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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비행기, 역사를 뒤집다

3. 제로, 해전의 역사를 바꾸다

Editor! 2017.06.19 17:43


3. 제로, 해전의 역사를 바꾸다



1905년 5월 27일, 일본 연합 함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멸한다. 역사에 ‘쓰시마 해전’ 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 한 번의 전투로 전 세계 해군은 거함거포주의(巨艦巨砲主義)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빠져든다. 큰 전함을 만들고, 여기에 커다란 대포를 얹는다는 단순한 생각이다. 세계 열강은 커다란 전함을 만들겠다고 덤벼들었다. 이 건함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각국의 경제 지표를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건함 경쟁이 절정에 이르던 1921년  일본은 국가 예산의 30퍼센트 이상을 전함 건조에 투입했던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 야마토 박물관에 있는 10분의 1 모형

  

러일 전쟁은 시작 전부터 러시아의 압승을 예측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영토, 국력, 전력(戰力), 공업 생산력, 인구 등등 일본은 어느 것 하나 러시아를 압도할 만한 수치가 없었다. 그러나 뤼순 요새에서 러시아 극동 함대를 박살낸 후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 함대를 격멸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단 한 번의 해전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함대결전사상에 경도된 일본은 이 함대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전함’은 오늘날의 핵무기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무기 체계였다. 이러다 보니 각국은 이 건함 경쟁을 멈추기 위해 군축 회담에 나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축 조약으로 평가받는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의 등장이다. 


거함거포주의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야마토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1945년 오키나와 근해에서 격침됐다.


건함 경쟁을 잠시 멈췄다 하더라도 전함이 해전의 중심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지 않았다 뿐이지, 저마다 기존 전함을 개조하고 조약 밖에 있는 다른 함정들을 건조하거나, 전함을 대체할 다른 보조 전력들을 찾게 된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항공 모함이다. 기존 전함이나 순양전함을 더 보유할 수 없게 되자, 건조 도중에 항공 모함으로 개조하거나 조약을 피해 (1만 톤급 이하는 보조함 취급을 받기에 9,700톤에 맞춰 만드는 등)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만들어진 항공 모함이 훗날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항공 모함이 있으면, 이 항공 모함에 탑재할 전투기가 필요하다. “항공 모함의 무기는 갑판이고, 이 갑판에서 날아오르는 전투기가 항공 모함의 전투력이다.” 항공기 없는 항공 모함은 기름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세계 최고의 함재기와 파일럿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었다. 중일 전쟁으로 충분한 실전 경험을 한 일본 해군 항공대 파일럿들은 당대 최강의 전투기 중 하나인 0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를 타고 있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이(10,939대) 생산된 전투기이자 스스로 ‘동양의 신비’라고 추켜세우며 자랑하는 전투기로 오늘날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전래되고 있는 전투기, 바로 제로센(零戰)이다.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1903~1982년). 스물 네살에 도쿄 대학교 공학부 항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곧바로 미츠비시 사에 입사해 96식 함상전투기 설계에 뛰어들어 구시단좌전투기(九試単座戦闘機)에 역갈매기 날개를 채용하는 등 기발함을 발휘했다. 미츠비시 사는 30대 중반의 그에게 제로 전투기의 설계를 맡긴다.


항공 산업은 한 나라의 모든 기초 과학, 공학, 공업 기술, 산업 역량을 모두 집어넣어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의 집약체다. 전투기 개발은 어떤 의미일까? 과학기술의 결정체이자, 산업 역량의 총 집결체이다. 일본의 전반적인 공업 기술 수준을 감안한다면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제로센은 미스터리다. 


