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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과학+책+수다

[지진학자 이기화 편] ③ 대한민국 1호 지진학 박사

Editor! 2015. 12. 1. 10:53

과학+책+수다 네 번째 이야기

『모든 사람을 위한 지진 이야기』 이기화 편

(주)사이언스북스에서는 오랫동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우리 과학자들, 그 분야의 대한민국 1호 박사라 할 이들의 책을 출간해 왔습니다. 개미와 거미 연구로 처음으로 세계적 권위자가 된 최재천 국립 생태원 원장의 『개미제국의 발견』, 진화 심리학으로 대한민국 1호 박사 학위를 받은 전중환 경희대 교수의 『오래된 연장통』, 영장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김산하 박사의 『비숲』 등이 그렇지요. 이기화 서울대 명예 교수 역시 우리나라의 지진학 분야에서 첫 번째 박사 학위 소지자입니다. 

이기화 명예 교수는 미국과 캐나다 유학 생활을 접고 서울대 교수로 돌아오자마자 홍성 지진을 만나 우리나라에 지진학 연구의 씨앗을 처음 심기 시작했습니다. 홍성 지진을 연구하며 국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일제 시대 지진 관련 보고서와 기록을 재발견했고, 고대사부터 근세사까지 지진학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역사 지진 기록들을 발굴해내 현대 지진을 연구하는 기초로 삼았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적으로 지극히 민감한 문제인 원전 안정성과 지진 재해 가능성에 대한 연구로까지 연구 영역을 넓혀 지진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제고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한국 지진학이 어떻게 성립하고 발전했는지를 확인하고, 원전 안전성과 직결된 문제였던 양산 단층의 활성 단층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눈에 들어나는 문제,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절대로 보이지 않는 문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미묘한 문제 속에서 미래를 읽어 내고자 하는 눈 밝은 독자라면 열독할 인터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기화 서울대 명예 교수.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1호 지진학 박사

SB 편집부: 선생님께서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지진학을 전공한 지진학 박사 1호 아닙니까.

이기화 : 예. 거의 그렇다고 봐야 되겠지요. 저하고 거의 비슷한 연배로 지진학을 미국에서 전공하신 분이 한 분 더 계세요. 한양 대학교에 계신 김소구 교수님이라고. 이젠 은퇴하셨는데,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죠. 아마 저보다는 2년 정도 늦을 겁니다. 제가 우리나라 최초의 지진학 박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저보다 전부터 지진을 연구하신 분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지진학으로 박사 학위를 하신 분은 없었죠.

SB 편집부: 왜정 시대에 일본에서 학위를 하신 분도 없었던 건가요? 일본이라면 당시 밀른이 지진학의 전통을 세운 이래 지진학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발전해 있던 때지 않습니까. 

이기화: 없었어요. 그 전에 탐사 지구 물리학을 하시는 선배들은 좀 있었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지진학은 제가 처음일 겁니다. 

SB 편집부: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지진학 1호 박사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선생님의 앞길을 간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없었을 테니까요. 책 본문을 보다 보면 가끔씩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느꼈던 설움 같은 게 묻어나던데 혹시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힘드셨던 부분이나 설움을 느끼셨던 부분 같은 걸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기화: 예. 사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학부 때 물리학을 전공했고, 군대에서 기상 장교도 했지만 지진학도 몰랐고, 지구 물리학도 모른 채 무작정 미국으로 갔었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죠. 대학원 1학년 때부터 지진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SB 편집부: 대학원 1학년 때부터요?

이기화: 처음 지진학을 공부할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지진학 수업 듣고, 지구 물리학 수업 들을 때 미국 친구들이 이런 것도 모르냐며, 이렇게 한심한 친구가 유학 왔냐며 놀리고 그랬어요. 첫 수업 시간에 파일런트 교수가 지각 균형설(isostasy) 얘기를 꺼냈는데, 학부 때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인 거예요. 제가 무슨 소린가 몰라 가지고 옆자리에 앉은 미국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 그래서 박사 학위 하겠냐고 힐문하기도 했죠. 그럴 정도였어요. 그러나 제가 물리 수학은 굉장히 잘했어요. 학부 때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죠. 지진학을 공부하게 되면 그것에 필요한 물리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저는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 친구들이 물리 수학을 공부할 시간에 저는 지진학만 깊게 팔 수 있었지요. 

