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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여행] 2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첫 번째 이야기 본문

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2화 대륙 횡단을 떠나며‐첫 번째 이야기

Editor! 2016. 4. 27. 17:05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인류의 기원』의 머리말에서 북미 대륙 횡단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삶 속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으며, 당시 『인류의 기원』의 가제가 ‘고인류 여행’이어서 뭔가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책에서는 지면 사정상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대륙 횡단에서 아껴 둔 첫 번째 이야기 입니다. 책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글의 흐름을 위해 그냥 두겠습니다. 


2001년에 펜실베이니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1년간의 방문 교수 계약이 끝나고,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 인류학과의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죠. 이삿짐은 따로 보내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비행기 표로 이사하겠다는 우아한 계획을 듣자 지도 교수는 제가 직접 차를 몰고 떠나라고 권유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죠. 하루라도 빨리 캘리포니아에 가서 자리를 잡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륙 횡단을 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이사 비용으로 처리되지 않기 때문에, 고스란히 제 호주머니에서 충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이유였죠.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이런 소중한 기회는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지도 교수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두 손을 들었습니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1) 고속 도로는 피하고, 가능한 한 지방 도로를 이용한다. 

(2) 목표 지점을 정해서 도달하지 않고, 하루에 500마일을 운전한 다음에는 무조건 그 주변의 여관에서 묵는다. 

(3) 만날 사람은 다 만나고, 볼 것은 다 본다. 

휴대 전화가 없던 저는 먼저 911에만 연결되는 비상 전화를 구입했습니다. 


나를 실어다 준 차, 닷지 밴 보이저.


당시 몰고 다니던 1994년형 닷지 밴 ‘보이저’는 손잡이를 손으로 직접 돌려서 창문을 여닫고, 에어컨도 없는데다가 오디오 시스템이라고는 달랑 라디오만 되던, 그러나 잔고장은 전혀 없는 믿음직스러운 자동차였습니다. 게다가 다행히도 저는 텔레비전의 명작 드라마 시리즈인 「스타 트렉」의 팬이랍니다. 물 1박스와 크래커를 준비하고, 간단한 옷가지와 세면용품까지 차에 싣고 보니, 제 닷지 밴 ‘보이저’는 「스타 트랙」의 보이저호, 저는 그 속의 유일한 여성 함장인 제인 웨이 함장이 된 듯했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용감히 가는(“To boldly go where no one has gone before.”) 것처럼 기세 등등하게 길을 떠났습니다. 


1년 동안 머물렀던 펜실베이니아의 인디애나 시는 피츠버그 근교에 있는데, 영화 「아름다운 인생(It’s a Wonderful Life)」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지미 스튜어트의 고향이라는 점이 유일한 특징이었습니다. 피츠버그의 제철 산업이 몰락하면서 같이 스러져 가는 도시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잃자, 대학교에서 여러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여자들이 가계를 책임지게 되었죠. 미국에서도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생산직에 비해 근면 성실한 노동자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 편견의 문제가 있죠. 제철 산업을 대신하는 대형 고용주로 등장한 대학교에 인디애나 시민들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평생을 학교에서만 지냈던 제 입장에서 지식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였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죠. 그런 까닭에 지식인은 “공부한답시고 판판히 놀고 앉아서 입만 산 사람들” 이라는 그들의 인식을 접하고 대단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대학가를 벗어나면 흔히 만나게 되는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몰랐을 뿐이죠. 특히 미국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아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곱지 않은 눈빛은 팔짱 끼고 앉아서 고개를 외로 꼬는 강의실의 많은 학생들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제가 학교, 학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이 얼마나 허황된지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10여 년의 시간은 “나와 같지 않은” 학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법을 뼈아프게 연습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대학교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1875년에 설립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미시간으로 올라가 지도 교수께 인사를 드리고, 켄터키로 향했습니다. 서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켄터키는 미시시피 강의 지류 중 가장 큰 오하이오 강 유역의 분지입니다. 유럽 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북미 대륙의 원주민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며 강줄기를 따라 화려한 미시시피 문화를 남겼습니다. 


켄터키 주의 주도인 루이빌 동쪽, 오하이오 강에서 폭이 가장 넓은 곳이다. 


켄터키의 루이빌에는 대학원 시절에 친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해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같은 지도 교수의 학생으로 처음 만났죠. 베트남 전쟁 때 최후의 순간에 사이공을 탈출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미국으로 온 그는 같은 아시안계 여학생인 저를 특별히 잘 챙겨 주었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겹친 후로, 그가 박사 과정 중도에 진로를 바꾼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다시 연락을 하니 그는 큰 회사의 간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더군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학원으로 진학하고서, 그 꿈을 접고 다른 꿈을 꾸며 학교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서로 ‘가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저를 보며 “그때 계속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더라면……”이라고 생각하죠. 저는 그들을 보며 “그때 빨리 집어치우고 다른 길을 모색했더라면……”이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계획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실패자라고 평가하지 않을지 지레 주눅이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학교에 남아있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요. 한 시절을 살고 보니 결론은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길도 녹록하지 않다. 아니, 어떤 길이라도 모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시의 핵심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이라도 똑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가지 않은 길 (피천득 옮김)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The Road Not Taken by Robert Frost (1916)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북미 대륙을 횡단하며 거쳐 간 펜실베이니아 주의 인디애나, 미시간 주의 앤아버, 켄터키 주의 루이빌을 구글 지도에 표시했다. 679마일, 1093킬로미터를 이동했다.


(3화는 5월 25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 관련 도서 (도서명을 누르면 도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