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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파괴자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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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파괴자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Editor! 2016. 8. 10. 09:25

8월 9일 어제는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지 7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팻 맨(뚱보)라는 이름의 원자 폭탄은 군수 공장이 있는 나가사키 산업 지대 상공 439미터 지점에서 폭발했고, 4만 또는 7만 명 정도의 사람이 즉사했고, 그해 말까지 8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히로시마의 14만 명까지 합하면 모두 21만 명의 생명이 원폭 단 두 발 때문에 희생됐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3분의 1, 즉 7만 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지난 5월 27일,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해 원폭 희생자를 포함한 전쟁 희생자를 기렸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 평화 공원 구석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이강영 경상대 교수의 『불멸의 원자』에서 글 한 꼭지를 가져와 소개합니다. 핵물리학자의 성취와 그들의 성취가 야기한 참상을 교차 편집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글입니다. 올 여름 히로시마에 가고 싶게 만드는 글입니다.


세상의 파괴자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71주기를 기리며


1996년 여름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 주최로 대만의 중국 아카데미(Academia Sinica)에서 입자 물리학 여름 학교가 열렸다. 참가자 대부분은 나와 같은 동아시아의 젊은 과학자들이나 대학원생이었고, 여름 학교의 주제는 양자 색역학(QCD)이었다. 그런데 8월 6일 러시아에서 온 이고리 드레민 교수의 강의에서 인상적인 일이 있었다. 드레민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가 잠시 일어나서 묵념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51년 전 오늘,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이 폭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물리학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함께 망자들을 추모할 것을 제안합니다.”

물리학을 공부한 지 10년이 넘었었지만, 나는 그 전에는 한 번도 8월 6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러더퍼드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원자의 내부를 탐구하는 도구는 알파선이었다. 그들은 알파선을 원자에 쏘아 양성자를 발견하고, 인공적으로 방사성 동위 원소를 만들었으며, 원자를 다른 원자로 바꾸는 현대판 연금술을 이루어 냈다. 1932년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은 양성자와 질량은 거의 같지만 전기적으로 중성이며, 원자핵을 이루는 또 다른 요소인 중성자를 발견했다. 중성자가 발견됨으로써 양성자와 중성자로 모든 원자핵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비로소 인간이 원자핵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스 베테는 이에 대해 “1932년 이전은 핵물리학의 선사 시대고, 중성자가 발견된 이후부터 핵물리학의 역사가 시작된다.”라고 표현했다.

로마 대학교의 엔리코 페르미는 새로운 동위 원소를 만들 때 알파선보다 중성자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에 착안했다. 알파선은 양의 전하를 가지고 있어 다른 원자핵과의 사이에 전기적인 반발력이 있지만, 중성자는 전하가 없으므로 그런 반발력 없이 원자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험을 하는 도중에 페르미는 중성자의 속도가 느리면 핵반응이 훨씬 잘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파선은 전기적인 반발력을 이겨야 하므로 빠른 속도로 충돌할수록 핵반응이 잘 일어나지만, 반발력이 없는 중성자는 느릴수록 원자핵과 만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중성자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은 수소 원자에 충돌시키면 된다. 수소 원자핵은 중성자와 질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구공이 벽에 충돌하면 튀어나와도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지만, 질량이 같은 다른 공과 충돌하면 속도가 확 줄어드는 것과 같다. 

페르미의 연구 팀은 속도를 늦춘 중성자를 가벼운 원자부터 체계적으로 충돌시키면서 방사능 현상을 관찰했다. 특히 중성자가 우라늄에 충돌하자,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반감기를 가진 방사능 현상이 만들어졌다. 페르미는 이를 우라늄보다 원자 번호가 더 큰 초우라늄 원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방사성 원소의 존재를 증명하고 느린 중성자에 의한 관련 핵반응을 발견한” 업적으로 페르미는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2005년 여름에 히로시마 대학교를 방문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연구하다가 주말에 히로시마 시내를 구경했다. 히로시마 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원폭 돔과 평화 공원이다. 시 가운데를 흐르는 오타 강이 히로시마 현청 옆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사이에 있는 섬에 원폭 투하를 기억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평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의 동쪽 강 건너편에, 원자 폭탄이 폭발했을 때 파괴된 채로 남겨둔 원폭 돔이 있다.


