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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④ 기후 변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본문

완결된 연재/(完) 에너지 Talk Talk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④ 기후 변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Editor! 2015. 8. 13. 16:05

‘존엄한 이주’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고향 땅이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한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에서 자국민이 기후 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책입니다. 이처럼 기후 변화는 단순히 우리 밥상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존을 결정하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이 계속되던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기후 변화를 체감하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내뿜은 온실가스가 원인이라는 친숙한 주장에서부터 지구의 온도 변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주장까지, 심지어 '녹색 기술'을 새로운 돌파구로 삼으려는 선진국의 음모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오늘날,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프레시안》의 과학·환경 담당 기자인 강양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연재 게시물입니다. 지난 시간의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알리는 전주곡」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기후 변화를 둘러싼 논쟁과 의혹들을 짚고 넘어갈 예정입니다. 기후 변화는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낸 ‘과학적 사기극’일까요? 아니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일까요? 기후 변화의 시대에 인류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선택과 결정을 돕는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후 변화의 정확한 정의


우리가 비교적 따뜻한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온실 효과 덕분이다. 이산화탄소, 메탄 같은 온실 기체가 일단 지구로 들어온 태양 에너지를 밖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잡아 주고 있다. 만약 온실 효과가 없었다면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꽁꽁 얼어붙은 땅이었을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2013)에 나오는 지구처럼 말이다. 그런데 뭐든지 과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산업 혁명이 본격화된 18세기 말~19세기 초부터 갑자기 공기 중 온실 기체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지난 200년간 약 40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러니까 지구 대기 가운데 온실 기체가 더 많아지면서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이 잡아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지구의 기온이 오르는 현상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구 온난화’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혹은 이것이 초래하는 기후 변화를 놓고서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왜 이런 음모론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일까? 혹시 음모론이 맞는 것은 아닐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후 변화가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기후 변화는 세 가지 ‘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온실 기체가 지구를 데운다(온실 효과). 이 때문에 지난 100년간 지구의 기온이 평균 0.74도 올라갔다. 고작 0.74도에 웬 호들갑이냐고? 현재보다 기온이 1도만 올라도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최소 4억 명, 최대 17억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릴 수 있으며, 곡물을 비롯한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000만~3000만 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1도는 앞의 연재에서 잠시 언급한 생물 종의 변화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 기온 상승으로 수온이 오르면 직격탄을 맞는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서 많은 과학자는 지구 기온 상승을 2도 안에 잡아 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2도가 올라도 생물 종의 20퍼센트 정도는 멸종한다.)

둘째, 지구를 데우는 온실 기체의 농도가 80만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 이후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은 40퍼센트 늘었다.

셋째, 그러니 이렇게 온실 기체 농도가 높아진 원인은 산업 혁명 이후 인간 활동에서 찾는 것이 맞다. 유엔 산하의 국제 과학 기구인 기후 변화 정부 간 패널(IPCC)에서 발간하는 「기후 변화 보고서」에서는 온실 기체 농도 상승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2001년(제3차 보고서) 66퍼센트, 2007년(제4차 보고서) 90퍼센트, 2013년(제5차 보고서) 95퍼센트로 높여 나갔다. (심지어 2013년 제5차 보고서는 회의주의자의 집중 포화를 의식한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로 꼽힌다.) [보고서 보러가기]


과학자 100명 중 97명이 인간이 기후 변화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Skeptical Science




기후 변화 음모론의 진실


그렇다면, 이런 기후 변화를 둘러싼 사실을 놓고서 과학계에 논란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미국의 전 부통령 앨 고어가 『불편한 진실』에서 인용해서 유명해진 나오미 오레스케스의 연구는 흥미롭다. 미국의 유명한 여성 과학사가인 오레스케스는 2004년 12월 3일자《사이언스》에 「상아탑을 넘어서: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Beyond The Ivory Tower: The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논문 링크: http://www.sciencemag.org/content/306/5702/1686.full)

오레스케스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발표된 ‘기후 변화(climate change)’를 열쇳말로 다룬 과학 논문 928편의 초록을 살폈다. 이는 같은 시기 기후 변화를 다룬 약 1만 편의 논문 가운데 10퍼센트 정도에 해당되는 양이다. 검토를 마친 오레스케스는 이 논문들 중에서 명시적으로 인간 활동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를 쓴 통계학자 비예른 롬보르는 어떤가?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기후 변화 회의론을 다룬 책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이 롬보르조차도 정작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 사실을 놓고서는 대다수의 기후 변화 연구가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후 변화 음모론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후 변화가 정치적, 대중적으로 승인을 받는 순간 큰 손해를 입는 이해 당사자가 있다. 예를 들어, 석유 기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런 석유 기업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과학자들에게 뒷돈을 대면서 기후 변화에 반(反)하는 연구를 종용하고, 갖고 있는 힘을 적극 발휘해서 그런 과학자들의 담론을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거대 언론 매체를 통해 유포하고 있다.

