책 대 책’이 연결해 나갈 새로운 지평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9월 '책 대 책'은 『LHC, 현대물리학의 최전선』 VS 『신의 입자를 찾아서』입니다. 보통 세 번째 화요일에 했습니다만, 일자가 살짝 바뀌었습니다. 9월의 대담은 9/20(목)입니다. 대담회 신청 페이지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