페르미의 실험 이후 중성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핵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핵물리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이 분야에서 앞서 나간 것은 독일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팀과 파리의 졸리오퀴리 팀이었다. 그들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서 페르미가 얻은 결과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방사성 원소들을 찾아냈다. 다음 단계는 얻어 낸 동위 원소들을 화학적으로 추출하는 것이었는데, 한과 슈트라스만은 바로 그런 작업에 익숙한 화학자였다. 그러던 중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오스트리아 국적의 유태인인 마이트너는 독일을 탈출해야 했다. 마이트너를 보내고 우라늄에서 방사성 동위 원소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계속하던 한과 슈트라스만은 페르미가 노벨상을 받은 일주일 후인 12월 17일에 역사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우라늄으로부터 원자 번호가 56번인 바륨을 분리해 낸 것이다. 우라늄의 원자 번호가 92번이니까, 이는 원자가 거의 절반으로 쪼개졌음을 의미한다.

그때까지의 핵반응은 알파선이나 양성자에 의해서 한 원자핵이 원자 번호가 비슷한 다른 원자핵으로 변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런 현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은 이 결과를 마이트너에게 급히 편지로 알렸다. 이론 물리학자인 그녀는 보어 연구소에 있던 조카 오토 프리슈와 함께 숙고한 결과 우라늄은 너무 커서 사실상 불안정한 원자핵이기 때문에 중성자에 의해 쪼개질 수 있음을 알아냈다. 주목할 것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200메가전자볼트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화학 반응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원자 하나당 기껏해야 5전자볼트 정도이므로 200메가전자볼트는 엄청난 에너지다. 마이트너는 이 에너지가 원자들의 질량 차이에서 오며,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그대로, 바로 E=mc2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사실 페르미의 실험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일은 우라늄이 중성자로 인해 쪼개져서 바륨과 크립톤으로 분열된 것이었다. 그러나 에너지가 크지 않았으므로 바륨과 크립톤의 원자핵은 서로 묶인 상태로 존재했고, 이것을 페르미는 새로운 초우라늄 원자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페르미가 틀렸던 드문 경우 중 하나였다.


엔리코 페르미와 레오 실라르드의 원자로 특허 출원 자료.


원폭 돔은 원래 1914년에 건설된 히로시마 물산 기념관이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4분,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에서 투하한 ‘꼬마’라는 이름이 붙은 우라늄형 원자 폭탄이 물산 기념관 근처의 상공 600미터에서 폭발했다. 당시 35만 명 정도였던 히로시마 시민 중 약 7만 명이 폭발 때 즉사했고 그해가 가기 전에 16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암과 백혈병 등으로 사망한 사람을 1950년까지 추산하면 사망자는 20만 명이 넘는다고도 한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인 물산 기념관은 핵무기를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뜻으로 폭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고 ‘원폭 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폭 돔은 1996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원자의 목록을 들여다보자. 원자를 결정하는 것은 원자 번호와 원자량이라고 하는 두 개의 숫자다. 원자 번호는 원자핵 안에 들어 있는 양성자의 개수로서 원자의 화학적 성질을 결정한다. 원자량은 원자의 상대적인 질량으로서, 원자핵 안에 들어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를 합친 수에 가깝다. 

원자 번호 순으로 원자 번호와 원자량을 써 보자. 1번인 수소는 원자 번호가 원자량과 같다. 즉 수소의 원자핵이 곧 양성자이고 중성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원자 번호가 작은 원소들은 원자량이 원자 번호의 약 2배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가 거의 같다. 원자 번호가 커질수록 이 차이는 조금씩 벌어진다.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의 경우에는 원자 번호가 92이고, 원자량이 238과 235인 두 가지 동위 원소로 존재하므로, 92개의 양성자에 146개 혹은 143개의 중성자가 있는 것이다.