1. 고도 4,000미터에서 270kt(시속 500킬로미터) 이상이며 현재 세계 각국 전투기 가운데 최고 수준일 것

2. 고도 3,000미터에서 공칭마력으로 1.2~1.5시간, 보조탱크를 장착하는 경우 1.5~2.5시간, 순항 속도로는 6시간 이상일 것

3. 공중전 성능은 96식 함상전투기와 동등하게, 상승력은 3,000미터까지 3분 30초 이내일 것


1937년 10월 일본 해군이 차기 함상전투기 개발을 나카지마 사와 미츠비시 사에 의뢰하며 내건 요구 조건은 일본 공업 수준이나 세계 각국의 항공 기술을 고려하면 무리를 넘어서 기적과도 같았다. 여기에 족쇄가 하나 더 붙어 제로센 52형의 엔진(나카지마 사카에-21 공랭식 성형 14기통)의 출력은 겨우 1,130마력이었다. 다른 열강의 전투기 엔진이 1,500마력급인 것을 고려한다면 망상 수준의 요구였으나 이 망상을 일본은 실현했다. 당시 제로 전투기의 설계 작업에서 제1순위는 중량 관리였다. “총 중량의 10만분의 1까지 중량을 철저히 관리한다.” 스미토모(住友, 오늘날의 신일본 제철)가 개발한 초초(超超) 두랄루민 덕분에 기체 강도는 유지하면서 경량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제로센은 출현 당시 충격적 병기였다. 이 공포는 미국이 신형 전투기를 전선에 투입하면서 사라졌지만 1944년 이후 가미카제로 산화하며 미군에게 새로운 공포를 안겼다.


동시기 유럽에서 맹활약하던 독일의 메서슈미트 Bf-109, 영국의 스피트파이어에 필적(항속력과 기동성에서는 오히려 압도)할 엄청난 전투기가 탄생한 것이다. Bf-109과 스피트파이어의 전비 중량이 각각 3,155킬로그램과 3,4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데 반해 제로센 52형의 경우 2,743킬로그램으로 채 3톤이 안 됐다. 미국이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새로이 등장시킨 F4U 콜세어(전비 중량 5,626킬로그램)와 P-51 머스탱(전비 중량 5,262킬로그램)과 비교하면, 밴텀급과 헤비급 정도의 체급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42년 우리 전투기들 중에 조종석에 방탄장갑을 장착한 비행기는 하나도 없었고, 특히 제로 전투기에는 미국 전투기에 흔히 달려 있는 자동 봉합식 연료 탱크가 없었다. 적기 조종사들은 얼마 안 가 50구경 기관총탄의 연사를 제로 전투기의 연료 탱크에 가하면 제로를 밝게 타오르는 불덩어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카이 사부로, 『대공의 사무라이』


태평양 전쟁에서 제로센을 타고 활약했던 사카이 사부로의 증언이다. 공인된 격추 기록만 28기나 되는 일본 해군의 에이스였기에 그의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 사카이 사부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국을 위해 제로센을 타겠냐는 질문에, “영전(零戰)을요?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답해 세간의 화제를 모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로센의 기동성(선회 능력)은 특기할 만한 성능이고, 그 장대한 항속력은 동시대 많은 군사전문가들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당시의 상식을 벗어난 스펙이었다. 그러나 이건 사카이 사부로의 증언처럼 방탄장갑이나 자동방루장치(연료 탱크에 구멍이 났을 경우 이를 자동으로 막아 주는 장치) 등과 같이 전투기로서 최소한의 기준을 포기한 결과였다.

항공 모함 USS 박서에 실린 P-51 머스탱


태평양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진주만 기습부터 시작해 종전까지 활약했던 제로센. 제로센의 등장과 활약으로 현대 해전의 주역은 전함에서 항공 모함으로 변화했고, 항공 모함 기동함대 전략이 완성됐다. 그러나 제로센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110~111쪽.


『비행기 대백과사전』 110~111쪽에 제로센과 메서슈미트 Bf 109G,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가 실려 있다.




펜더 이성주

《딴지일보》 기자를 지내고 드라마 스토리텔러, 잡지 취재 기자,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SERI CEO 강사로 활약했다. 민간 군사 전문가로 활동하며 『펜더의 전쟁견문록(상·하)』와 『영화로 보는 20세기 전쟁』을 썼다. 지은 책에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1』, 『글이 돈이 되는 기적: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 『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아이러니 세계사』, 『역사의 치명적 배후, 성』  등이 있다.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지방으로 이사해 글 쓰는 작업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행기 대백과사전』 [도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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