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Books
현인의 독서법 1 본문
‘읽는 뇌’의 과학적 가치를 증명하며 포문을 열었던 「이권우의 독서의 과학」이 이번에는 ‘현인의 독서법’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2,500년 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치열하게 텍스트를 탐독했던 공자와 맹자의 삶을 빌려, 우리 시대의 훼손된 독서 정신에 묵직한 돌직구를 던져 보고자 합니다. 고시 합격이나 남부럽지 않은 출세만을 목표로 삼는 현대의 ‘조각난 독서’를 비판하고, 맑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듯 글을 읽으며 삶의 바른길을 끊임없이 교정해 나갔던 현인들의 진짜 독서법은 어땠을까요?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삼키는 야만의 나락에서 벗어나 거인의 목말을 타는 지적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이권우 평론가가 안내하는 호학(好學)의 세계에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
마땅히 읽어야 할 책
핵심을 찌르는 말이 있는 법이다. 따지고 보자면 많은 말이 필요하지만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끌어 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은 양반전에서 글을 읽으면 가리켜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라 했다. 이 말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설명하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사일 적에 부지런히 책을 읽어 우주와 세상사와 삶의 이치, 그리고 리더십을 익힌다는 뜻이다. 『대학(大學)』에 나온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과정이다. 그다음에는 수양해서 얻은 이치를 우선 가정에서 실천하고 이를 확충해 인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 참여에 나서야 한다. 대부가 걸어야 할 길이다. 『대학』에 나온 대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꿈을 이뤄야 한다. 유가는 이런 삶을 자임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라 본 셈이다.

물론 엄밀하게 사와 대부 계급은 나뉘었으니 대부가 가의 영역을 다스리고 사는 대부의 가신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하면 연암의 말은 정확하지 않다. 또한 사 출신이나 대부에 이르러 두 계급을 통합해 낸 것이 공자(기원전 551〜479년)이니 그 이후 이 계급을 사대부라 칭했다고 하면 연암의 말은 역시 정확하지 않다. 하나, 자기 수양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유가적 삶의 노선에 비추어 보면 연암의 말은 설득력이 높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벼슬에 뜻이 없는 이를 선비라, 벼슬을 하려고 도를 공부하는 이를 사라 했다.) 그러니 일부 연구자가 논어에 나오는 사를 과감하게 독서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다. 유가의 전통에서 책 읽기는 상당히 중요했다. 그래서 유가 철학을 빛낸 사상가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설을 수두룩하게 남겨 놓았다. 오로지 개인의 성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민중의 구제를 목표로 도덕적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의 독서론을 현인의 독서법이라 이름 붙여 보자.
9급 공무원 공자가
‘동양 철학의 시조’가 된 비결
공자는 출신 성분이 미약했다. 무관 출신의 숙량흘(叔梁紇, 기원전 622〜549년)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미상)는 그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부인이다. 거기에다 아버지를 세 살에 여의었고, 어머니는 열다섯쯤에 잃었다. 출신이 사 계급이다 보니, 소육예(小六藝)를 공부했다. 마차 몰기(御), 활쏘기(射), 글쓰기(書), 산수와 계산법(數), 예절과 의식(禮), 음악(樂)을 배웠다. 공자는 이 분야에서도 탁월했다. 요즘으로 치면 모범 택시 기사, 공인 회계사로 일했다. 회고하길, 어렸을 때 천하게 자랐기 때문에 잡다한 일에 능했다(논어 9:3)고 한 이유다. 예는 말해 무엇하랴. 태묘에서 제사 지낼 때 참석한 추(鄹) 땅에서 온 젊은 공자가 예를 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논어 3:15). 음악은 평론가 수준이었다. 평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으며(논어 17:20) 순임금이 지은 소라는 음악을 듣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었다(논어 7:13)는 일화도 있으며, 자신이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다음에야 음악이 바르게 되었고 아(雅)와 송(頌)이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논어 9:14)고 회고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대육예(大六藝)도 공부했다는 점이다.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기(樂記)』를 이른다. 앞의 넷은 책 이름이다. 『예기』와 『악기』는 전하지 않는데(오늘 우리가 보는 예기는 한나라 때 나왔다.) 둘 다 책 이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예악은 실천이 중한지라 스승이 제자에게 말과 몸으로 가르쳤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육예는 여섯 권의 책이라만 하지 않고, 여섯 가지 학문이라 보기도 한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 논어 7:1)이라 하여 요즘 말로 하면 저술은 안 하고 편집은 했다고 했다. 이 말을 근거로 짐작해 보면 공자는 예로부터 전해지고 당대에 쓰인 여러 책을 탐독했는데 (그 가운데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책이 여럿 있을 터다.) 이 여섯 권(혹은 네 권)을 통해 깊은 깨달음과 통찰을 얻은 듯하다. 공자는 서른 무렵 학당을 차린 듯싶은데, 이 대육예를 자신의 철학적 관점에서 편집(예를 들면 기존의 『시경』에 실린 시 가운데 사특함이 없는 것만 모아 놓았다.)해 정본을 만든 다음 이를 교재를 쓴 듯싶다.
만약 공자가 소육예만 능통했다면, 오늘의 영광은 누릴 수 없었을 터다. 오늘로 치면 9급 공무원이 되어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 서리까지 이른 과정을 높이 평가받아 출세한 사람으로 기록이 남았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계급 한계에 갇히지 않고 치열하게 공부하였기에 동양 철학의 시조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존재론적 변신이 일어났다. 군자불기(君⼦不器, 논어 2:12)라,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자신의 가능성을 한계 짓고 당장의 실익만을 목표로 한 공부를 거부한 데서 공자의 위대함이 비롯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진짜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
공자의 삶을 통해 공부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다. 공자가 소육예에 능통했다는 것은 사회에 나가 독립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우리의 교육 목적도 직업을 얻는 데 있다. “도를 배우다 보면 벼슬이나 재물(祿)이 그 안에 있기도 하는”(논어 15:31) 법이다. 공자는 또 다른 공부의 목적을 내세웠다. 참된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를 내면화하고, 마침내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군자는 도를 도모하지, 먹을 것을 꾀하지 않는”(논어 15:31) 법이다. 문제는 오늘에는 사회 진출의 교두보만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효경(孝經)』의 첫 장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몸통, 사지, 머리카락, 피부(身體髮膚)를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이 구절은 인구에 회자하는지라 두루 안다. 그런데 정작 다음 구절은 잘 모른다. 효의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을 터. 입신(立身)하여 도를 행하여(行道)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떨쳐(揚名) 부모님까지 영예롭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흔히 아는 것이 성공하여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이라 풀이되는 입신양명이다. 여기서 입신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고, 양명은 출세를 뜻한다. 이것만이 오로지 공부의 목적이라 한다. 그런데 현인은 공부하여 사회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될 정도로 성장하면 반드시 삶의 바른길을 걸어야 하고 그 결과 명성을 떨친다고 했다. 공부의 목적은 입신하고 행도하는 데 있다. 양명은 그에 뒤따른 결과일 뿐이다. 공자가 15세에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고(志學) 서른에 입신하여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마음이 뜻하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에 이르렀다는 이력과 어슷비슷하다. 우리는 공자가 말한 공부의 두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만 택하면서 유가가 말한 공부의 정신을 훼손했다.

