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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저서, 옮긴이 후기 모음 『코스모스』, 『콘택트』,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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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저서, 옮긴이 후기 모음 『코스모스』, 『콘택트』,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Editor! 2015. 3. 9. 11:10




칼 세이건 저서, 옮긴이 후기 모음

『코스모스』, 『콘택트』,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코스모스』 보급판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혹자는 악화 일로에 있는 지구 자연환경의 보존이라고 대답합니다. 또 핵전쟁의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시키는 일이 지구인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인권과 사회 정의의 범세계적 구현이야말로 우리의 선결 과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지구인들이 서둘러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해결하기가 무척 어려운 과제입니다. 저는 이러한 난제들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화두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위상을 우주적 관점에서 조망하게 될 때, 앞에서 열거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찾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위상과 정체를 우주적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독자를 다그치고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의 설득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코스모스」의 13부작 시리즈가 방영될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3퍼센트가 「코스모스」를 시청했다는 통계가 그 성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코스모스』의 교정 작업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던 와중에, 저는 일본 고베 시 근처 아와지 섬에서 열리는 행성과학 국제 여름 학교에 참가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9월 초순이었습니다. 대만, 독일, 미국, 인도, 일본, 프랑스, 한국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진 학자와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박사 과정의 학생 60명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외계 행성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집중 강의가 일주일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행성 간 고체 입자에 관한 강좌를 하나 맡았고, 이들과 한데 어울려 그 분야 전문가들의 열강을 듣기도 하면서, 태양계 바깥에서부터 생명 세계와 문명 사회를 찾으려는 인류의 원초적 꿈이 현재 어느 수준까지 실현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8월 말까지의 집계에 따르면 태양계 근방 별들 중에서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고 확인된 별들이 약 130여 개에 이른다는 통계가 하나의 가늠자 역할을 해 줬습니다.

  하지만 존재가 확인된 외계 행성들 거의 대부분이, 목성 또는 목성의 10여 배 규모에 이르는 질량을 갖는 거대 기체 행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의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지구형 행성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구형 행성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행성의 검출 방법이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 천문학자들은 외계에서 지구형 행성을 찾는 것도 단순한 시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름 학교를 마치고 아와지 섬에서 사가미하라 소재 우주 항공 연구소로 돌아와 보니 특별 기자 회견의 공고가 복도 게시판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연구소 소속의 연구원이 아주 최근에 화가畵架자리 베타 별 주위에서 몇 개의 고리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기자 회견이었습니다. 그 베타별의 고리에서도 언젠가는 행성이 태어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제 연구실로 들어와서 밀린 전자 우편물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계 행성에 관한 특별 세미나가 바로 다음날 미타카 소재 일본 국립 천문대에서 열린다는 전갈도 우편물 더미에 숨어 있었습니다. 세미나에서 발표될 한 논문의 초록이 제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구경 8.2미터의 스바루 망원경으로 마부자리에 있는 어느 별 주위에서 회전 원반체를 발견했는데 태양계에서 행성들이 태어나던 당시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교정 작업을 서둘러 끝내고 서울 대학교에서 열리는 제6차 동아시아 천문학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저는 10월 13일 하네다와 김포를 연결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옮긴이 후기」를 보내 달라는 출판사 편집자의 빗발치는 독촉을 가슴에 간직한 채, 노트북을 열어 아와지 섬에서 시작한 이 글을 마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결과는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그 대신 저의 머릿속에서는 우주와 생명 진화의 드라마 한 편이 계속 돌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대폭발, 은하와 별의 탄생, 핵융합을 통한 무거운 원소의 합성, 초신성 폭발, 성간 물질 중 금속 함량의 증가, 암흑 성간운의 중력 수축, 회전 원반체의 출현과 중력 불안정, 미행성의 형성과 지구형 행성의 성장, 지구 생명의 탄생, 과학 기술 문명의 진화로 연결되는 길고 긴 드라마였습니다. 핵융합 반응에서 타고 남은 재가 의식을 갖추고 자신의 주위를 인식하게 되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떼려고 해도 결코 뗄 수 없는 우주와 인간의 뿌리 깊은 연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문명의 발달이라는 얼굴을 한 인류의 자기 파멸 가능성도 내게 일깨워 줬습니다. 이만하면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거두려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셈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말입니다.

