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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헤드의 「카 북」 읽기 (6) 포르셰 박사의 흔적 본문
자동차 저널리스트이자 DK 대백과사전 「카 북」의 번역자 중 한 분이시기도 한 류청희 선생님 - 메탈헤드란 닉네임이 더 친숙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 이 「카 북」에 등장하는 자동차 관련 이야기들을 들려드립니다.
'메탈헤드의 「카 북」 읽기' 6편 시작합니다.
* 본 연재는 마른모들의 Joyride (http://blog.naver.com/joyrd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메탈헤드의 「카 북」 읽기 (프롤로그) 자동차와 두근두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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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헤드의 「카 북」 읽기 (6) 포르셰 박사의 흔적
글 : 류청희(메탈헤드)
포르셰 박사의 흔적
20세기는 누가 뭐라 해도 자동차의 세기였습니다. 19세기 말에 탄생한 자동차는 경쟁을 통해 짧은 시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20세기의 이른 절반 동안 이미 세상의 모습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인류의 생활 양식을 가장 크게 바꾼 도구 중 하나가 되지요. 이처럼 자동차 역사의 가장 뜨거운 시기에서 가장 화려한 족적을 남긴 기술자로는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를 들 수 있습니다. 20세기 말에 세계 여러 자동차 전문가들이 ‘세기의 차(Car of the Century)’와 함께 선정한 ‘세기의 자동차 엔지니어(Car Engineer of the Century)’에 그의 이름이 오른 데에서도 그가 자동차 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의 이름은 ‘포르쉐(Porsche)’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외국어 한글 표기법을 따르면 ‘포르셰’가 됩니다.
포르셰라는 이름은 지금은 스포츠카 브랜드의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브랜드로서의 포르셰는 1948년에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아들인 페리(Ferry Porsche, 원래 이름은 Ferdinand Anton Ernst Porsche)가 세운 것입니다. 가문의 이름, 즉 성을 회사 이름으로 삼는 것은 서구에서는 흔한 일이죠. 그 덕분에 포르셰 가문은 자동차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페리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포르셰(이하 포르셰)는 자동차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엔지니어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워낙 오래 전의 일이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그의 업적을 『카 북』에 나온 차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습니다.
포르셰라는 이름이 자동차 역사에서 처음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1898년의 일입니다. 오스트리아(당시에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자동차 회사였던 야콥 로너 & 컴퍼니(Jacob Lohner & Co)에서 일하게 된 그가 새롭게 설계한 자동차가 매우 혁신적인 기술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 로너-포르셰’라고 이름 붙은 그의 자동차 설계는 그 후로 100년이 지나서야 현실적으로 실용화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시스템 로너-포르셰’는 좌우 앞바퀴 내부에 각각 하나씩 들어 있는 전기 모터로 움직이는 전기 자동차의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뒷바퀴에 구동장치를 더하는 것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4륜구동 방식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앞바퀴와 같은 전기 모터를 더하면 4륜구동 전기차가, 휘발유 엔진과 같은 내연기관을 더하면 4륜구동 하이브리드 카가 되는 것이었죠.
뢰너 포르셰 전기 자동차
이런 변형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전자는 1900년에 뢰너 포르셰 전기 자동차(『카 북』 298쪽. 원문에는 로너가 Löhner로 쓰였지만 o 위에 우믈라우트가 없는 Lohner, 즉 로너가 맞음)로, 후자는 1901년에 로너-포르셰 믹스테(Mixte)로 구현되었습니다. 특히 로너-포르셰 믹스테는 세계 최초의 휘발유-전기 하이브리드 카였습니다. 이 차는 당대에는 자동차와 관련해 등장한 수많은 실험적인 기술 중 하나로 치부되었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러 하이브리드 카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재평가되었습니다. 당대의 모터와 배터리 기술이 지금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빈약했고 대중화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혁신적인 개념과 기술만큼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모터를 바퀴 안에 넣는 인휠 모터(in-wheel motor) 구조가 갖는 장점은 지금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죠. 장점이 많은데도 여러 이유로 아직 널리 쓰이지 못하고 있는 기술 중 하나라는 점에서 포르셰의 혜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로너 시절에 만든 차들은 자동차 경주에서 여러 개의 속도 기록을 세우면서 좋은 성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로너는 마차 시절부터 유럽 여러 나라 왕실에 납품을 했고 로너가 있던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황실에서도 쓰였습니다. 로너-포르셰 역시 황실에 납품되어 황족이 애용했는데, 포르셰는 군 복무 기간 중에 제국 황실의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했는데(그 차를 그만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포르셰가 전담 운전기사로 일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나중에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불씨가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 피살됩니다.