공부에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공자는 어디에 비중을 더 두었을지 궁금할 터다. 공자는 당연히 성인(聖人) 되기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현실은 공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자는 철학 전문 대학원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참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배움터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문하에 들어온 대다수 학도는 공자 학당을 행정 대학원쯤으로 여겼다. 꽤 널리 알려져 있는 스승의 추천사를 받아 취직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 일례를 들어보자. 공자가 어느 날 제자에게 권력자가 너희를 알아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 했다.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는 국방을, 염유(冉儒, 기원전 501~?년)는 행정을, 공서화(公西赤, 기원전 509~?년)는 외교를 맡고 싶다고 토로했다(논어 11:24). 훗날 이들은 그 뜻을 이루었으니, “삼 년을 내게서 배우고 나서 벼슬에 뜻 두지 않은 자를 쉬 얻기 어렵더구나.”(논어 8:12)라고 공자가 탄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연히 반대되는 사례도 있다. 공자가 칠조개(漆雕開, 기원전 540~?년)에게 공직을 맡으라 권했는데, 자신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공자가 기뻐한 것은 당연하다(논어 5:6). 당대의 실세인 계씨가 민자건(閔子騫, 미상)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비(費)읍의 읍재(邑宰, 현대의 군수나 시장에 해당하는 지위이다.)를 맡으라 하자 민자건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논어 6:9). 국정농단 세력의 하수인이 될 수 없어서였다. 수제자인 안연(顔淵, 기원전 521~481년)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한 그릇의 밥과 한 쪽 박의 물만 가지고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훌륭하다고 상찬했다(논어 6:11). 도대체 안연이 극빈의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즐거움은 무엇이었을까? 노나라 제후 애공(哀公, ?~기원전 468년)이 제자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 하니 단연 안연이라 하면서 그가 불행히 일찍 죽고 나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논어 6:3).
오해하지는 말자. 앞서 말한 대로 공부하면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첫째, 공부는 끝이 없다. 일련의 과정을 마친다고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공자는 인간을 완성형으로 보지 않았다. 과정형으로 여겼다. 참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방심하며 그래서 과오를 저지른다. 책은 맑은 거울이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기준을 잡아 주니, 이에 비추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참된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하라는 말이다. 둘째, 세상에 나가더라도 부나방처럼 권력의 등불에 달려드는 모리배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임금이 되면 인정(仁政)을 베풀고 신하가 정의롭지 못하면 퇴출시켜야 하고(“순임금은 실수와 재난으로 지은 죄는 용서하였고, 끝내 나쁜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하되 삼가고 삼가서 오직 형벌을 신중히 다루었다. 공공(共工)을 유주(幽州)로 귀양 보내고, 환두(驩兜)를 숭산(崇山)으로 내치고, 삼묘(三苗)를 삼위(三危)에 내몰아 가두고, 곤(鯀)은 우산(羽山)에 가두어 욕보여, 네 사람을 벌하니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 (『서경』, 「순전」)), 거꾸로 신하도 임금이 정의롭지 못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했다(대신(大臣)이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는 사람을 뜻한다(논어 11:22). 공자에게는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문제가 중요했다.
공자의 독서론은 호학(好學)에서 비롯한다. 열 가구 사는 작은 마을에도 자신처럼 충실하고 신뢰 있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논어 5:28) 장담했다. 태어나면서 안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옛것을 좋아하여 민감하게 앎을 구했을 뿐이다(논어 7:19). 공자가 좋아했다는 옛것이 대육예로 짐작되니, 평소 문헌을 널리 배웠다(논어 6:25)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점은 제자가 확인해 준다. 공손조(公孫丑, 미상)가 자공에게 공자는 어디서 배웠느냐 물은 적이 있다. 자공이 대답하기를 뛰어난 사람은 문왕과 무왕의 도 가운데 큰 것을 기록하고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작은 것을 기록했으니, 우리 선생님이 어찌 배우지 않았겠으며 스승이 따로 있겠느냐고 답변했다(논어 19:22). 