오레스케스는 이 과정에서 프레드릭 사이츠, 프레드릭 싱어 같은 과학자를 주목한다. 이들은 냉전 시기 미국 국방 정책을 뒷받침하던 과학자로서, 1984년에는 당시 레이건 정부의 전략 방위 구상(SDI)을 옹호하고자 보수 싱크 탱크인 마셜 연구소를 설립했다. (SDI는 레이건 정부가 군수 산업을 위해서 밀어붙인 계획이다.)

반공주의와 시장주의로 똘똘 뭉친 이들은 냉전이 끝나자 새로운 적으로 ‘환경주의자’를 상정했다. 이들은 지구 온난화와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했고, 이런 주장은 그들과 이해가 같은 기업의 힘을 업고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오레스케스는 『의혹을 팝니다』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고발했다.)

언론은 이런 ‘청부’ 과학자의 견해를 1급 기후 변화 과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와 같은 비중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치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열띤 ‘과학 논쟁’이 있는 것처럼 대중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과학계에서는 사실상 합의가 이뤄진 지구 온난화와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가, 마치 대단히 논쟁적인 과학 연구인 것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사정 탓이 크다.


에너지 책책

☞『의혹을 팝니다』(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콘웨이 지음, 유강은 옮김, 미지북스, 2012)

권력과 자본의 ‘청부’ 과학자가 과학을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구 온난화, 담배와 폐암, 산성비, 오존 홀 등의 사례를 통해 폭로하는 책입니다. 주요 환경적,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이 ‘과학의 탈을 쓴 회의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오른쪽), 이 같은 정치와 과학의 긴밀한 관계는 역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wikipedia




기후 변화의 불확실성


이 대목에서 좀 더 골치 아픈 문제를 토론해 보자. 앞에서 열거한 기후 변화를 둘러싼 세 가지 사실을 놓고서 과학자 대부분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렇게 증가한 온실 기체가 앞으로 지구를 얼마나 더 열 받게 할지(몇 도나 더 오를지), 또 그렇게 열 받은 지구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연구한 갖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많은 시나리오를 연구 중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정교한 시나리오조차도 허점투성이다. 실제로 그 시나리오가 지정한 미래의 어느 시점이 오기 전까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맞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슈퍼 컴퓨터를 몇 대나 들여 놓았다는데, 왜 이렇게 일기 예보가 틀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틀린다고 화내는 기사가 제일 한심한 과학 기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유럽,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일기 예보가 틀리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일주일이 넘어서면 어느 나라의 일기 예보나 그 적중 확률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비가 올까, 안 올까?’에 대한 확률이 절반 수준이라는 것은 동전 던지기의 확률(즉 반반이다.)과 똑같다. 그만큼 날씨라는 것은 몇 가지 변수를 집어넣으면 딱 부러지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일기 예보가 틀리는 것은 현대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가지 해프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서울, 경기도, 한반도처럼 아주 좁은 지역의 일주일 후, 한 달 후의 날씨도 예측하기 힘든데 어떻게 지구 전체의 기후가 어떻게 될지 50년 후, 100년 후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겠는가? 기후 변화를 다룬 논문을 보면 ‘불확실한 추측’을 나타내는 표현, 예를 들어 ‘might’ 같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2050년까지 전 세계 온실 기체 배출량을 1990년과 비교했을 때 50퍼센트 정도 줄인다고 해서, 앞으로 100년간의 지구 기온 상승 폭을 2~3도로 잡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기온 상승이 과연 예측대로 현재의 생태계가 견딜 만한 기후 변화 수준에서 끝날까? 아무도 확실히 보증할 수 없다. (물론 현재 상태대로라면, 이런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지구 기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서 앞에서 언급한 여섯 번째 대멸종 같은 파국을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인정하는 것이 있다. 그런 예측이 지극히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어떻게 될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에너지 팁팁!

☞불확실성은 기후 변화 과학의 미덕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기후 변화 과학의 특성도 짚고 넘어가자. 기후 변화 보고서를 생산하는 IPCC는 대중의 오해와는 달리 별도의 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료 심사(peer review)를 거친 이미 발표된 문헌을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과학자들이 검토해서 초안을 작성하고, 과학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각국 대표의 검토를 거쳐서 보고서 최종안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IPCC가 강조해 온 의제는 현장에서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기후 변화 과학자 공동체의 공유된 관념이든, (IPCC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기후 변화 연구 기금이든,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현장의 과학자는 IPCC에서 원하는 의제의 연구 결과를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와 과학의 결합한다!)

