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cienceBooks

mankind 말고 humankind 이야기를 해 봅시다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mankind 말고 humankind 이야기를 해 봅시다

Editor! 2018. 5. 21. 12:21

이상희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 교수와 윤신영 과학동아 기자가 함께 쓴 『인류의 기원』이 드디어 10쇄를 찍었습니다. 올해 들어 미국과 대만에서도 출간되는 등 『인류의 기원』의 진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는 10쇄를 찍으면서 표지와 본문에 작은 변화를 줬습니다. 인류 진화 단계를 표현하는 그림에서 남성을 여성을 바꾸고 사냥이나 발명의 순간을 표현하는 그림에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거죠. 고인류학에 숨어 있는 성 역할에 대한 오랜 편견을 바꿔 보자는 시도입니다. 아마 고인류학을 다룬 대중서에서는 세계 최초의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 진화사의 사라진 반쪽을 찾기 위한 저자 이상희 교수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자가 직접 말하는, 『인류의 기원』의 새로운 시도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mankind 말고 humankind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인류의 기원』 10쇄 출간 기념 저자 특별 기고


2018년, 드디어 『인류의 기원』 10쇄가 나왔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10쇄에서는 표지와 본문 속 인류 그림 일부가 바뀌었습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말이지요. 이중에서 인류 진화 단계를 표현하는 새로운 그림을 활용해 『인류의 기원』 10쇄 기념 엽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그림을 바꾸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기존 『인류의 기원』 표지(좌) 새로운 『인류의 기원』 표지(우)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인류의 기원』 10쇄 표지. 1쇄 표지와 바뀐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 10쇄 기념 엽서 그림. 여성을 등장시켜 인류 진화 단계를 표현하고 있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인류 진화사에서 지워진 주인공

2015년 9월 처음으로 출간된 『인류의 기원』을 두 손으로 받았을 때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책을 한 장 한 장 훑어보면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묘사하는 그림 대부분이 남성으로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은 몇 개 없었어요. 빨래를 하거나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 전부였습니다.



빨래를 하거나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만 여성을 묘사했던 『인류의 기원』 기존 그림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이왕 책이 이렇게 나왔는데 어쩔 수 없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인데 여자, 남자를 굳이 가를 필요가 없지. 여자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 수도 없는데, 뭐…….


애써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참 이상하죠? 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차례 교정지가 오갈 동안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았지만 글만 보이고 그림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mankind에서 humankind로

2017년에는 『인류의 기원』 영문판 작업을 하느라 한 해를 모두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원고뿐만 아니라 책 제목, 표지 디자인, 본문 그림까지 모두 직접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 영문판 출간을 맡은 미국 출판사 노튼(W. W. Norton)  사에서 제안한 책 제목은 “Close Encounters with Mankind: A Paleoanthropologist Investigates Our Evolving Species”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Mankind” 대신 “Humankind”를 써 달라고 이야기했는데, 노튼 측에서 선뜻 그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최종 제목은 Close Encounters with Humankind가 되었지요. 이때다 싶어서 앞서 말한 그림들도 모두 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노튼 측에서는 그림들의 느낌이 좋은데 왜 빼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남성 편향적인 그림이 불편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노튼 측에서는 (주)사이언스북스를 통해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을 더 그려 올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한국어판이 9쇄까지 나온 마당에 책의 그림을 새삼스럽게 다시 그려 달라고 할 수 있을지, 소심한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마침 제가 한국에 있던 여름이었습니다. (주)사이언스북스 사옥 근처 냉면집에서 노의성 주간과 평양 냉면을 먹으면서 그냥 말이나 꺼내 보자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밍밍하던 평양 냉면이 목에 걸리는 듯했습니다. 거절당하면 무안한 김에 열심히 냉면 먹는 척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마치고 냉면 사리만 노려보던 제 귀에 놀라운 대답이 들렸습니다. 비용을 더 들여서라도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번에는 기쁜 마음에 냉면이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석기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농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정말 남성이었을까?

막상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시작되자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그려진 고인류 그림은 흔치 않아서 일러스트레이터가 참조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나오는 몇 안 되는 그림은 동굴 속에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불 옆에서 고기를 굽거나 옷을 만드는 등 살림하는 장면 위주였죠. 결국 『인류의 기원』 기존 그림 중 몇 개를 여성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석기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땅을 가는 모습을 여자로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석기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땅을 가는 모습으로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 『인류의 기원』 10쇄 그림들(우)과 기존 그림(좌) 비교.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주)사이언스북스, 그리고 일러스트 작업을 맡은 토끼도둑 작가와 수차례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그림들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것들은 한 장 한 장 모두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들은 『인류의 기원』 영문판 Close Encounters with Humankind 표지에 실려서 미국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인류의 기원』 영문판 표지.



남자들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드디어 한국어판 『인류의 기원』에도 이 그림들이 실립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인류 진화 단계를 묘사하는 그림입니다. 흔히 남성으로 표현되는 그림이죠.


‘남자들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림으로 보니 그 메시지가 유난히 더 강렬하게 다가오더군요. 이렇듯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그동안 남자들만 나오는 그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류 진화 단계를 남성으로 표현한 기존 그림(좌)과 여성으로 표현한 새로운 그림(우).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저는 이번에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바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번 보이기 시작하니까 계속 보이더군요. 한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계속 내게 되더군요. 『인류의 기원』 10쇄 기념 엽서를 볼 때마다, 눈을 뜨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이 기억을 매번 되새길 것 같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인류 진화 관련 전시물들은 아직도 남성 중심적입니다. 남성은 사냥을 하고 도구를 만들고 동굴 벽화를 그리고 밭을 갈고 가축을 돌봅니다. 여성은 바닥에 앉아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살림을 하지요. 진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남성으로 그려집니다. 한번 바꿔 보면 어떨까요? 이 엽서를 여러분이 사는 곳 근처 박물관에 보내 주세요. 인류의 진화사에서 지워진 주인공을 되찾아 달라는 글과 함께 말이지요.”

―이상희(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의 기원』 10쇄 기념 엽서에서





이상희

서울 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 인류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마쳤다. 일본 소고켄큐다이가쿠인 대학교(総合研究大学院大学, 소켄다이)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대학교(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IUP)에서 방문 조교수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at Riverside, UCR) 인류학과에서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현재 정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하여 꾸준히 연구해 왔으며 30편 이상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전문인뿐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인류의 진화라는 주제에 대해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인류의 기원』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