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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연재/(完) 비행기, 역사를 뒤집다

1. 붉은 남작 날아오르다

Editor! 2017. 6. 5. 10:18



1. 붉은 남작 날아오르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낸 전장은 5개다. 땅, 바다, 하늘, 심해, 우주. 육지와 바다에서의 전투는 수천 년간 이어졌지만, 하늘이 전쟁터가 된 것은 불과 100년이다. 최초의 공중전은 우발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행기는 정찰기로 활약했다. 항공 정찰은 그때까지 나온 모든 정찰 수단 중 가장 정확하고 빨랐다. 이렇게 되자 각국은 상대방 정찰기를 격추하겠다고 나선다. 처음에는 권총이 등장했고, 좀 더 시간이 흐르자 후방석에 보병용 기관총을 거치해 발사하거나 날개 위에 기관총을 장착해 발사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투기의 개념은 비행기에 기관총을 얹어 놓은 형태였다. 그러다가 독일의 포커 아인데커(Fokker Eindecke) 전투기가 등장하게 된다.  


포커 아인데커 프로펠러 뒤에 장착된 기관총 때문에 공중전의 역사가 뒤바뀐다. 


공중전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싱크로나이즈드 기어(synchronized gear)를 장착한 이 단엽기(독일어로 Eindecke)는 연합국 항공기들을 ‘학살’했다. 싱크로나이즈드 기어. 올림픽 수영 종목을 연상케 하는 이 단어가 현대 공중전의 시작을 알렸다. 실상을 따져보면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항공기의 비행 축선에 조준선을 일치해서 기관총을 쏘면, 명중률은 올라갈 것이다.” 당시 비행기는 전방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다. 그대로 기관총을 쐈다가는 프로펠러가 박살나 적기를 격추하기 전에 먼저 추락할 것이 뻔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동조 장치다. 엔진 샤프트에 캠을 장착하여 프로펠러가 기총 앞에 오면 발사를 중지시킨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해 낸 것은 프랑스였지만, 완성한 것은 독일이었다. 싱크로나이즈드 기어 덕분에 공중전의 양상이 뒤바뀐다. 공중전은 상대방의 꼬리를 무는 ‘꼬리 물기 싸움’이 됐다. 도그파이트(dog-fight, 접근전)와 데드 식스(Dead six, 죽음의 6시, 자신의 꼬리 방향)의 등장으로, 상대방의 6시 방향을 잡기 위한 도그파이트의 시작이었다. 


포커 아인데커(E. IV) 조종석. 


이렇게 되자 비행기 설계 개념이 ‘선회’로 집중된다. “항력 대신 양력”이라고 해야 할까? 항력(drag)이란 물체가 유체 내를 움직일 때 이 움직임에 저항하는 힘, 즉 ‘저항’이다. 그렇다면 양력(lift)이란? 물체의 주위에 유체가 흐를 때 물체의 표면에서 유체의 흐름에 대해 수직 방향으로 발생하는 힘을 의미한다. 공기를 가르면서 떠오르는 ‘부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엔진의 성능이 고만고만하기에, 저항으로 인해 속력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양력을 최대한 얻으면 전투에 유리해진다는 판단에 너나 할 것 없이 날개를 하나 더, 또 하나 더 달려고 노력했다. 복엽기, 삼엽기가 등장하게 된 이유다. 구조 기술이 아직 덜 발달해 날개 한 장만으로는 날개에 걸리는 힘을 버틸 수 없었기에 나온 고육지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빨리 더 안정적으로 공중제비를 돌 수 있는 능력’이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포커 Dr.1(Fokker Dreidecker)이다.