또 기후 변화 과학은 그 동안 과학자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전제해 온, 자연에 가까운 ‘근사적 참’에 다가가는 과학의 본질에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뮬레이션에 의존해 내놓은 연구 결과(시나리오)와 비교할 만한 미래의 자연(예를 들어, 100년 후 지구의 기후)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연은 현재의 대응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세기 해수면 상승이 최대 82센티미터 상승하리라는 제5차 기후 변화 보고서(2013년)의 예측은 최소한 100년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IPCC와 기후 변화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공표하는 목적은 그것이 ‘근사적 참’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이 미래에 현실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있다. 예측이 맞지 않게 될 때 역설적으로 기후 변화 과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



해수면이 상승한다면? baldeaglebluff/flickr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의 싸움, 우리의 선택은?


기후 변화의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의 싸움이 있다.

낙관론자의 주장처럼, 약간(?) 더워진 지구에서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이 잘 적응해서 오히려 생물 다양성이 꽃피울 수도 있다. 반면에 비관론자의 말처럼, 조금(!) 더워진 지구에서 극지방의 동토층이 녹아서 그 안에 있던 동식물의 유기체가 썩기 시작해 다량의 메탄이 배출되고, 그 결과 지구 온난화가 빠르게 가속화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미래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의 미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 그대로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사고 실험을 한 번 해보자. 여기 낙관론자가 있다. (이솝 우화의 베짱이다.) 이들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래가 좋았다. 기후 대재앙도, 여섯 번째 대멸종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정말로 반가운 일이다.

물론 비관론자는 쪽팔릴 것이다. (이솝 우화의 개미다.) 이들은 미래가 나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여러 가지 준비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편이 이들에게도 좋다. 그들이라고 기후 대재앙이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났을 때, 생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모두에게 좋다.

이제 다른 미래를 생각해 보자. 비관론자의 예측처럼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났다. 기후 대재앙과 그것이 낳은 극적인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났다. 영화 「투모로우」(2004), 혹은 훨씬 더 끔찍한 「설국열차」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럼, 낙관론자는 어떻게 될까? 마치 이솝우화의 베짱이처럼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비관론자는 (그들 역시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위험에 대비해 준비를 해 놓았으니 낙관론자보다는 좀 더 생존할 가능성이 크겠다. 자, 미래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낙관론자나 비관론자 모두 행복하다. 그런데 미래에 재앙이 닥치면 낙관론자의 경우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지만 비관론자의 경우 최소한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우리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바로 이 순간에 지구 온난화나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는 더 이상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가 된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인류 공동체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베짱이의 길을 선택해야 할까, 개미의 길을 선택해야 할까?

하나만 더 강조하자. 사실 비관론자의 길을 선택하면 한 가지 장점도 덤으로 있다. 위기 상황에서 이들 비관론자는 미처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이웃, 그러니까 낙관론자에게 손을 내밀 여유도 가질 수 있다. 어린이 눈높이로 각색한 이솝우화의 결말처럼, 굶어 죽게 된 베짱이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개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Carsten Tolkmit/flickr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다음 시간에는 5편 「원전의 희생자들」에서는

화석 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는 원자력 발전의 허와 실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강양구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참여연대 과학 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 과학 센터) 결성에 참여했으며, 2003년부터 《프레시안》에서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부안 사태, 경부 고속 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으며,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1, 2』,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등을 저술했다.



※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다음과 같은 목차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필자와 당사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1. 석유 가격에 숨겨진 비밀 [바로가기]

2. 석유 시대의 종말?! [바로가기]

3.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알리는 전주곡 [바로가기]

4. 기후 변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5. 원자력 르네상스는 없다 [바로가기]

6. 원자력 제국의 희생자들 [바로가기]

7. 후쿠시마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바로가기]

8. ​후쿠시마 산 먹거리는 괜찮을까?

9. 핵 폐기물은 어디로​ 가는가?​

​10. 태양 에너지와 풍력 에너지에 대한 오해

11. 똥의 재발견

12. 수소 에너지와 핵융합 에너지의 진실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시사통」에서 3월 26일부터 5월 28일까지 강양구 기자가 직접 방송에 참여한 「환경통」과 함께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관련 링크: 2편 「기후 변화와 여섯 번째 대멸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