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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천재, 이휘소를 배우다: APCTP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본문

책 이야기/사이언스 스케치

노력하는 천재, 이휘소를 배우다: APCTP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Editor! 2017. 11. 20. 17:09

아시아 태평양 이론 물리 센터(이하 APCTP)에서 이휘소 박사의 신념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진행해 온 최대 규모의 연례 추모 행사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Benjamin Lee Professorship)”! 지난 10월, 『이휘소 평전』 자료를 통해 행사 준비를 도운 저희 사이언스북스도 초대받아 다녀왔습니다.


노력하는 천재, 이휘소를 배우다

: APCTP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참 입자 발견, 게이지 이론 재규격화, 힉스 입자 명명 등으로 20세기 표준 모형 완성에 핵심 기여해 노벨상 메이커로 불리던 이휘소 박사. 그의 서거 40주기인 올해도 어느새 저물어 가네요.


이휘소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올해는 특별했습니다. 수년 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아쉽게 절판되었던 『이휘소 평전』(강주상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이 특별 복간된 해이기 때문이죠.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휘소 박사의 왜곡된 모습을 걷어내고 그를 올바로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휘소 평전』만의 공은 아니겠죠. 오늘은 APCTP에서 이휘소 박사의 신념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진행해 온 최대 규모의 연례 추모 행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2017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주최: APCTP, 한국 물리학회

일시: 2017. 10. 25 ~ 2017. 10. 28

장소: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포스코 국제관

초청 연사: 헤라르뒤스 토프트(Gerardus `t Hooft)


APCTP는 세계 16개 회원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모이는 학문의 장인 만큼 이휘소 박사의 학문적 열망을 항상 기억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라는 말에서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죠.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리학을 사랑했던 그의 연구 자세를 본받고자 매년 그의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노벨상은 후보자도 많고, 또 저의 공적이 아직 제일 많은 것이 아니기에 수년 내 받을 것을 바라지 못합니다. 제가 능력이 있는 대로 일생 연구에 더 주력하겠습니다. 능력, 행운 모두 있어야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휘소



노벨상 수상자이자 이휘소의 절친, 정신적 스승이었던 양전닝(楊振寧) 박사가 APCTP 초대 총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흥미롭네요.


1977년 이휘소 추모 국제 학술 회의. 양전닝 박사도 참석했다.
사진: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제공.


특히 올해는 서거 40주기를 기념해 더욱 다양한 초청 강연과 세미나, 전시회를 선보였습니다.

이휘소 서거 40주년 기념 디자인월.


『이휘소 평전』 저자이자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강주상 교수가 고려 대학교에 기증한 이휘소 박사의 유품들. 고려 대학교 박물관의 도움으로 특별 전시가 성사되었죠.


이휘소 서거 40주년 기념 노트. APCTP에서 특별 제작한 노트로 페르미 연구소 소장이었던 로버트 윌슨의 추모사와 ‘노벨상 메이커’로 평가받았던 이휘소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물리학자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자인 비아체슬라프 무카노프(Viatcheslav Mukhanov) 교수를 포함해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한데 모인 본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단연 199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헤라르뒤스 토프트 교수였습니다.


토프트 교수(오른쪽에서 네 번째), 무카노프 교수(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김낙우 경희 대학교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된 레너드 서스킨드 교수의 『우주의 풍경』을 번역하시기도 했죠.), 정우성 APCTP 사무총장(왼쪽에서 두 번째), 그리고 행사를 기획한 APCTP 스태프들.

사진: APCTP 제공.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토프트 교수는 박사 과정 시절에 이미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해결해 스승인 마르티뉘스 펠트만(Martinus Veltman) 교수와 함께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토프트에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안겨 주고, 그의 업적이 학계에 인정받도록 도왔던 이가 바로 이휘소 박사라는 사실은 이제 너무나도 유명하죠.

“양자 역학에 대하여 엄청나게 공부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었다. 그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이휘소 평전』 17쪽


토프트 교수가 이휘소 추모 행사 초청에 흔쾌히 수락한 것은 아마도 그들 사이의 오랜 우정 때문일 것입니다.


토프트 교수는 행사 기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양자 블랙홀과 시공간 구조”, “아원자 입자에서 블랙홀까지, 물리 세계의 전경”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을 선보였습니다. 이중에서도 둘째 날 ‘APCTP 특별 세션’에서 선보인 강연 “초기 표준 모형: 이휘소를 기억하며”는 특히 많은 물리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토프트 교수의 특별 세션 강연.

사진: APCTP 제공.


본 행사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특별 세션은 토프트 교수를 포함해 국내외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초청 강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 토프트 교수는 20세기 표준 모형 완성의 기틀을 마련했던 이휘소 박사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표준 모형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빼 놓을 수 없는 양―밀스 게이지 이론. 입자 물리학에서 힘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게이지 입자. 게이지 입자로써 힘을 설명하는 이론이 게이지 이론입니다.



우주의 네 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에 전자기력에 대한 게이지 이론만이 정립된 상태였던 20세기 초. 양전닝 박사와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밀스(Robert Mills)에 의해 약력 및 강력의 일부를 설명하는 두 번째 게이지 이론이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밀스 게이지 이론입니다. 약력의 게이지 입자 W, Z 보손과 강력의 게이지 입자 글루온은 표준 모형을 이루게 되었죠.

