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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서문

Editor! 2014. 4. 8. 16:06

앨런 프랜시스의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서문 전문을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












별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
-아이작 뉴턴



가끔은 칵테일파티에서 자기 볼일만 보다가도 큰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 때는 2009 5월이었다. 미국 정신 의학 협회(APA)의 연례 모임에 참석한 정신과 의사들이 모인 파티였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 미술관이었다. 내가 휘말린 문제란 '정상'의 속성이 무엇인가, 그리고 정상을 정의할 때 정신 의학이 어느 정도 역할을 맡는 것이 적당한가 하는 씁쓸하고 공개적인 논쟁에 빠져든 것이었다.

사실 나는 다른 일로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었고, 모임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파티는 옛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 좋은 기회였다. 나는 10년 가까이 정신 의학계에서 발을 빼다시피 한 상태였다. 일찍 은퇴해서 아픈 아내를 돌보았고, 악동 같은 손자들을 봐주었고, 책을 읽었고, 해변에서 즐겼다. 이전에 내 직업 생활은 의욕이 넘치다 못해 과잉 행동 증후군이라고 보아도 좋을 지경이었다. 나는 DSM-IV(정신 장애 진단 통계 편람 4)를 작성한 팀을 이끌었고, 듀크 대학교에서 정신 의학부 학부장으로 일했고, 많은 환자를 진료했고, 연구했고, 책과 논문을 썼다. 늘 시간을 뒤쫓아 달렸고, 늘 시간에게 지는 것 같았다. <뉴욕 타임스>의 스포츠 면을 슬쩍 보기만 하는 것도 내게는 금지된 쾌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투키디데스를 읽을 수 있었고, 얼굴에는 햇살을 쬐고 변변치 않게 남은 머리카락에는 바람을 쏘일 수 있으니 정말 기뻤다. 나는 이메일 주소도 없었고, 전화도 거의 오지 않았으며, 가족 외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내가 믿는 미신이 딱 하나 있다. 비합리적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나는 평균의 법칙을 믿는다. 모든 것이 종국에는 평균에 맞춰진다는 생각이다. 나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미신은 원래 끈질긴 법. 아마도 확률의 신들은 파티가 있던 날 밤에 지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가지고 놀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내 삶이 너무 태평해졌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의 앞길에 평정을 깨뜨리는 대화를 좀 던져서 균형을 맞춰 볼까? 불과 한 시간 만에 나는 느긋하게 수수방관하던 입장에서 벗어났고, 정신 의학의 핵심을 놓고 벌어진 내전에서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팽창하고 있는 질병화 현상과 정신 의학으로부터 정상성을 보호하는 싸움이었다. 대체로 지는 싸움이었다.

왜 나였을까? 왜 그날 밤이었을까? 하필이면 그때, 나의 여러 친구들은 DSM-5 작성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주도적인 역할을 자랑하며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이상의 화제는 있을 수 없었다. DSM '진단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의 약자이다. 1980년까지만 해도 DSM은 제 분수에 맞게 조용히 숨어 있는 책이었다. 그것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혜성처럼 DSM-III이 등장했다. 몹시 두꺼운 그 책은 금세 문화적 아이콘, 항구적인 베스트셀러, 정신 의학의 '성경'으로서 부당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DSM은 정상성과 정신 질환의 경계라는 결정적인 기준을 설정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사람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갖가지 중요한 결정을 도맡게 되었다. 이를테면 누가 건강한 사람이고 누가 아픈 사람인지, 어떤 치료를 제안할지, 누가 비용을 댈지, 누가 장애 수당을 받을지, 누가 정신 건강이나 교육이나 직업이나 여타 분야의 복지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누가 일자리를 얻고, 아이를 입양하고, 비행기를 몰고, 생명 보험에 들 수 있는지, 살인자를 범죄자로 볼지 정신병 환자로 볼지, 어떤 피해를 소송에서 보상 대상으로 여길지, 기타 등등 아주 많은 것이 DSM에 따라 좌우되었다.

나는 20년 동안 DSM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일에 관여했던지라(DSM-III, DSM-IIIR, DSM-IV에 참여했다.), DSM의 허점을 잘 알았다. 그리고 어떤 개정에든 위험이 잠복한다는 점을 경계했다. 반면에 친구들은 그 게임이 처음이었고, DSM-5 작성에 한몫하게 되어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신 장애를 더 많이 추가하고 기존 장애를 진단하는 규칙을 더 느슨하게 풀 생각이었다. 그런 변화의 단점은 모르는 채, 바라 마지않는 이점만을 과대평가했다.