오스트로다임러 프린스 헨리
이후 포르셰의 재능을 눈여겨본 오스트로-다임러(Austro-Daimler)는 1906년에 그를 스카우트해 기술 책임자 자리에 앉힙니다. 오스트로-다임러는 다임러의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든 오스트리아 회사로 다임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한동안 고틀리프 다임러의 아들인 파울이 기술 책임자로 일했고 포르셰가 그의 후임자였습니다. 이곳에서 포르셰는 모터스포츠를 통해 기술력을 입증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가 만든 경주차가 1910년에 열린 프린츠 하인리히 경주(영어 표현인 ‘프린스 헨리 트라이얼’로도 알려져 있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상위권을 독식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당시 상위권에 오른 차들의 원래 이름은 모델 27/80이었지만 경주 우승 덕분에 프린스 헨리(오스트로-다임러 프린스 헨리, 『카 북』 27쪽)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집니다.
오스트로-다임러에 있는 동안 그는 비엔나 공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의 이름은 물론 지금의 포르셰 회사 공식 명칭에도 들어가는 ‘Dr. Ing. h. c.’의 뿌리입니다. 스포츠카 회사인 포르셰의 공식 명칭은 ‘Doktor Ingenieur Honoris Causa Ferdinand Porsche Aktiengesellshaft’의 줄임말인 ‘Dr. Ing. h. c. F. Porsche AG’로, 굳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명예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 주식회사’가 되겠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S 36/220
1923년에 오스트로-다임러를 떠난 포르셰는 곧 메르세데스(Mercedes) 브랜드 차를 만들던 독일 다임러의 기술 책임자가 되는데, 이곳에서도 그의 능력은 모터스포츠, 즉 경주차를 통해 빛을 발합니다. 특히 포르셰는 엔진 크랭크샤프트의 회전력으로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압축해 출력을 높이는 슈퍼차저 기술을 더하는 것으로 성능을 높였고, 그 덕분에 다임러의 경주차는 여러 자동차 경주를 휩씁니다. 대표적인 예가 1924년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였습니다. 알파 로메오, 이스파노-스이자, 푸조 등 당대 유명 자동차 회사들이 내놓은 큰 배기량 엔진을 얹은 경주차와 달리 다임러의 메르세데스 경주차는 배기량이 훨씬 작은 2.0L 슈퍼차저 엔진을 얹었습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 경주차는 이들에 맞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해 뛰어난 성능을 입증했죠. 경주차뿐 아니라 메르세데스 승용차에도 한동안 포르셰 설계의 슈퍼차저 엔진이 널리 쓰이게 되는데, 1920년대 고성능 메르세데스를 상징하는 S, SS, SSK가 슈퍼차저 엔진을 쓴 대표적 모델들입니다. 그중 하나가 메르세데스-벤츠 S 36/220(『카 북』 38쪽)입니다.
메르세데스를 만들던 다임러와 벤츠가 1926년에 합병해 다임러-벤츠가 된 이후, 포르셰는 자신의 개발 철학과 회사의 방침이 크게 엇갈리자 회사를 떠납니다. 그 전에 오스트로-다임러를 떠날 때에도 비슷한 이유였다는 점에서 그의 기술에 대한 집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Steyr)에서 잠깐 일했던 그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독립을 하게 되고, 마침내 1931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자신의 이름을 건 설계 회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회사의 의뢰를 받아 설계를 하게 되죠. 그는 반더러(Wanderer)의 6기통 엔진을 비롯해 몇몇 회사의 엔진과 차체 설계, 시험차 제작 등을 했는데, 독일의 경제난으로 회사 경영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1932년에 반더러를 비롯한 4개 회사가 합병해 만들어진 아우토 우니온(Auto Union)은 그의 이력에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남기는 기틀을 제공합니다.