이 이론은 당대 많은 입자 물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휘소 박사도 마찬가지였죠. 그는 광자와 달리 질량이 0이 아닌 W 보손을 게이지 이론에 반영하면 대칭성이 깨지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는 프랑스 물리학자 장 루페 제르베(Jean Loup Gervais)와 함께 ‘자연은 대칭성을 깨서라도 더 안정적인 상태를 선택한다.’라는 자발적 대칭 파괴 이론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해 학계를 놀라게 했죠.



양―밀스 게이지 이론은 토프트 교수 자신의 학문적 성장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합니다. 이 이론으로 어떤 물리량을 계산하면 결과가 무한대가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재규격화에 성공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자신에게 문제 해결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학계에 알렸던 이휘소 박사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휘소 박사는 이미 최정상급 물리학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아직 국적상으로 한국인이었던 그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고에너지 물리학 회의의 미국 대표단으로 선정될 정도였으니 말이죠.


1973년 미국 대표단으로 고에너지 물리학 회의에 참석한 이휘소 박사가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찍은 사진.


당시 발견되었던 중간자(meson)와 강입자(hadron)들에 대한 개괄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이중 K 중간자는 이휘소 박사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했죠. 그리고 그림에 나와 있지 않지만 이후에 그가 발견할 제이/프사이는 참 쿼크의 존재를 처음 증명한 기념비적인 강입자입니다.

W 보손, 참 쿼크 등 표준 모형 곳곳에 이휘소 박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죠.



토프트 교수의 강연을 후지카와 가즈오 교수가 이어받았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휘소 박사와 자발적 대칭 파괴와 중성류에 대한 두 편의 논문을 공동 집필했습니다. 이휘소 박사와 공동 연구한 “특권”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노력하는 천재”라는 주제로 이휘소 박사를 회고했습니다.


특히 힉스 입자와 관련한 이휘소 박사의 업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자발적 대칭 파괴 현상으로 대칭성이 깨질 때 질량이 0인 입자가 발생합니다. 1964년 이휘소 박사는 이 입자의 정체를 연구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피터 힉스(Peter Higgs)가 이 논문의 영향을 받아 힉스 메커니즘과 힉스 입자의 존재를 제안했는데, 이에 ‘힉스’라는 명칭을 처음 써서 학계에 보편화시킨 사람이 바로 이휘소 박사입니다.

힉스 입자의 이름을 처음 붙인 이휘소 박사의 업적을 설명하는 후지카와 가즈오 교수.


세 번째 강연자 김제완 교수는 “내가 아는 이휘소”라는 주제로, 미국에서 이휘소 박사와의 학문 교류 경험을 떠올리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펴낸 원로 물리학자이십니다.) 특히 1974년 서울 대학교 AID 사업의 부위원장이었던 그는 이휘소 박사를 미국 측 위원회 위원으로 천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과학 교육 발전에 관심을 갖고 실천에 옮겼던 이휘소 박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제완 서울 대학교 명예 교수의 특별 세션 강연.

사진: APCTP 제공.


서울 대학교 AID 사업차 귀국 중이던 이휘소 박사는 김진의 교수와도 친분을 쌓습니다. 이휘소 박사가 서거하고 “이휘소 추모 소립자 물리학 심포지엄”이라는 국내 최초 입자 물리학회에 참석하기도 했죠.

김진의 서울 대학교 명예 교수의 특별 세션 강연.

사진: APCTP 제공.



그는 “Ben Lee in 1977”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휘소 박사의 마지막이자 학문적 절정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이휘소 박사가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남긴 유작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하한선」은 암흑 물질의 정체를 탐색한 최초의 입자 물리학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휘소 박사가 말한 암흑 물질의 후보 "무거운 중성미자"는 현재까지 김진의 교수가 꾸준히 연구해 온 액시온(axion)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휘소 박사의 힉스 관련 연구 성과에 영향을 받아 후속 이론을 발전시켜 2012년 CERN에서 힉스 입자 발견 실험에 참여한 최성열 전북 대학교 교수의 강연 “The role of the Higgs boson mass”가 뒤따랐습니다.

여섯 번째 강연자 권영준 연세 대학교 교수 역시 이휘소 박사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중간자 붕괴 현상과 이를 이용한 참 쿼크 발견에 대한 연구 내용을 계승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외에 『이휘소 평전』 증정 행사, 취업 세미나, 실험 기자재 판매 부스 등 곧 학계로 진출할 물리학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휘소 평전』 증정 행사 준비 모습.

사진: APCTP 제공.


올해 더욱 성황리에 마친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세계 정상급 물리학자부터 물리학의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까지 한데 모여 매년 이휘소 박사를 추모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프로그램입니다.


무엇보다 반세기의 세월을 뚫고 이휘소 박사의 열정과 신념을 직접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이휘소 박사와 관련해 또 어떤 추억들을 공유할지, 이휘소 박사의 어떤 업적을 계승해 연구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오늘 저녁에는 각자 세계 입자 물리학계를 주도했던 이휘소 박사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아직 이휘소 박사에 대해 잘 모르신다고요? 사이언스북스가 쉽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년에는 독자 여러분도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꼭 가 보아요, 벤자민 리 프로페서십.



※ 관련 도서 ※


강주상 『이휘소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