SB 편집부: 동양인에 대한 시샘이나 깔봄이 섞여 있었겠군요.

이기화: 그러나 물리 수학 기초가 튼튼하니까 곧 입장이 역전되기 시작했죠. 지구 물리학 시험을 보면 제 성적이 월등했던 거죠. 숙제 같은 것도 제가 훨씬 더 계산 잘하니까 지도 교수님도 아무도 못 한 걸 제가 했다 하고 칭찬했죠. 그러니까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죠.  

애초에 제가 처음 미국 가서 하숙집을 구할 때 파일런트 교수님 댁에서 일주일간 신세를 졌는데, 이제 숙소를 구해서 나가기 전에 그분이 저를 당신 서재로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뭔 수학 책, 물리학 책을 내놓고 저한테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척척 대답을 했죠. 물리 수학은 자신 있었으니까요. 그랬더니 저보고 박사 과정으로 곧바로 들어오라고 그러시더군요. 

SB 편집부: 석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박사 과정으로요? 미국은 석사, 박사 과정 구분이 엄격하지 않습니까?

이기화: 엄하지요. 석사 과정은 보통 들어왔다가 과정 끝나면 그 성적을 보아서 박사 과정에 진입하거나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지도 교수가 석사 하라면 석사 하고, 박사 하라면 박사 하는 시대였죠. 파일런트 교수님은 제 물리 수학 실력을 평가하고 바로 박사 과정으로 들어오라 하셨던 거죠. 석사 과정 필요 없다 하신 거죠. 

SB 편집부: 굉장합니다.

이기화: 그렇지요.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 지질학 책을 처음 보기 시작했는데, 지질학 교과서 아시잖아요, 무슨 암석이 어쩌고, 저런 광물이 저쩌고, 외우고 읽어야 할 게 엄청나게 많잖아요. 원래 미국 유학 갈 때까지만 해도 안경 안 썼어요. 시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지질학 책 읽다 보니까 시력이 매우 나빠져 버렸죠. 지질학은 외울 게 무지 많은 분야거든요. 시험 공부하고 숙제 한다고 밤새우는 날이 많았죠. 처음에는 시력이 나빠진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운전 면허 딴다고 시력 검사를 하는데 그때 안경을 쓰라고 그러더군요.

SB 편집부: 아, 그때까지는 안경을 전혀 안 쓰고 계셨군요.

이기화: 안 썼어요. 그런데 자동차 면허 시험을 가서 테스트를 했더니 당신 안경 쓰라고 하더군요. 그다음부터 쓰기 시작했죠. 




지진학 연구는 나의 운명

SB 편집부: 시력을 바쳐 가면서 지진 연구를 하신 거군요.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나요. 선생님께서 이룬 학문 업적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군요. 선생님, 그러면 이제 미국 생활을 정리하시고 국내로 돌아오시게 된 사정을 얘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돌아오시기 전에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캐나다 빅토리아 지구 물리학 연구소였죠?

이기화: 예.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다음 일자리를 찾았지요. 몇 군데 지원서를 냈는데, 그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빅토리아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주도로 밴쿠버 옆에 있는데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에요. 거기에서 캐나다 정부가 운영하는 지구 물리학 연구소가 있었던 거죠. 혹시 빅토리아 가 보셨나요? 

SB 편집부: 못 가 봤습니다. 


인터뷰하는 이기화 교수.


이기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하나가 빅토리아예요. 태평양 바로 옆이고 동양 사람들도 많이 사는 도시죠. 그런 곳에서 들어와 일하라고 제안이 왔으니 곧바로 달려갔죠. 그런데 한 1년쯤 지나니까 한국에서 제 은사님께서, 제가 이제 그분을 다음 주에나 뵐 겁니다, 편지를 보내오셨어요. “서울대에서 지구 물리학 할 사람이 필요하니 자네 좀 오소.” 하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졸업장이나 박사 학위 논문 같은 걸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슬쩍 보냈죠. 그랬더니 곧바로 학교에서 제안이 왔어요. 그래서 좀 고생스럽겠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서 지구 물리학 분야를 개척해 보자 싶어 돌아오기로 결심하게 되었죠. 

