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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수 서울대 명예 교수가 보내는 편지 : 『날마다 천체 물리』를 집어 드신 독자께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홍승수 서울대 명예 교수가 보내는 편지 : 『날마다 천체 물리』를 집어 드신 독자께

Editor! 2018. 3. 6. 16:39

『날마다 천체 물리』의 번역을 마무리하신 홍승수 서울대 명예 교수님께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저희 편집부에 보내오셨습니다. 『코스모스』 이후 오랜만에 번역하시면서 느낀 소회, 그리고 한국어판 책 제목이 정해진 뒷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어제 밤새 내린 눈을 치우고 들어와서 책상머리에 단정히 앉았습니다.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새 책 『날마다 천체 물리』를 집어 드신 독자 한 분 한 분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옮긴이는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 죄인입니다. 한 줄 한 줄의 문장과 그 행간에 스며있을 원저자의 개성과 숱한 고심을 독자에게 온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옮긴이로서 저는 원서의 저자와 번역서의 독자 양쪽에 다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번역은 꼭 필요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번역서의 맨 끄트머리에 오게 마련인 「옮긴이의 글」은 이중 죄인으로서 옮긴이에게 허락된 유일한 변명의 장일 터이니, 옮긴이의 변명을 여기 늘어놓기로 합니다.

천문학 관련 영문 책을 우리말로 옮겨 일반 대중에게 보이는 일은 저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방금 여러분께서 집어 드신 『날마다 천체 물리』의 번역 역시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이중 죄인의 과업이었습니다. 왜 운명이냐고요? 제 얘기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필자가 15년 전에 번역·출간한 칼 에드워드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그동안 독자 여러분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끊임없이 받아 왔습니다. 이 책의 모태가 된 13부작 텔레비전 시리즈가 처음 방영된 게 1980년이었습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대 우주론 분야가 이룩한 눈부신 발전을 눈여겨보면서 옮긴이로서 저는 칼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속으로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코스모스』가 거의 반세기 전 지식에 기초한 저서라고 해서 오늘날 이 책의 가치가 반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칼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했던 당시의 과학적 지식은 38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 점이 칼 세이건의 위대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이건의 이 저작물을 과학의 고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코스모스』의 애독자들께서는 우주의 어제, 오늘, 내일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하실 게 분명합니다. 한국의 지식인은 현대 우주론의 핵심을 전해 줄 명저의 탄생을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습니다. 특히 『코스모스』의 애독자 여러분이 그러하실 것입니다.       

저는 『코스모스』를 번역한 사람으로서 독자에게 진 이 빚의 무게를 힘들어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동안 시간에 등 떠밀려 살아온 저 자신의 육신과 영혼에게 너무 미안해서 정년 후 제천 산골로 들어온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사이언스북스의 노의성 주간이, 세간에서 칼 세이건의 후계자라는 평을 받는다는,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최근 저서 Astrophysics for People in A Hurry를 들고 옮긴이의 우거(寓居)를 방문했습니다. 세간의 평이란 원래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지만, 저는 과학의 대중화에 한몫을 해 오는 닐의 저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건네주는 책을 그 자리에서 급히 훑었습니다. 특히 우주론 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았습니다. 이 책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코스모스』의 독자에게 진 빚의 무게를 상당 부분 덜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닐 타이슨의 『날마다 천체 물리』로


닐이 쓴 영문의 우리말 번역인지, 제가 그냥 쓴 건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번역이 수월하게 이뤄진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극히 적은 일부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닐의 몸짓 손짓 목소리를 번역문에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것은 옮긴이의 능력 바깥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번역문이 전하지 못하는 닐의 아우라를 직접 느껴 보시라는 의도에서 이 책 맨 뒷장에 그의 최근 사진을 실었습니다. 