  어제는 담당 편집자의 노란색 쪽지가 드디어 회의장 안으로까지 전달됐습니다. 마침 오늘은 동아시아 천문학 대회의 오후 일정이 시내 관광으로 잡혀 있었습니다. 「옮긴이 후기」를 완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지난 나흘 동안에 있었던 열띤 토의를 지금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스바루 망원경이 촬영한 회전 원반체들의 다양한 모습이 스크린을 생생하게 장식했으며, 동반 행성의 존재가 확인된 별의 총수도 두 달이 채 못 되는 사이에 벌써 140여 개로 늘어나 있었고, 행성을 네 개씩이나 거느린 별도 세 개나 발견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그러나 지구형 고체 행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9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이어진 짧은 여정에서 옮긴이는 외계 행성계를 찾으려는 현대 천문학의 숨 가쁜 달리기를 추적한 셈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지구형 고체 행성의 존재는 아직 확인 되지 않았습니다.

  행성계의 형성은 자연의 희귀한 선택 사항이라기보다, 항성의 생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하나의 필수 현상입니다. 이제 현대 천문학은 이론과 관측 양쪽 측면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 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은하수 은하에는 태양 행성계와 같은 행성계가 수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두 달 사이에 경험한 속도로 행성의 발견이 이어진다면, 외계에서 지구형 행성을 찾는 날이 곧 오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날은 지구인이 우주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그날부터 인류는 자신의 우주적 위상을 새롭게 의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제가 번역하기를 잘했다고 내심 기뻐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그러한 의식 전환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고, 저의 번역이 우리의 의식 전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네 해 전의 일입니다. (주)사이언스북스 편집부의 권기호 씨가 코스모스의 번역을 저에게 종용해 왔을 때, 저의 즉각적 반응은 한마디로 주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현대 천문학의 엄청난 변화를 알고 있기에 20년이나 지난 책을 이제 번역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정적 반응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번역을 한다면 주註를 많이 달아야 하겠구나. 그런데 나는 주가 많이 달린 책을 싫어하지 않는가. 그러나 권기호 씨의 은근한 설득은 집요했습니다. 그는 이 책의 독자층이 두꺼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코스모스」 시리즈를 즐기고 자란 지성인들에게는 사유의 지평을 넓혀 줄 것이고,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는 꿈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번역·출판을 기획한 편집자 자신이 「코스모스」 시리즈를 보고 자란 세대였습니다.

  저는 꿈, 사유의 지평, 우주와 인간의 관계 등 그가 제시하는 몇 마디 키워드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인이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달 때문만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소망 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 준 꿈의 위력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것입니다. 외계 생명의 발견이야 가까운 장래에 기약할 수 없겠지만 어느새 140여 개에 이르는 외계 행성의 존재가 태양계 밖에서 확인되었으니 외계 생명의 존재도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외계를 향한 인류의 끈질긴 외침이 언젠가는 외계 문명과의 교신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온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인류 역사를 바꾼 고전 중의 하나로 재평가될 것입니다.


  번역을 약속하고 첫 페이지를 옮기면서부터, 저는 ‘번역하기는 고문이다.’라는 명제를 재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천문학이 주를 이루지만, 천문학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코스모스에서 인간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초점에 이르기까지 과학뿐 아니라,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 현대 사회학, 정치 심리학 등의 지식이 두루 필요했으니, 『코스모스』의 번역은 맨발로 가시밭길 걷기였습니다.