우라늄 원자가 분열해서 바륨과 크립톤이 되었다면, 바륨과 크립톤에 있는 중성자는 각각 81개와 48개이므로, 17개 혹은 14개의 중성자가 남는다. 그러면 남는 중성자는 원자 밖으로 방출된다. 중성자가 옆에 있는 다른 우라늄 원자들에 부딪히면 다시 더 많은 원자핵이 분열을 일으키고, 그러면 다시 더 많은 중성자가 방출된다. 이와 같이 핵분열 반응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연쇄 반응이라고 한다. 원자핵 분열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면 인간의 역사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다.


평화 공원에는 평화 기념 자료관을 중심으로 숲 속 곳곳에 사망자를 위한 위령비, 평화의 종,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가 기증한 종이 달린 원폭의 어린이 상 등 여러 기념물이 있다. 그중 나의 눈을 끈 것은 커다란 거북 등에 놓인 비석이었다. 비석의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韓國人原爆犧牲者慰靈碑).”


놀랍게도, 지금까지의 이야기, 즉 중성자로 원자핵을 부수고, 여분의 중성자가 나와서, 연쇄 핵반응이 일어나면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심지어 원자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페르미가 실험을 하기도 전에 먼저 상상했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유태계 헝가리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다. 1898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고 베를린에서 공부한 실라르드는 물리학자면서 발명가이자 몽상가였고 매우 독창적이면서 특별히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던 실라르드는 부다페스트에서는 쿤 벨러의 사회주의 정권에 몰두했었고,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 시절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발명 특허를 내기도 했다.

특유의 민감함으로 유태인 탄압의 조짐을 감지한 실라르드는 일찌감치 독일을 탈출해서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중성자를 이용한 원자핵 분열의 연쇄 반응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1933년 9월 12일 망명지인 런던의 거리를 걷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라르드는 자신의 생각을 실험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대신 그 아이디어의 특허를 출원한다. 실라르드의 특허 출원서는 페르미가 막 실험을 시작할 무렵인 3월 12일에 접수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실라르드는 페르미와 함께 우라늄이 분열할 때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여분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실라르드는 이어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의 가능성을 알리는 편지를 쓰도록 아인슈타인을 설득했다. 그러므로 원자 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첫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바로 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39년 새로운 폭탄 이야기는 루스벨트의 귀에 들어갔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과학적, 기술적, 정치적, 군사적 고려가 거듭된 끝에 1942년 9월 이 계획의 총책임자로 육군 공병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가 선임되면서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준장으로 승진한 그로브스는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버클리의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택했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좋아하는 뉴멕시코의 로스 앨러모스를 연구소 부지로 추천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45년 히로시마 현에는 약 10만 명의 조선인이 징용 노동자로, 혹은 군인이나 군속, 일반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원자 폭탄로 인해 죽은 사람의 열 중 하나는 조선인이었다. 무려 2만 명 가까운 조선인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을 수습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은 해방을 맞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심지어 남쪽 정부는 일본과 국교까지 다시 맺었지만, 조선인 원폭 희생자에 대해서는 수십 년간 일본 정부는 물론 해방된 나라의 남쪽도 북쪽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민단 히로시마 본부에서 이 위령비를 세운 것은 1970년에 이르러서다.


폭탄의 완성이 다가오면서 플루토늄형 폭탄의 시험이 계획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계획을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라고 이름 붙였다. 1945년 7월 16일, 로스 앨러모스에서 남쪽으로 33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폭탄이 폭발했다. 테스트 현장에서 폭발의 섬광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일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다음 구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제 나는 죽음,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이는 인간의 힘이 스스로를 멸망시킬 만큼 커졌음을 상징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날 이후 인간은 원자핵에서 나오는 ‘힘’을 어떻게 인간의 삶과 조화시킬 것인가를 두고 고민해 왔고, 스리마일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거쳐 아직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고 있다.


매년 8월 5일 히로시마 평화 공원의 위령비 앞에서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핵에 의해서 일본인 다음으로 많이 희생된 사람은 한국인이다.


히로시마 평화 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이 글은 『불멸의 원자』 3부 입자 전쟁 '세상의 파괴자' 편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물리학과 물리학자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분은 이강영 교수님의 물리학 에세이 『불멸의 원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멸의 원자』 [책 자세히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