1933년에 독일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국가 차원에서 자동차 부문에 두 가지 큰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는 국민차의 개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터스포츠의 육성이었습니다. 포르셰에게는 두 계획이 모두 중요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먼저 기회가 된 것은 후자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모터스포츠를 석권하고 있던 것은 부가티, 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등 프랑스와 이태리 메이커였는데, 나치는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에서 독일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도록 모터스포츠를 집중 육성하기로 한 것이죠. 나치 정권은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 우니온에 자금 지원을 해 고성능 경주차를 개발하도록 했고, 아우토 우니온은 포르셰로 하여금 경주차 개발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첫 경주차가 아우토 우니온 타입 A(『카 북』 76쪽)였고, 이 차에 쓰인 V16 엔진과 뒤 차축 앞에 엔진을 놓는 미드 엔진 구조는 뒤 이어 나온 타입 B, 타입 C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우토 우니온의 경주차들은 메르세데스-벤츠 경주차들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까지 유럽 모터스포츠를 제패했습니다. 이 때 독일 경주차들은 차체가 모두 은색이었기 때문에 은빛 화살(silver arrow)라는 별명을 얻으며 모터스포츠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아우토 우니온 타입 A
그리고 포르셰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늘 불명예스러운 이미지가 따라다니는 자동차인 KdF 바겐(『카 북』 232~233쪽, 298쪽)이 등장합니다. 독일의 일반 노동자가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히틀러의 아이디어는 독일 국민에게는 매력적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자동차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치 정권이 직접 나서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 차의 설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포르셰였습니다. 당대에 실력 있는 자동차 설계자들은 많았지만 포르셰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보다 유대인이 아닌 독일 혈통이라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포르셰는 늘 ‘작고 잘 달리는 차’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히틀러와 직접 만나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접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독일의 국민차, 즉 폭스바겐(Volkswagen)의 청사진이 그려지기 시작했죠.
위 사진의 차는 1937년에 만들어진 시제차인 W30입니다. 적당한 성능을 지닌 작고 값싸고 경제적이면서 유지하기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고,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국민차 개발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나온 차 중 하나가 W30이죠. 이 차는 공랭식 4행정 수평대향 4기통 엔진과 완전 철제 차체로 구성된 기본적인 폭스바겐의 틀이 갖춰진 비교적 후기형 시제차입니다. 아직까지 폭스바겐을 위한 공장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차는 다임러-벤츠가 대신 만들었습니다. 사진에서 차 밖에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포르셰 박사이고, 사진이 찍힌 장소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던 포르셰의 집 앞입니다. 슈투트가르트는 포르셰가 처음 자신의 회사를 세운 곳이면서, 지금도 메르세데스-벤츠를 만드는 다임러의 본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슈빔바겐
우여곡절 끝에 이 차는 폭스바겐 개발을 뒷받침한 나치 산하단체의 문화 선전조직인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의 머리글자를 따 KdF 바겐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볼프스부르크에 KdF 바겐을 생산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장을 짓죠. 하지만 나치 정권이 존재했던 기간에 이 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독일 국민은 없었습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나치 정권은 국민들이 KdF 바겐을 구입할 수 있도록 일종의 적금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적금으로 모인 자금은 KdF 바겐이 아니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데 활용됩니다. 그리고 볼프스부르크의 공장에서는 KdF 바겐의 설계를 응용한 타입 82 퀴벨바겐과 타입 166 슈빔바겐(『카 북』 112쪽) 등 군용차가 생산되었구요.
폭스바겐 비틀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전쟁이 끝난 후 점령군인 영국군의 필요에 의해 KdF 바겐은 폭스바겐 타입 1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김새 덕분에 얻은 비틀(Beetle)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며 널리 보급되었고요. 이후 폭스바겐 비틀(『카 북』 126~129쪽)은 반세기 이상 생산되며 포드 모델 T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팔린 차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수는 무려 2153만 여 대에 이릅니다. 기본 설계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며 생산된 것으로는 폭스바겐 비틀을 넘어서는 차가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8년에 설립된 자동차 회사 포르셰의 첫 모델인 356(『카 북』 149쪽, 196쪽)이 비틀의 기본 구조와 엔진, 여러 부품을 거의 그대로 써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그만큼 비틀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좋은 차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포르셰 박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가 폭스바겐과 포르셰는 물론이고 메르세데스-벤츠, 그리고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우니온의 역사에도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디에서는 가장 화려한 시기의 가장 강력한 차들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구요. 앞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가 설계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준 차들은 여럿 있습니다. 자동차 역사에 한 사람의 엔지니어가 이처럼 크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기의 엔지니어’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전쟁에서 쓰여 유명해졌거나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또는 전쟁에서 얻은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차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DK 대백과사전 「카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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