  저를 곁에서 도와주신 고마운 이들이 계십니다. 서양 고전에 관한 사항은 멀리 네덜란드에 계신 박휘근 학형이 도와주셨습니다. 동양 고전에 무지한 저를 외우 김소영이 줄곧 깨우쳐 줬습니다. 생물학, 화학, 고생물학 등에 관한 사항은 홍전, 오창식, 홍발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고대 중국 신화의 등장인물에 관해서는 중국 윈난雲南 천문대 바이 지밍 박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화성에 관한 사항은 김유제 박사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울 대학교 구내 식당에서 여러 동료 교수들로부터 받은 많은 가르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전문가로서 옮긴이의 질문에 충실한 답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필요한 자료를 보여 주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번역 내용에 대한 최종 책임은 물론 저 자신에게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아내의 독려와 비판도 이 책을 여기까지 오게 한 큰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번역 작업을 은근과 끈기로 참아 주신 (주)사이언스북스의 편집부 여러분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4년 겨울

관솔재에서 

홍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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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특별판을 펴내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돌아온 지 어느새 2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외계에서 발견된 행성체의 개수는 140개에서 180여 개로 늘어났습니다. 처음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겨 내놓을 때에는 20여 년의 나이를 먹은 『코스모스』를 21세기의 젊은 독자들이 어떻게 대할지 많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학생 시절에 책을 읽었던 분은 예전 『코스모스』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과 행복을 이야기하셨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소중한 책을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영영 돌려받지 못한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이 책의 귀환을 환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코스모스』가 추억의 책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KBS 「TV 책을 말하다」에서는 ‘눈물나게 재미있는 과학책’으로, 네이버와 교보문고에서는 ‘올해의 과학책’으로, 대한민국 학술원에서는 ‘우수 도서’로,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에서는 ‘올해의 과학책’으로, 《동아일보》에서는 ‘한국의 과학자들이 청소년들에게 권하는 과학 도서 1위’로 선정해 이 책이 가진 현재적 가치를 널리 알려 주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종의 책이 쏟아지고, 책의 수명이 몇 개월이다 하는 부박`浮薄한 현실 속에서 사반세기의 나이를 가진 『코스모스』가 여전히 사랑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대폭발의 순간에서 인류의 진화까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던 칼 세이건의 방대한 지혜와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우주적 상상력이 지금도 살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적 이웃을 향한 손짓, 우리의 배움이 인류의 지혜를 도약시켜 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모든 글에서, 모든 행동에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광활한 우주를 향한 호기심 어린 물음과 탐구의 열정은 인간의 ‘못 말리는’ 본성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코스모스의 탐구가 시작된 수천 년 전의 고대 문명에서부터 칼 세이건이 살아 있던 시대를 거쳐 새천년을 맞이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모든 학문의 근본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유려한 문장 밑에서 약동하는 이 원동력은 표면적인 정보의 낡음과 시대를 초월하여 『코스모스』를 『코스모스』이게 하는 가치입니다.

  2006년 12월 20일은 칼 세이건 서거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에 맞춰 좀 더 많은 독자들을 위하여 이 특별판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소중한 사진이지만 컬러 사진을 덜어내고 판형을 줄여 좀 더 많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있게끔 책을 다듬어 봤습니다. 그리고 양장본에 있었던 몇 가지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게다가 칼 세이건의 부인인 앤 드루얀 여사가 세이건의 10주기를 기념해 쓴 글을 보내 주어 한층 의미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더욱 많은 분들이 이 보급판을 통하여 세이건의 우주적 상상력과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람이든 책이든 주위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자랍니다. 『코스모스』를 사랑해 주신, 그리고 앞으로 사랑해 주실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2006년 겨울

홍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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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



  진부한 소재의 공상과학 소설은 공허하고,그렇다고 본격 과학 서적을 펼쳐볼 엄두는 나지 않는 우리에게 칼 세이건은 참으로 멋진 선물을 해주었다. 과학자를 꿈꾸는 중고생도,과학 교과서가 한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어른도,또 과학 연구에 몸담은 학자도 모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 확신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우리가 이미 한바탕 치러낸 새 천년 진입기이다. 덕분에 칼 세이건이 상상했던 새 천년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을 비교해 보는 색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각지의 분쟁은 여전하고 또한 유감스럽게도 과학 기술 수준은,최소한 천문 우주 분야에서는 칼 세이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인 듯하다.