책을 두루 섭렵했으니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공자가 책 읽기를 통해 깊이 공부한 흔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공자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도를 열심히 탐구하였다. 그 결과, 두 왕조의 체제를 말할 수 있으나 문헌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논어 3:9).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가 자고(子羔, 기원전 521~?년)를 비읍 책임자로 삼자 공자가 남의 자식 잡는다며 비판했다. 성질 급한 자로가 백성 있겠다, 사직 있어 귀신이 보호해 주는데, 꼭 책을 읽은 다음에야 정치를 배웠다고 할 수 있느냐고 대들었다(논어 11:23). 공자가 다른 자리에서 자고를 어리석다(논어 11:17) 한 걸로 보아 아직 공부가 부족한 후배에게 비중 있는 자리를 준 것을 비판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필독서도 다 떼지 못한 녀석이 귀한 자리에 가면 제 역할 할 수 없다는 걱정을 담은 것이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보면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해 열독하는 바람에 대나무 쪽의 책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니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 읽기를 멈추면,
야만의 세계가 시작된다!
공자가 이토록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다. 종일 먹지도 않고, 밤이 다하도록 잠들지 않고 아무리 생각에 골똘해도 보탬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였기(논어 15:30) 때문이다. 일찌감치 공자는 책 읽기가 거인의 목말을 타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앞선 세대의 지적 업적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 수 없는 법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인(仁)을 좋아한다면서 호학(好學)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愚)이 된다. 지혜(知)를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함(蕩)이 된다. 믿음(信)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해치는 일(賊)이 된다. 정직(直)을 좋아하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각박함(絞)이 된다. 용맹(勇)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장판(亂)’이 된다. 강함(剛)을 좋아한다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광기(狂)’가 된다(논어 17:8). 유명한 육언육폐론(六⾔六蔽論)이다. 공자는 우리가 살아가며 마침내 이르러야 하는 ‘도’의 세계(이미 한 말로 대체하면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이다.)는 인, 지혜, 믿음, 정직, 용맹, 강함이다. 문명의 세계다. 그런데 책 읽기를 통해 공부하지 않으면 어리석음, 허황함, 해침, 각박함, 난장판, 광기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야만의 세계다. 책 읽기는 한 개인을 야만의 늪에서 문명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사다리인 셈이다.
공자는 어떤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을까? 공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분해서 밥 먹는 걸 잊어버리고, 알고 나면 즐거워 근심을 잊어버렸는데, 얼마나 이런 경지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 늙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논어 7:19).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깨우친다는 말은 그것을 알기 위해 지적 고투를 한다는 말이다. 공자에게 자발성은 독서론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 말이다. 마침내 알게 되면 즐거웠다 하니, 그래서 “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논어 6:18)라고 말했을 터다. 진리에 대한 공자의 갈급함은 달리 표현되었으니, 배움은 닿지 못하는 듯하고, 잃어버릴까 안달하듯 했다(논어 8:17).
읽기만 해서 머리에 욱여넣는 것이 책 읽기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진짜 공부는 배운 내용을 곱씹어보고 빗대어 보고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공자는 바로 이런 책 읽기를 몸소 실천했다. 공부하고 나면 반드시 배운 것을 묵묵히 새겼으니(논어 7:2),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망치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논어 2:15) 여겨서였다. 널리 배우기를 즐긴 공자는 박람강기나, 박학다식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많이 배워서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하나로 꿰었다(논어 15:2) 했는데,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년)는 그것이 충실함과 남에 대한 배려(忠恕)라 증언했다(논어 4:15).