닐의 Astrophysics for People in A Hurry를 번역하면서 옮긴이는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라는 시대의 화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과학도들은 늘 대중과 평행선을 그리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가, 하는 두려움을 씻어 지울 수가 없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비유를 동원하다 보면 과학의 핵심과 정수를 흐리기 일쑤고, 반대로 과잉 친절을 피한다고 과학적 사실과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 보면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습니다.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이렇게 지난(至難)의 과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에 등이 떠밀리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천체 물리학을 들려주겠다는 닐의 용기와 글솜씨에 저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식은 물론이고 그림, 도표, 사진 한 장 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천체 물리학 책의 페이지를 넘기게끔 만든다는 게, 전문가의 눈에는 장화를 신고 가려운 발목을 긁는 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대중을 전적으로 의식한 저술에는 함정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독자들이 과학을 이해했다고 오해하기 딱 알맞은 수준의 서술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너스레나 변죽울림으로 주어진 임무를 다 한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닐은 이 어려운 과업을 멋들어지게 해냈습니다. 

대폭발 이후 원자가 빚어지고, 별과 은하가 태동하며, 생명의 발현과 종의 분화를 불러온 우주 진화의 대서사를 이렇게 아담한 규모의 책에 담아낸 닐에게 필자는 축하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가 밀고 당기며 만들어 낼 미지의 미래로 질주하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종횡무진하며, 닐은 산더미처럼 쌓인 관측 결과들 속에서 천체 물리학자들이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 캐낸 우주의 실상을 남김없이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현대 천체 물리학자들이 ‘날마다’ 궁리하여 발견해 낸 사실 너머의 진실을 온전하게, 속도감 있게, 그리고 재치 있게 펼쳐 보였다고 하겠습니다.



과학은 ‘날마다’의 산물입니다 


과학하기에서 사실에서 진실로 이어지는 연구의 여정은 끝이 없습니다. 과학 역시 ‘구도의 여정’이니까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뤄지는 연구자 개인의 부지런한 연구 활동의 결과들이 쌓여, ‘연구 집단마다’, 그리고 ‘연구 세대마다’로 얽혀서 이어집니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날마다’ 읽고 묵상하기를 계속해서 어마어마한 규모와 깊이의 우주관을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닐의 이 책은 이 ‘날마다’가 쌓여 만들어진 과학의 세계를 여러분께 환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보여 드릴 것입니다. 

제목 『날마다 천체 물리』는 출판사 편집진이 옮긴이의 팔을 비틀어 태어난 결과입니다. 옮긴이는 ‘과학도의 순진함’에서 이 번역서의 제목을 “시간에 등 떠밀려 사는 현대인을 위한 천체 물리”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원서의 제목에 충실하자는 생각에서였지만, 편집진의 설득을 얻어내는 데 완패했습니다. 

그럼 편집진의 ‘날마다’에 대한 변을 들어보실까요. 이 책 마지막 장에 짤막하게 나오는 문장, "날마다는 무리일지 몰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만이라도 진면목을 아직 드러내지 않은 우주적 진실들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에서 이 번역서의 제목 "날마다 천체 물리"가 비롯했다는 겁니다. 

옮긴이인 저는 좀 의아했습니다. ‘날마다,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날마다 생각하는 천체 물리’든 ‘날마다 공부하는 천체 물리’든 ‘날마다’와 ‘천체 물리’ 사이에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날마다’와 ‘천체 물리’ 사이는 독자 여러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채우실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분은 이 책을 날마다 한 챕터씩 읽으실 테고, 또 어떤 분은 이 책에서 닐이 한 얘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날마다 반복되는 출퇴근 러시아워가 주는 스트레스를 잊으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날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커피 나오길 기다릴 때나, 다음 버스나 지하철이 오길 기다릴 짧은 순간에만 잠깐씩 슬쩍슬쩍 펴 보시겠죠. 우리의 등을 떠미는 대항 불가의 시간에 미력으로나마 저항하는 이런 날마다가 쌓이다 보면 여러분의 우주는 훌쩍 커져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날마다 천체 물리』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그리 나쁜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눈 속에 이미 봄님이 와 계시더군요. 제가 사는 꽃댕이 일대가 곧 활기차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과 함께 찬란한 새봄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그럼 또,



무술 입춘 함허재에서 

옮긴이 홍승수 드림




※ 관련 도서 ※


『날마다 천체 물리』 [도서정보]


『코스모스』 [도서정보]


『코스모스』 (특별판) [도서정보]


『나의 코스모스』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