나는 무언가 바꿔 보려는 그들의 열정과 열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1987, 내가 DSM-IV 작성을 이끌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해변으로 긴 산책에 나섰다. 평소에는 뭐든 골똘히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때는 생각할 게 많았다. 첫 한 시간쯤은 내게 힘이 주어졌다는 기분에 들떠, 정신 의학을 바꾸고 개선할 방법을 열심히 계획했다. 나는 정신 장애 진단이 너무 멀리 나아갔고, 너무 신속해졌고, 너무 빨리 변한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정신 장애의 범주가 너무 많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진단받았다. 나는 세 가지 괜찮은 발상을 떠올렸다. 진단이 너무 쉬워 보이는 장애들은 기준을 높일 것, 그다지 이치에 닿지 않는 장애들은 통합하거나 삭제할 것, 융통성 없는 명칭이 아니라 유연한 숫자로 인격을 묘사할 것.

그러나 다음 한 시간 동안,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마음에 품었던 프로젝트들을 몽땅 기각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문제를 바로잡으려다가 다른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들었던 것 같다. 더욱 중요한 점으로, 내가(혹은 다른 누구라도) 나 자신이나 내가 선호하는 발상을 무조건 신뢰할 근거가 없었다. 진단 체계의 변화는 과학적으로 추진되어야 하고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나든 다른 누구든 개인의 변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DSM-IV 작성 기법은 개인성, 임의성, 창의적 진단으로부터 편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견제와 균형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제안에 대해서든 그 위험과 허점에 집중하여 과학 문헌을 샅샅이 검토하도록 요구할 것이었다. 수고롭게 데이터를 재분석하고 현장 시험을 할 것이었다. 위험성이 있는 제안, 그리고/혹은 분명한 과학적 장점이 없는 제안은 모조리 퇴짜 놓을 것이었다. 기준을 높게 잡으면 거의 모든 변화를 기각하게 되리라는 내 직감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나중에 우리에게 접수된 제안들 중에서 설득력 있는 과학적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제안은 많지 않았다. 기초 과학 분야에서 정신 의학은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매일같이 생산하고 있었지만, 그런 통찰이 임상으로 번역되어 어떻게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면 좋을지 알려 준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DSM-IV에서 실수를 저지를 처지가 못 되었다. 작은 실수라도. DSM은 자기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나쁠 만큼 지나치게 강력해져 있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변화라도 재앙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DSM-5는 정말로 큰 실수를 저지를 참이었다. 친구들이 흔연히 추천한 새로운 장애들을 모두 합하면, 새로운 '환자'가 수천만 명이나 탄생할 것이었다. 나는 충분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넓은 DSM-5의 진단 그물망에 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해로운 부작용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약물에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노출될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제약 회사들은 자신의 장기인 질병 장사의 표적으로 새로 편입된 먹음직스런 대상들을 어떻게 잘 우려낼까 궁리하면서 입맛을 다실 것이다.

내가 DSM의 위험에 예민한 것은 몸소 고통스럽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단 과열 현상을 다스리려고 애썼는데도, DSM-IV는 진단 거품을 더욱 부풀리는 데 오용되었다. 우리는 지루할 만큼 소박한 목표를 잡았고, 강박적일 만큼 철두철미한 기법을 사용했고, 엄격할 만큼 보수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는데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세 가지 거짓된 정신 장애가 유행하는 현상을 예측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그것은 자폐증, 주의력 결핍 장애, 소아 양극성 장애였다. 또한 우리는 광포한 진단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에도 이미 진단 인플레이션은 정신 의학을 제 역량을 벗어난 영역까지 밀어붙여 확장하고 있었다. 대체로 조심스럽게 잘 작성된 DSM-IV마저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면, 원대하지만 무모한 '패러다임 전환'의 야심에 휘둘려 부주의하게 작성된 DSM-5는 얼마나 더 큰 부정적 영향을 끼치겠는가?

나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문제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오진을 받을 새로운 '환자'들에게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게도 그렇다. 그동안 진단 인플레이션 때문에 미국 인구의 지나치게 많은 비율이 항우울제, 항정신병약, 항불안제, 수면제, 진통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는 약을 털어 넣는 사람들의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미국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정신 의학적 문제로 적어도 한 가지 약을 먹고 있다. 2010년에 전체 성인의 11퍼센트가 항우울제를 먹었다. 어린이의 4퍼센트 가까이가 정신 자극제를 복용하며, 십대의 4퍼센트가 항우울제를 먹는다. 양로원 거주자의 25퍼센트는 항정신병약을 받는다. 캐나다에서는 2005~2009년 사이에 정신 자극제 사용이 36퍼센트 늘었고,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약물 사용이 44퍼센트 늘었다.