SB 편집부: 은사님의 함자가 어떻게 되시죠?

이기화: 고윤석 선생님이죠. 지금 학술원 회원이시고, 제 대학원 때 은사님이시죠. 그분 권유와 도움으로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죠. 지금 후배 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교수 자리 잡으려면 정말 힘든데, 그것에 비하면 미안할 정도로 쉽게 자리를 잡았죠. (고윤석 서울대 명예 교수 역시, 미국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이론 핵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월급으로 1,200달러를 주는 일자리를 구했으나, 1964년 귀국을 결심하고 월급 80달러 주는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SB 편집부: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적 커리어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학문 수요가 맞아떨어진 거지요. 모든 눈송이는 자신이 떨어질 자리에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시대엔 학문적 수요가 자리를 만들고 마땅한 사람이 그 자리에 가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러면 가족은 어떻게 되셨나요? 결혼은 하셨는지요? 

이기화: 결혼했었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에 있었지요. 서울대에서 제안이 왔을 때 귀국할 결심을 보다 빨리 하게 된 게 어쩌면 집사람 덕분이었어요. 서울에 가서 살자며 결심을 재촉했죠. 하긴 집사람의 입장에선 한국 쪽이 생활하기 편했겠죠. 처가 가족도 많고, 생활도 여유 있는 편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집사람은 1년 정도 먼저 돌아왔어요. 저는 빅토리아 연구소에서 2년 꼭 채우고 돌아왔지요.

SB 편집부: 그때 자녀는 없었고요? 

이기화: 딸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낳았지요. 돌이켜보면 우리 삶에는 운명이라 해야 할까요, 큰 줄거리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그게 뭔지 잘 몰라서 그렇지……. 

SB 편집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홍성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게 그렇지 않을까요? 

이기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상 장교로 있다가 지진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미국에 갔더니 좋은 선생님 만나 가지고 제대로 공부하고 학위 따자마자 캐나다 연구소에 가고, 또 은사님이 끌어 주셔 가지고 서울대로 돌아오고, 돌아와서 보니까 지진은 한국에선 일어나지도 않아요. 참나, 나지도 않은 지진을 연구할 수도 없고, 그래서 전공을 바꿀까, 중력을 할까 고민하게 되었던 참에 홍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던 겁니다. 제가 서울대에 부임한 게 3월인데 10월에 홍성 지진이 나지 않았습니까? 당장에 제가 한국 제일의 지진 권위자가 되어 버렸어요. 그때부터 매스컴을 타기 시작한 겁니다. 그 이야기는 책에서도 좀 소개를 해 놨지요.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난 지진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사실 한반도는 지진 안전 지대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도 지진을 의식하지 않았거든요. 원자력 발전소라든가 댐이라든가 하는 것 모두 지진을 고려해서 설계하고 건설해야 하거든요. 활성 단층 같은 데 위에 지으면 안 되는 거고요. 홍성 지진이 일어난 해 4월에 고리 원전(고리 원전은 1971년 착공해서 1977년에 완공되었다.)이 상업 가동을 시작했고, 월성 원전이 1977년 10월에 착공에 들어갔기 때문에 홍성 지진은 원자력 산업계가 되었든 한전이 되었든 정부가 되었든 아주 중요한 문제였어요. 사실 원전을 짓기 전 한전에서 지질 자원 연구소에 용역을 줘 우리나라의 지진 문제를 조사하게 했었죠. 그때 그 조사 보고서를 입수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조사한 자료를 발견했어요. 그것이 1936년에 쌍계사 근처에서 난 지진, 그 지진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였죠. 그리고 와다 유지라는 총독부 기상청의 촉탁 연구관이 『삼국사기』라든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진 관련 기록만 모아 놓은 자료를 발견했죠. 일본 사람들은 지진에 관심이 많으니까 지진 자료를 그렇게 모았던 거죠. 그게 1,600개가 넘는 거예요. 그걸 보고 놀랐어요. 한반도에서 이렇게 많은 지진이 났구나. 