  외계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위한 과학자의 끈질긴 노력이 종교나 정치 제도와 맞부딪치다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자성(自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면서,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초라한 우리 모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거기서 겸허함과 삶의 소중함을 찾는 동지(同志)들이 생겨날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다.

  과학과 관련된 용어나 내용의 번역에 있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독자 여러분과 칼 세이건의 아량을 구한다.


2001년 12월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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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종교가 과학 앞에서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 



1.

  이 책을 번역하면서 오랜만에 칼 세이건의 주요 저서를 다시 정독하다가 『코스모스』의 4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바로 이마누엘 벨리코프스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목성에서 만들어진 혜성이 지구 궤도에 근접함으로써 「구약 성서」에 나오는 여러 기적적인 자연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한 인물인데, 지금은 철 지난 사이비 과학 이론으로 치부되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벨리코프스키의 책 『충돌하는 세계(Worlds in Collision)』는 1950년에 맥밀런 출판사에서 출간되자마자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곧이어 사이비 과학 책이 큰 인기를 끄는 데에 분개한 일부 과학 전공 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맥밀런의 과학 교재 불매 운동이 추진되었다. 주요 수입원인 교재의 판로가 막힐 것을 우려한 맥밀런은 결국 벨리코프스키의 책을 절판시키고, 그 책을 기획한 편집자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맥밀런에서 근무하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는 회고록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언론 탄압 행위였다고 개탄한 바 있다. 칼 세이건으로 말하자면 한때 공개 토론회에도 참석해서 벨리코프스키를 비판한 바 있었으므로, 어쩌면 『충돌하는 세계』의 절판을 기뻐해야 할 입장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코스모스』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벨리코프스키의 주장이 틀렸음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벨리코프스키 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 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내가 이 대목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칼 세이건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솔직히 인정하자. 『코스모스』는 물론이고 저서도 여럿 접했지만 이제껏 한번도 그를 진지한 과학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뭔가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는 인물, 과학자라기보다는 방송인이 아닌가 하고 낮춰 보기 일쑤였다. 이런 오해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심지어 동료 과학자들조차도 그의 명성을 시샘한 나머지 그의 공로마저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았다니 말이다.

  물론 칼 세이건은 탁월한 쇼맨십의 소유자였으며, 그런 능력 덕분에 대중과의 의사 소통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서 그는 진지한 과학자였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잘못된 주장이라도 발언의 기회는 있어야 하며, 다만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벨리코프스키의 잘못된 이론을 비판하면서도, 상대방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2.

  1985년에 있었던 기퍼드 강연을 토대로 한 이 책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세이건은 과학의 입장에서 종교의 기본 가정, 특히 신에 대한 개념을 비판적으로 음미한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칼 세이건은 (사실은 그 어떤 과학자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종교를 과학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위안과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의 가치를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해 대중을 미혹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저항한다. 

  그 방법에서도 세이건은 냉소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무기는 논리와 인내심이고, 어쩌면 전자보다 후자가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유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설명하고 반박하고 납득을 시켜도, 대중은 항상 “그래도 혹시……” 하고 운을 떼게 마련이다.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질문과 답변」만 봐도 맥이 빠지지 않는가. 기껏 한참 동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UFO며 심령술이며 토리노의 수의며 버뮤다 삼각 지대에 관해 질문하고 있으니 말이다.