느슨한 진단은 전국적으로 의약품 과다 복용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인의 6퍼센트는 처방약에 중독되었다. 요즘은 불법 마약보다 합법 처방약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오거나 죽는 사례가 더 많다. 의약품이 함부로 사용될 때, 제약 회사는 마약 카르텔만큼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예가 있다. 2005년 이래 미국의 현역 군인들에 대한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은 무려 여덟 배로 늘었다. 11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적어도 한 가지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고, 더 많은 수가 한 종류 이상을 복용하며, 과다 복용 사고로 죽는 수가 매년 수백 명이다.

향정신성 의약품은 요즘 제약 회사들의 제일가는 수입원이다. 2011년에 항정신병약의 매출은 180억이었고(놀랍게도 전체 의약품 매출의 6퍼센트를 차지했다.), 항우울제는 110억이었고, 주의력 결핍 장애 약은 80억 가까이 되었다. 사람들이 항정신병약 구입에 쓰는 돈은 세 배로 늘었고, 1988년에서 2008년 사이에 항우울제 사용은 거의 네 배로 뛰었다. 그리고 엉뚱한 의사들이 약을 나눠 주고 있다. 처방전의 80퍼센트는 1차 진료의가 쓴다. 그들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거의 배우지 못했고, 제약 회사 영업 직원들과 오도된 환자들로부터 극심한 압력을 받으며, 고작 7분의 면담으로 서둘러 처방을 쓰고는 체계적인 감사도 받지 않는다.

자원이 뒤죽박죽 할당되는 것도 문제다. '공연히 걱정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치료가 투입되는데, 그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해를 입는다. 반면에 정말로 아파서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돌아가지 않는다. 심한 우울증 환자 중 3분의 2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 분열증 환자 중 많은 수가 감옥에 안착한다. 불길한 징조가 뚜렷하다. '정상'은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고, 아픈 사람들은 절실하게 치료를 바란다. 그런데도 DSM-5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듯하다. 일상적인 불안, 기벽, 건망증, 나쁜 식습관을 정신 장애로 둔갑시킬 새로운 진단들을 더하고 있다. 정신의학이 그렇게 범위를 넓히면서 정상으로 간주되는 편이 더 나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느라 바쁜 동안, 정말로 아픈 사람들은 더욱 무시될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와 의도치 않았던 나쁜 결과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DSM-5 작성자들의 순진한 열의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황금 같은 기회로 보는 것이 내게는 심대한 위험으로 보였다. 진단 과열은 건강에 나쁘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그중에서도 가장 심란했던 것은 정신 의학계 동료들 중에서도 교제가 제일 오래된 축에 드는 한 친구와의 대화였다. 그는 지혜롭고 경륜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평생 정신 분열증 환자들의 괴로움을 줄이는 데 헌신했다. 그런 그가 DSM-5 '정신병 위험 증후군'이라는 새 진단을 넣음으로써 판세를 일신하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닌가. 친구는 그 진단이 가만 놓아두면 정신 분열증으로 발전할 어린 환자들을 조기에 확인하여 예방적 치료를 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했다. 약간의 조기 예방으로 나중의 수고로운 치료를 덜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일단 뇌가 병에 걸리면, 도로 낫게 하기 어렵다. 망상과 환각을 낳는 뇌 회로들이 활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나중에 그것들을 꺼 버리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정신 분열증을 처음부터 예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질병이 가하는 전체적인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친구의 목표는 고결했다. 그러나 그 생각에 타격을 입히는 설득력 있는 반론이 다섯 가지 있다. 반론 1. '정신병 위험 증후군'이라는 무시무시한 진단을 받는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 오진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들 중 극소수만이 실제로 정신병으로 발전할 것이다. 반론 2. 정말 정신병으로 발전할 사람만 가려내더라도, 효력이 입증된 정신병 예방 기법이 하나도 없다. 반론 3. 많은 사람이 부수적 피해를 입을 것이다. 향정신성 의약품을 쓸데없이 처방받아서 비만, 당뇨, 심장 질환, 기대 수명 단축의 위험을 겪을 것이다. 반론 4. 철저히 잘못된 생각이건만 정신병이 목전에 와 있다는 느낌을 풍김으로써,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을 테고 군걱정을 일으킬 것이다. 반론 5. 대체 언제부터 '위험'이 있다는 것이 '질병'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었나? 나는 친구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마음을 아주 약간 열지도 못했다. '정신병 위험 증후군'은 벌써 이륙했다. 친구의 꿈은 틀림없이 의도치 않은 끔찍한 결과를 낳는 악몽으로 변할 것이다.