공자는 책 읽기의 지적 현학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촉구했다. 이를 공자는 널리 배우고 예로서 요약하였다(博⽂約禮, 논어 6:25)는 말로 설명했다. 예를 예의나 예절로 좁혀서 보면 안 된다. 예란 한 개인이 맺는 다양한 관계를 적절히 운영하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로 옮길 수 있으니, 배운 것을 반드시 상황에 맞게(節!) 실천하였다(禮!)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풀이할 때 “자제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손하여야 한다. 행동은 삼가고 말은 미쁘게 하며, 널리 대중을 아끼고 또 ‘어진 이(仁)’와 친교해야 한다. 이리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거든 곧 글(⽂)을 배워야 한다.”(논어 1:6)라는 말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이의역지(以意逆志),
옛사람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
유학사에서 아성(亞聖)이라 칭송받으며 공자의 적통을 이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는 이의역지(以意逆志)라는 독서법을 주창했다. 맹자가 말한 의(意)는 읽는 이의 생각과 판단을, 지(志)는 지은이의 의도를 가리킨다. 역(逆)은 ‘헤아린다’라는 뜻이다. 읽는 이의 마음으로 지은이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제자 함구몽(咸丘蒙, 미상)이 맹자에게 순이 요임금과 아버지 고수를 신하로 삼았다고 했다. 맹자는 그런 말은 제나라 동쪽 촌놈이 지어낸 허튼소리라 했다. 순은 섭정한 지 28년 만에 요임금이 돌아가고 삼년상을 치른 다음 왕위에 올랐다. 그러니 요임금이 살아있을 적에 순이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함구몽이 『시경』의 소아, 「북산」을 보면
“온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땅끝까지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네.”
라고 했는데, 순이 천자가 되자 아비인 고수를 신하로 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맹자가 말하기를 그 시는 자네가 아는 뜻이 아니라면서 일이 혼자만 일하느라 힘들고 수고롭다고 하소연한 내용이라고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시를 해석할 때는 단어에 천착하여 구절을 해쳐서는 안 되고, 구절에 집착하여 그 시의 본뜻을 놓쳐서 안 되는 바, 읽는 이의 마음으로 지은이의 의도를 헤아려야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맹자 9:4).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당연히 맹자와 함구몽의 시 이해에 누가 더 적합한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시의 전문을 살펴보자.
북산에 올라가서 구기자잎 뜯었다네 씩씩한 남자들이 / 아침저녁 종사하니 나랏일이 쉴 틈 없어 우리 부모 근심하네 / 넓은 하늘 아래가 나라 땅 아님 없고 물가 따라 그 끝까지 왕의 / 신하 아님 없네 다 같은 신하거늘 나만 홀로 고달프네 / 네 필 말 쉴 새 없고 나랏일은 끝이 없네 내 아직 늙지 않고 내 / 나이 젊다 하여 힘이 한창 건장하니 사방 경영 하라시네 / 어떤 이는 편히 쉬고 어떤 이는 일만 하고 어떤 이는 편히 자고 / 어떤 이는 쉴 새 없네 / 어떤 이는 남의 고생 모르고 어떤 이는 고생만 하고 어떤 이는 / 편히 놀고 어떤 이는 초라하네 / 어떤 이는 즐겁게 술 마시고 어떤 이는 허물 될까 마음 졸이고 / 어떤 이는 아무 말 막 하는데 어떤 이는 안 하는 일 없다네
시의 본문을 읽으면 함구몽이 부분 인용하면서 오독했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채게 된다. 오늘로 치면 세종시에 있는 중앙 부처에 혼자 남아 야근 하는 젊은 공무원이 자기만 일 시킨 직장 상사를 원망하는 내용이다. 맹자의 제자들은 순임금을 깎아내리려 했다. 맹자 철학의 주춧돌이 바로 순임금의 효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의 사유에 도전하는 것은 좋으나, 자료를 왜곡하면서까지 덤벼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시를 쓴 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꼼꼼히 살피지 않고 읽는 이의 의지가 앞서 본뜻을 왜곡하는 독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년)이 이의역지를 설명한 방식이 흥미롭다. “이제 나의 뜻을 가지고 옛사람의 뜻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로 합쳐져 아무 간격이 없고 서로 기뻐하여 이해하면, 이는 옛사람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에 스미어 하나가 된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귀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딱 붙으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 지경이라 했다. 이의역지는 읽는 이가 지은이가 구축한 사유와 상상의 세계와 일치되는 즐겁고 행복한 경지를 말한다. 몰입과 일체의 즐거움, 그리고 지은이 덕에 기존의 관념이 산산조각 나는 지적 기쁨의 자리를 이르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책이라도
글자 그대로 믿지 마라
맹자는 지은이의 의도를 간파하는 독서법만 아니라, 비판적 독서도 함께 말했다. 맹자가 제자들과 『서경』을 함께 읽고 토론하다가 『서경』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무성(武成)」은 두어 쪽만 읽을 만하다고 했다. 제자 처지에서 보자면 충격적인 발언이다. 공자는 물론이고 맹자도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서경』을 자주 인용했다. 만약 『서경』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맹자 사유에도 틈이 있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서경』과 다른 내용이 담긴 역사책을 들고 와 덤벼들 때마다 이에 맞서 제자를 설복해 마침내 승복을 받아 낸 맹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맹자가 문제 삼은 대목은 이렇다. 은나라 주 임금의 폭정에 지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주나라 무왕이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두 나라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는 목야에서 치러졌는데 주나라 군사가 월등히 우세해 은나라 군사가 궤멸할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맹자가 읽은 『서경』의 「무성」에는 이 장면을 은나라 군사가 흘린 피가 큰 강을 이루듯 하여 절굿공이가 떠다녔다는 식으로 써놓은 모양이다. 맹자가 발끈했다. 어진 사람이 불인한 사람을 정벌했는데 어떻게 피가 흘러 절굿공이를 떠내려가도록 했다고 기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맹자 14:3). 물론, 맹자가 이 전투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터다. 평화로운 권력 교체야 누구나 바라는 바다. 하지만 타락한 권력이 끝까지 저항한다면, 무력으로 이를 정벌해야 마땅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과장되게 연출된 전투 장면을 돋을새김하는 것은 무왕의 역성혁명을 폄훼하는 일이라 본 셈이다.