SB 편집부: 선생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야기 주제가 우리나라의 활성 단층 문제, 그리고 한반도의 지진과 원전 안전성 문제 같은 것으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살짝 곁가지 같은 이야기라서 살짝 뒤로 밀어두었던 주제인데, 사이언스북스 독자들을 위한 인터뷰인 만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죠.




양산 단층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SB 편집부: 그러면 좀 더 자세히 말씀 나눠 보죠. 한전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때는 와다 유지나 총독부에서 남긴 그 기록들을 참조하지 않았던 건가요? 아니면 활성 단층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건가요? 

이기화: 살짝 묘한 부분이 있어요. 실제로 지질 자원 연구소에서는 일제 시대 자료를 참조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원전이나 발전소 같은 게 다 수입된 거지 않습니까. 거기 매뉴얼에는 분명 활성단층이 있으면 짓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발전소 전문가든, 당시 우리나라의 지질 전문가든 활성 단층을 실제로, 제대로 조사해 본 사람도 없고, 활성 단층과 지진의 연관성에 대한 개념도 명확하게 서 있지 않았죠. 게다가 일제 시대 자료 어디에도, 활성 단층이라고 규정해 놓을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허투루 넘어갈 수밖에 없었죠.  

SB 편집부: 지진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 지진원이 한반도 안에 있는 활성 단층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씀인 거죠? 몰랐던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걸까요?


인터뷰하는 이기화 교수.


이기화: 일본 사람들이 정리해 놓은 지진 기록을 보면 역사적으로 경주에서 큰 지진들이 한 10번쯤 일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강력한 지진 때문에 죽은 사람도 나오고 그랬죠. 책에서 지진의 발생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처럼 지진은 단층에서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는 단층은 활성 단층이라는 게 지진학의 기본 상식이죠. 지진은 활성 단층에서 일어나요. 큰 지진은 큰 단층에서, 작은 것은 조그만 단층에서 일어나죠. 그런데 적어도 100명 넘게 사람들이 죽었다는 큰 지진이 경주에서 일어나려면 경주 근처에 큰 단층이 있어야 돼요. 양산 단층밖에 없어요. 지진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만 가지고 있었다면, 와다 유지 등이 남겨 놓은 지진 기록들만 보고도, ‘아,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원전 도입을 검토할 때에는 그런 개념이 약했죠. 또 역사 지진은 진앙 추정을 할 때 오차가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게 아니니까. 

SB 편집부: 그렇죠.

이기화: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지진의 지진원은 다른 곳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죠. 뭐 쓰시마 같은 일본일 수도 있고. 양산 단층이 아닌, 경주 근처나 쌍계사 같은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겠느냐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그런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에 고리 원전이 건설될 지역과 가장 가까운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일지 굳이 따지려고 안 했지요. 

SB 편집부: 굳이 따지지를 않았다고요? 

이기화: 안 했어요. 그래서 고리 원전이라든가 월성 원전은 한반도에 활성 단층은 없다 하는 전제하에서 지은 거지요. 

SB 편집부: 하지만 결국은 그것은 틀린 전제로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의 연구로 말입니다. 월성 단층에서 수많은 미지진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활성 단층이라는 것을 선생님께서 명확하게 발견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원전 건설이 끝나고 상업 가동이 시작된 다음에야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이라는 게 밝혀진 건데, 한반도에 활성 단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기화: 그렇죠. 그러나 좀 애매하게 넘어갔죠. 한국 사회 전체가 지진에 대해 잘 모를 때였으니까요. 게다가 원전을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산업화에서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반드시 추진해야만 하는 일이었죠. 지질 연구가 산업화를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게다가 명확히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깊이 파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 거예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1983년에 지질 자원 연구소가 양산 단층 주위에 설치한 미진계의 지진 기록을 분석해 보니 약한 지진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 일어났죠. 20세기 지진계로 발견한 미진과 역사 기록 상 그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대규모 지진들을 함께 고려하니까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임은 분명해졌어요. 