나는 파티장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DSM-5에서 일하는 다른 친구들도 만났다. 그들도 아까의 친구와 비슷하게 각자 선호하는 혁신에 흥분한 상태였다. 어느새 나는 그들이 DSM-5에 삽입하자고 제안한 새로운 장애들 중 다수가 내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맛있는 새우와 립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은 DSM-5 '폭식 장애'였다. 내가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는 것은 DSM-5 '약한 신경 인지 장애'에 해당되었다. 내가 느끼는 걱정과 슬픔은 '혼합성 불안/우울 장애'로 통할 것이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 느꼈던 애도는 '중증 우울증'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산만하기로 유명한데, 그것은 '성인 주의력 결핍 장애'의 분명한 신호였다. 고작 한 시간 동안 옛 친구들과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눈 것뿐인데도 나는 새로운 DSM 진단을 다섯 개나 얻었다. 나의 여섯 살 난 일란성 쌍둥이 손자들도 잊지 말자. 그 아이들의 짜증은 이제 그냥 성가신 면이 아니라 '분노 조절 곤란'이었다.

DSM-5는 분명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 어떻게 하지? 나는 이전에 이 문제에 관해 한마디 해 달라는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DSM-III 작성에서 가장 큰 책임을 졌던 정신 의학계의 뛰어난 혁신가, 밥 스피처는 벌써 몇 년째 대중에게 큰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었다. 밥은 정신 의학 협회가 자신의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요량으로 DSM-5 작업자들에게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하게 만든 데 맘이 상했다. 안전하고 품질 좋은 DSM을 만드는 데 필요한 투명성을 출판 수익이 눌러서야 되겠는가. 밥이 절대로 옳았다. 나도 잘 알았다. 가끔 밥은 DSM-5를 옳은 방향으로 돌리려는 노력에 나도 동참할 것을 부탁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연거푸 거부했다. 나는 평생 논쟁에 발 담그지 않는 성향이었거니와, 이 일은 유달리 불쾌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내 후임자들의 작업에 관해서 논평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짓 같았다. 밥은 뛰어나고 지칠 줄 모르는 투사니까 공개적인 논쟁에서 너끈히 버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파티에서 심란한 대화를 들으니, 나도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DSM-5가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물도 대단히 위험할 것이었다. '정신병 위험 증후군' DSM-5에 포함되면, 죄 없는 아이들이 거짓 진단으로 쓸데없는 투약을 받아서 비만이 되거나 일찍 죽을 수 있다. DSM-5는 갖가지 공공 보건 문제들을 낳을 것이고, 대중은 거기에 대해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밥이 혼자서도 버거운 일을 다 해낼 수 있으리라는 핑계로 물러나 있는 것은 이기적이고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정을 위태롭게 만들어야 할 것이고, 정신 의학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릴 것이고, 사랑하는 해변에서 떠나야 할 것이었다. 파티에는 밥의 아내이자 DSM-III에서 긴밀하게 협력했던 재닛 윌리엄스도 와 있었다. 나는 재닛에게 가서 말했다. 밥에게 나도 함께하겠다고 말해 달라고. DSM-5는 선의를 품었으되 지독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문가' 집단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 중요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나는 정신 의학 협회 지도부에게 이야기했다. 협회 이사회에게 경고 편지를 네 통 보냈다. 수많은 블로그 글을 올렸다. 많은 논설과 논문을 발표했다. 전문가 모임이나 대중 모임에서 강연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매번 DSM-5의 위험을 경고했다. DSM-5은 정상적인 사람들을 오진할 테고, 진단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테고, 부적절한 의약품 사용을 장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을 구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다른 많은 개인, 정신 보건 단체, 학술지, 언론이 똑같은 경고를 시끄럽게 울렸다. 우리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후의 순간에 DSM-5가 가장 위험한 제안들 중 몇 가지를 기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우리가 실패했다. DSM-5는 정신 장애 진단을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고, 새로운 거짓 유행을 낳을 것이고, 더 많은 의약품 사용을 부추길 것이다. DSM-5의 온당한 목표는 진단과 치료를 부적절하게 더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단을 억제하여 디플레이션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은 그 지나친 실태에 대한 내 반응이다. 한편으로는 '내 탓이오'이고, 또 한편으로는 '나는 고발한다'이며, '간절한 호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정신 의학의 잘못된 흐름을 바라보는 내부자의 절망적인 견해를 보여 줄 것이고, 안전하고 정상적인 정신 의학으로 돌아가기 위한 현실적인 로드맵도 제공할 것이다. 내 목표는 '정상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정신 의학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 의학은 고결하고 필수적인 직종이고, 그 핵심은 굳건하며, 제대로 수행되면 대단히 효과적이다. 정신 의학의 성과는 다른 의학 분야들의 성과에 맞먹거나 심지어 능가한다. 그리고 정신적 보살핌을 제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영광이다. 