흥미로운 일은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서경』에는 은나라 진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앞에 있던 군사 무리가 창을 거꾸로 잡아들고 뒷사람을 쳐서 달아나게 하는 와중에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혹여 맹자의 지탄이 타당하다고 여겨 후대에 기록이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
참고 자료
박지원, 안대회 옮김, 『박지원 소설선』 (민음사, 2025년)
배병삼, 『논어1(한글세대가 본)』 (문학동네, 2002년)
배병삼, 『논어2(한글세대가 본)』 (문학동네, 2002년)
이권우
도서 평론가. 경희 대학교 국어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책과 관련한 일을 하다 출판 전문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 생활을 정리했다.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거나 글쓰기 강연을 업으로 삼고 있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죽도록 책만 읽는』 등의 책을 썼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과학책 읽기, 이 책으로 시작하라! 가독성과 동시대성을 갖춘 현대 과학의 50가지 이정표

과학과 책을 사랑하는 과학 친구들이 들려주는 진화의 가치

뇌과학에서 진화 심리학까지, 과학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선

현대 과학의 숨결이 닿은 새로운 글쓰기 지침서

글쓰기 교수님과 현장 연구자가 들려 주는 과학 글쓰기의 모든 것!

우리는 왜 과학이 아니라 미신을 믿는가!?
'(연재) 이권우의 독서의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읽기의 과학: 책의 시대는 끝났는가? (0) | 2026.05.1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