양산 단층에서 매일 미진이 발생한다는 이기화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 지면.


이기화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니까 세상이 발칵 뒤집혔죠. 신문에 톱기사로 계속 나고, 방송에도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지질 자원 연구소에서 원전 건설 때 나름의 역할을 했던 분과 저 사이에 논쟁이 붙은 겁니다. 그분들은 제 역사 기록 진앙 분석이 틀리다고 주장했어요. 왜냐하면 원자력 발전소 건설 예정 부지 근처에는 역사 지진의 지진원이 될 활성 단층은 없다고 결론지어서 한전에 보고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 미진 기록 분석을 보고는 부정을 못 해요. 과학적 사실이니까요. 책에서 인용하기도 했지만 결국 지진 자원 연구소 분 중 한 분이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일 확률은 50 대 50이다.”라고까지 했지요. 저를 부인할 수도 없고 자기들이 한 걸 틀렸다고 할 수가 없으니까, 어정쩡하게 마지못해 절충하듯이 결론을 내린 거죠. 학문 논쟁에서는 보기 힘든 일종의 물타기였죠. 결국 양산 단층이 활성 단층인 것으로 결론이 났죠. 그리고 지질 자원 연구소에서 저하고 논쟁을 벌였던 분이 세 분이나 연구소를 떠나야 했어요. 이게 문제가 되어 가지고 말이죠. 

SB 편집부: 저런.


양산 단층 일대의 미지진 연구. 한국동력자원연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는 1982년 8월 26일부터 12월 17일까지 양산 단층을 따라 5개 지점에 지진계를 설치하고 이 지역의 지진 활동을 조사했다. 이기화 교수는 이 지진 관측망에 기록된 다수의 규모 3.0 이하의 미소 지진들을 분석했다. 이 기간 중 매일 평균 1회의 미소 지진들이 양산 단층과 인접한 동래 단층과 언양 단층에서 발생했다.


이기화: 제가 평소에 술도 마시고 하던 친구들이었죠. 그 친구들이 연구소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로 마음이 아프대요. 

SB 편집부: 그래도 과학적 사실은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과학의 최종 심판관은 사실 아닙니까? 

이기화: 사실은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결국 다들 대학으로 갔으니까 다행이죠. 다 제가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지요, 일자리를 잃고 다른 데로 떠나는 걸 보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 일로 과학적 연구나 학문적 논쟁이라 해도 사람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죠. 그 뒤로 상당히 조심하게 되었죠.

SB 편집부: 그래도, 선생님. 이런 식으로 논쟁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국민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지진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겠죠. 지금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고리 원전을 연장 운영하지 않고, 폐로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새 원전을 삼척이나 영덕 같은 데서 찾는 것도 다 활성 단층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이기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요. 활성 단층이 있으면 골치 아파져요. 현재 지진을 관측하고, 지진을 관측하는 관측망을 정비∙관리하고, 지진 재해에 대비하는 연구를 기상청이 중심이 되어서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요. 홍성 지진 이후 매스컴과 기상청에서 나서서 이 문제를 부각시키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규모 지진이 날지 모르니 국가적으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니까 지진 관측망이라든가, 지진 재해 대비 대책이라든가 하는 게 구축되기 시작했죠. 

저는 기상청에서 지진 관측망을 구축하고, 지진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세울 적에 참여해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고, 내무부(현재의 안전행정부)에서 만든 지진 정책 자문 회의에 참석해 정책 자문을 하기도 했죠. 한반도 활성 단층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SB 편집부: 국가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동기 부여를 선생님의 연구가 한 셈이군요. 

이기화: 제가 그렇다고 하면 좀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뿐만 아니라 수력 발전소 같은 다른 모든 거대 건축물들, 다시 말해 지질 구조나 지질 안정성이 문제가 되는 건축물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새로 짓는 건물의 경우에는 지진 재해를 대비한 설계를 하도록 산업 자체가 바뀌었죠. 사실 원전 산업계의 사람들은 저를 처음엔 싫어했어요. 저 때문에 또 무슨 문제 생길까 봐 그랬죠. 하지만 결국은 함께 일하게 되었죠. 사실 우리나라 지진학 연구를 원자력 산업계가 많이 도왔어요. 연구비도 많이 대고 그랬죠.