포커 Dr.1. 새빨간 3층 날개 덕분에 3배 빠를 것 같지만 오히려 속도는 약간 느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공중전을 떠올리면 제일 첫머리에 올라갈 그 이름 ‘붉은 남작(Der Rote Baron)’!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은 남작가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관총이 등장하고 전쟁이 참호전으로 흘러가자 기병이 전선에 나설 기회가 사라졌다. 결국 기병을 포기하고 정찰기에 올라탄 그는, 적군 정찰기를 격추하며 본격적인 전투기 조종사로 나선다.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비행기를 포함해 부하들의 비행기까지 온갖 원색을 동원해 칠했다.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요즘 세상에서도 저시인성(Low-observable) 도장이라고 군용기를 무채색 계열로 도장해 최대한 발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안가는 행동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레이더가 없어 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적이 자신을 발견해 덤벼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 자신을 ‘미끼’로 적을 교전으로 끌어들여 격추시키겠다는 각오였다. 당시 공중전은 중세 기사도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했다. 전장 환경 자체가 1대1 대결을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전투기 파일럿들 중 상당수가 귀족 출신이었기에 이들 스스로 ‘하늘의 기사’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하늘에서 조우했을 때 서로 인사하고 공중전에 들어가기도 했고, 처음부터 결투장을 보내 1대1 공중전을 치르기도 했고, 심지어 격추한 적군을 애도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제1차 세계 대전의 낭만이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다. 1대1 공중전이 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온갖 ‘사기’가 난무하게 된다. 1대1 격투를 하겠다고 결투장을 날린 다음 집단으로 날아가 덮치기도 했고(미끼 한 대는 하늘에 있고, 나머지 비행기들은 구름 같은 곳에 숨어 있는 방식) 비행기의 진행 방향을 착각하게끔 얼룩말 도장을 한다거나 하는 ‘실용주의’가 하늘을 뒤덮게 된다. 낭만보다는 승리가 중요했다고 해야 할까?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1892~1918년). ‘젊은 귀족’, ‘잘생긴 외모’, ‘하늘의 기사’, ‘세계 최고의 격추 기록’ 등 이야깃거리는 넘쳐났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 남작’은 낭만주의 시대의 끝판왕이었다. 어느새 새빨간 포커 삼엽기는 연합국 파일럿들의 공포의 대상이 됐고, 아군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의 인기는 군대를 넘어서 독일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 이들이 줄을 섰다. 훗날 전투기 파일럿의 필독서가 된 그의 자서전은 개인 신상 이야기보다는 초창기 공중전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은 독일 국민의 필독서가 되었고 그의 엽서에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독일의 모든 전선에서 그의 붉은 기체를 볼 수 있었다. 독일군 사령부는 붉은 남작과 그의 부대를 전술 예비대로 편성, 위급한 전선으로 투입 불을 끄는 소방수로 사용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날아다니는 서커스단(Flying Circus)’이다. 격추 기록은 급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위급한 전선에 투입된다는 것은 적과 마주칠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이유가 아닌가? 그의 격추 기록은 80기까지 치솟게 된다(비공인 격추까지 합하면 100대가 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영웅도 인간이었다. 전쟁의 판세가 독일의 패배로 기울던 1918년 4월 21일 그는 지상으로 떨어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에이스가 격추당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격추했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붉은 남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들 중 이날 붉은 남작 근처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자신이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에이스로서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찬란한 붉은색의 향연.


그는 죽었지만, 그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고 해야 할까? 수많은 오타쿠를 양산해 냈던 ‘기동전사 건담’의 샤아 아즈나브르.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인 자쿠. 일반 자쿠보다 3배 빠른 이 자쿠는 누가 봐도 붉은 남작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붉은 돼지」는 아예 대놓고 붉은 전투기로 창공을 가른다. 제1차 세계 대전 최고의 에이스이자, 낭만주의 시절의 ‘하늘의 기사’는 지금도 하늘을 날고 있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28쪽에서 포커 전투기를 직접 확인하자. 


『비행기 대백과사전』 28-29쪽.





펜더 이성주

《딴지일보》 기자를 지내고 드라마 스토리텔러, 잡지 취재 기자,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SERI CEO 강사로 활약했다. 민간 군사 전문가로 활동하며 『펜더의 전쟁견문록(상·하)』와 『영화로 보는 20세기 전쟁』을 썼다. 지은 책에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1』, 『글이 돈이 되는 기적: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 『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아이러니 세계사』, 『역사의 치명적 배후, 성』  등이 있다.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지방으로 이사해 글 쓰는 작업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