  충분히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세이건은 최대한 겸손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그런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성실한 답변을 내놓는다. 어쩌면 그의 답변에는 불만스러워 한 사람들조차도, 그의 성실하고도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호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합리적 사고보다는 갖가지 망상과 미신에 곧잘 끌리는 것만 같다. 어째서일까? 일단은 인간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던 것을 계속 믿으려 하게 마련이고, 뭔가 변화를 싫어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정신에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면도 있지만 보수적이고 완고한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뭔가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찔러 주고 괴롭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일찍이 스스로를 무지몽매한 군중을 깨우쳐 주기 위해 붕붕거리며 성가시게 괴롭히는 ‘등에’에 비유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칼 세이건은 현대 과학계의 소크라테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오늘날 종교에서 극단적 근본주의가 대두하는 까닭은 그만큼 현대에 들어서 종교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도 줄곧 언급되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를 비롯한 오늘날의 주요 종교는 대부분 고대와 중세에 확립된 교리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지식은 그 깊이나 넓이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현대화, 또는 취사선택은 필연적이다. 일점일획까지 따르려는 문자주의는 어리석은 고집에 불과하다.

  물론 고대인의 지혜 모두가 무용지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통찰만큼은 여전히 탁월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계나 우주의 원리에 관한 고대인의 사고 방식을 우리가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가령 철학을 공부할 때에는 고대 그리스나 고대 중국의 주요 사상가들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그들의 세계관까지 우리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건 반대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가령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억측이지만 인간론은 탁월했다. 공자와 장자의 사상이 오늘날도 감탄을 자아내는 까닭은, 비록 우주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인간사의 이치에 관해서는 정확히 꿰뚫어 본 바가 있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서 이런저런 전설과 억측과 미신 같은 비합리성을 배제하더라도 뭔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하고 또 의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식의 취사선택은 종교에서 항상 있어 왔다. 가령 기독교의 경우만 해도, 신구약에 언급된 갖가지 규례와 권고 가운데 지금 실생활에서 준수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또 예수야말로 유대교의 대대적인 혁신가가 아니었던가.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고 변화된다. 따라서 인간의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에 대한 종교의 통찰 중에서 후자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면, 그나마 여전히 종교가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전자라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는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기독교인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고대사에 관한 논란의 여지 많은 주장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대한민국 국민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앙심이나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비합리적이고 터무니없는 주장까지도 사실로 시인할 경우에는 그의 신앙과 신념 전체가 거짓이 된다. 반면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에 일부 한계가 있음을 겸허히 시인할 수만 있다면 절반의 진실은 지킨 셈이리라.


4.

  “세이건의 책들은 모두 지난 세월 종교가 독점했던 초월적인 경이라는 신경 말단을 건드린다. 내 저서들도 같은 열망을 담고 있다.” 『만들어진 신』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한 말은 칼 세이건의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해 준다. 즉 경이라는 것은 종교의 독점물이 아니며, 과학에서도 충분히 가능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경이는 오늘날의 주요 종교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느낀 바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서두에서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감성, 즉 경외의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최상의 방법은 바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거대한 우주를 통해 우리 지구의, 우리 세계의, 우리 인간의, 우리 상상력의 왜소함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결국 현대 과학은 오늘날의 종교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칼 세이건은 종교가 실존적 차원에서는 유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서 월권을 행사하는 순간부터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자중을 부탁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들어와 신앙을 빙자해 순진한 사람들을 오도하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더 큰 존재 앞에서의 ‘겸손’이라……. 사실 그것은 원래 종교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오늘날 종교가 과학 앞에서 한층 더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5.

  앞에서도 말했지만 칼 세이건의 책을 꾸준히 읽어 온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책을 번역하는 기회까지 얻게 되어 무척 영광으로 생각한다. 과학 전공자가 아닌 까닭에 번역 과정에서 종종 오역을 범했는데, 다행히 『코스모스』를 번역하신 서울 대학교 물리천문학부의 홍승수 교수님께서 번역문 전체를 감수해 주시고 여러모로 조언해 주셔서 상당 부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오류가 있다면 전적으로 옮긴이의 탓이다.

  최근 번역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며 번역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편집자의 역할이다. 단행본의 경우, 그 어떤 저/역자의 문장도 편집자의 눈과 손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번역 일을 거듭하면서 느끼는 바, 이것은 번역자 혼자 잘났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편집자와 감수자와 또 수많은 다른 분들의 도움을 얻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늘 뒤에서 도와주시는 (주)사이언스북스 편집부 여러분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2010년 여름

박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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