SB 편집부: 그럼, 선생님, 좀 지겨우시겠지만, 한 번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양산 단층에서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최근 환경 운동가들의 양산 단층의 활성 단층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고리 원전뿐만 아니라 월성 원전도 정지시켜야 한다고, 그리고 경주 방폐장도 다시 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인터뷰하는 이기화 교수.


이기화:  양산 단층에서 지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100퍼센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보여 주었듯이 현재에도 작은 규모의 지진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활성 단층인 것입니다. 단지 지진 재해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지진이 발생 가능한가와 언제 발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역사 지진과 고지진의 연구 결과는 과거에 양산 단층에서 대략 규모 6.7의 지진들이 발생했음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층에서 발생 가능한 최대 지진은 보수적인 입장에서 규모 6.7과 7.0 사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언제 발생할 것인가? 이건 지진 예지의 문제이므로 쉽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지진 활동은 지난 2,000년 간 15∼18세기에 이례적으로 활발했고 그 나머지 기간에는 비교적 낮은 편이었습니다. 지진 활동의 주기설은 엄밀하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간 경주부근에서 규모 6.7의 지진이 대략 5회 발생했습니다. 이로부터 양산 단층에서 대략 500년 이상의 간격으로 규모 6.7 이상의 지진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SB 편집부: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화제를 좀 바꿔 보겠습니다. 역사 지진 기록 연구와 관련해서 좀 질문해 보겠습니다. 책을 보면 서울대 국사학과의 한영우 교수님과 함께 연구하신 걸로 나오던데, 이렇게 다른 분과의 연구자와 함께 연구해서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은 21세기에 와서 화제가 된 ‘통섭(consilience)'적 연구 아닙니까. 

이기화: 앞에서 이야기했듯 와다 유지라는 일본 사람이 우리 역사 기록에서 1,600개 정도의 역사 지진 자료를 정리해 놨어요. 한영우 교수님과 제가 공동 연구를 하며 추가 자료를 찾아냈지요. 그분이 역사 기록에서 지진 자료를 발굴하고 또 해석도 해 주시고 했죠. 그리고 제가 그걸 넘겨받아 그 지진의 진앙이라든가 규모 같은 것을 지진학적으로 분석했죠. 통섭적 연구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한영호 교수님께서 자료를 아주 많이 찾아 주셔 가지고 제가 많은 도움을 입었습니다. 재밌었죠. 제 책도 보내 드리고 가까운 시일에 식사를 같이 할 생각입니다.

SB 편집부: 통섭적 연구가 좋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좋은 선례겠군요. 지금도 그런 연구들이 어디선가 이루어지고 있을 텐데, 좋은 성과들로 이어지면 좋을 듯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이기화

1963년에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캐나다 빅토리아 지구 물리학 연구소(Canada Victoria Geophysical Observatory)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1978 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울 대학교 명예 교수이다.

1978년에 일어난 홍성 지진 이후 관심이 커진 첨단 지진학 연구 성과를 활용해 한반도의 지각 구조를 규명하고, 원자력 발전소 등 한국의 기반 산업 시설이 몰려 있는 양산 단층이 활 성 단층임을 발견하는 등 한국 지진학과 지구 물리학의 역사를 이끌어 온 선구자이자 산증인이다. 대한지구물리학회 1, 2 대 회장, 명예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지구물리・물리탐사학회 명예 회장이다. 과학기술부 장관상, 3・1 문화상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의 지질학(Geology of Korea)』(공저), 『한국의 제4기 환경』(공저) 등이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지진 이야기 [바로가기]


‘[과학+책+수다 지진학자 이기화 편]  다음과 같은 목차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1. 과연, 한반도는 지진 안전 지대인가? [바로가기]

2. 지구 과학 혁명의 현장에서 보낸 유학 시절 [바로가기]

3. 대한민국의 1호 지진학 박사, 이기화

4. 지진 예보, 과연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