우리는 환자를 내밀하게 알게 되고,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돕는 것을 도울 방법을 찾아낸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대부분의 사람을 돕고, 모든 사람에게 연민과 조언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신 의학은 자신의 역량 안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고수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정말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에서 가장 크게 혜택을 누릴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을 환자로 만드느라 바빠서 정말로 아픈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신 의학만이 이렇듯 도를 넘어 확장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정신 의학은 미국 의료계 전반의 특징인 비대함과 낭비를 보여 주는 한 예일 뿐이다. 상업적인 이해가 이미 의료계를 장악하여, 환자보다 수익을 앞세우며 과잉 진단, 과잉 검사, 과잉 치료의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보건 분야에 두 배나 돈을 쓰는데도 그 성과로 보여 줄 만한 것은 시시하다. 지나친 의료적 보살핌으로 오히려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 켠에서 다른 사람들은 부끄럽기 짝이 없게도 방치된다. 우리는 반드시 정신 의학을 비롯한 의학 전체를 길들이고, 다듬고, 구조를 재편하고,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진정한 정신 장애는 신속한 진단과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 상태는 저절로 나아지지 않으며, 오래 방치할수록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 그에 비해, 누구나 살면서 겪기 마련인 일상적인 문제들은 저마다 타고난 회복력과 시간의 치유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강인한 종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유약한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는 상시적인 위험들을 피하면서 위태로운 일상을 영위해야 했던 슬기로운 선조들로부터 1만 세대나 성공적으로 이어져 내린 생존자들이다. 우리의 두뇌와 사회 구조는 더없이 거친 환경마저 잘 다루도록 적응했다. 우리는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고도,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충분히 답을 찾아낸다. 의료적 처치가 오히려 상황을 엉클어뜨려 악화시킬 때도 많다. 우리가 점점 더 정상성을 대대적으로 질병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수록, 강력한 자기 치유 능력과는 자꾸만 더 멀어진다. 대부분의 문제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 약이 최선의 해법인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잊으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쓰는 데는 심각한 위험이 따른다. 책을 안 쓰는 데 따르는 위험이 더 크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그 위험을 감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악몽으로 여기는 시나리오는, 어떤 사람들이 내 책을 부분부분 골라서 읽고는 내가 정신 장애 진단 및 치료에 반대한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되었거니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론이다. 그 사람들은 정신 의학이 부실하게 수행되는 경우에 대한 내 비판에는 과도하게 감응하고, 정신 의학이 훌륭하게 수행되는 경우에 대한 내 강력한 지지는 간과할 것이다. 나는 DSM-IV 경험을 통해서, 혹시라도 오용되거나 오해될 소지가 있는 글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사실, 저자는 자기 글이 적절히 사용될 때의 결과뿐 아니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왜곡될 때의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도 벌써 사이언톨로지를 비롯하여 정신 의학에 맹렬하게 반대하는 여러 집단들이 내 말을 오해를 낳는 방식으로 널리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이 책도 마찬가지로 오용하여, 정신 의학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지 말라고 부추길지도 모른다. , 다음과 같은 가상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진다고 상상해 보자. 몇몇 사람들이 내 메시지를 초보적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투약이 필요한 경우인데도 경솔하게 투약을 중단한다. 그래서 질병이 재발한다. 그래서 자살 충동이나 폭력 행위가 뒤따른다면? 내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당연히 기분이 끔찍할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담하게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현재 향정신성 의약품의 지나친 과용이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바로 눈앞에 닥친 위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으로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를 바란다. 우선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피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끝까지 치료를 받으라고 권고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내 비판은 정신 의학의 지나친 실태를 겨냥할 뿐, 정신 의학의 심장이나 영혼을 겨냥하지는 않는다. 사실 '정상을 구하는 것' '정신 의학을 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정신 의학이 응당 발 들이기 두려워해야 마땅한 영역으로 성급히 달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아픈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려는 강력한 세력들로부터 정상을 구해야 한다.

- 앨런 프랜시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서문



DSM(정신 장애 진단 통계 편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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