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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물리 어벤져스 2019 스케치

6강 물리학자의 리더십: 홍성욱 서울대 교수 1편

Editor! 2020. 1. 8. 11:06

한국 물리학회 교육 위원회가 주관하고 (주)사이언스북스가 후원하는 「물리 어벤져스 2019 시즌 2」 두 번째 강연의 주인공은 서울 대학교 생명 과학부 홍성욱 교수님이었습니다. “물리학자의 리더십: J. J.톰슨, 오펜하이머, 그리고 LIGO”라는 제목으로 지난 11월 29일(금)에 진행된 강연은 과학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리더십을 보여 준 위대한 과학자들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과학자에게 왜 리더십이 필요할까요? 과학자의 리더십이란 무엇일까요? 홍성욱 교수님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물리 어벤져스 2019 6강
물리학자의 리더십: 홍성욱 서울대 교수 1편

 

유네스코 국제 과학 기술 윤리 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미국 과학사 학회에서 수여하는 슈만 상(1992년), 미국 기술사 학회에서 수여하는 종신 회원상(1996년) 등을 수상한 홍성욱 교수님은 『포스트 휴먼 오디세이』, 『미래는 오지 않는다』, 『크로스 사이언스』 등의 책으로 대중에게 과학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과학 커뮤니케이터입니다. 과학 기술사와 과학 철학을 연구하며 현재 서울 대학교 생명 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시죠. 지난 11월 29일(금), 「물리 어벤져스 2019 시즌2」 두 번째 강연자로 선 홍성욱 교수님은 “물리학자의 리더십: J. J. 톰슨, 오펜하이머, 그리고 LIGO”라는 제목으로 리더십, 그중에서도 과학자의 리더십에 대해 강의해 주셨습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을 키워낸 J. J. 톰슨, 놀라운 유연함으로 이질적인 두 그룹을 중재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오펜하이머, 그리고 지금의 LIGO를 있게 한 3단계의 리더십까지 홍성욱 교수님이 소개한 인물들을 통해 리더십이 바꿔 놓은 과학사의 지형도를 다시 살필 수 있었습니다.

강연하는 홍성욱 교수. ⓒ (주)사이언스북스. 

 

 

과학자의 리더십이란?

리더란 무엇인가?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홍성욱 교수님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리더, 무엇이 떠오르는가?”였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이 언급한 오바마, 나폴레옹, 스티브 잡스, 레닌 등의 리더십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죠. 홍성욱 교수님은 이들을 소개하며 “사람을 끌어당겨 일을 하는 사람을 리더, 그들이 가진 특성을 리더십이라고 얘기한다. 흔히 ‘리더십’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게 카리스마 같은 것이다. 카리스마를 명확히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종류의 아우라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맥스웰과 마리 퀴리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맥스웰과 퀴리는 어떤 리더였을까?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그런데 웬 리더일까요? 보통 우리가 아는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혼자 사진을 찍는 경우인데 말이에요. 이 사진을 봐도 그렇죠. 대개 과학자들이 사진을 찍으면 혼자 찍어요. 떼를 이끌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혼자서 하는 과학은 별로 없어요. 여러 명이 같이 하는데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다시, 질문입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아래의 두 사진을 보여 주며 “두 사진의 차이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차이가 보이시나요? 

잡스와 맥스웰의 차이는?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오른쪽 맥스웰 사진은 뒤에 무언가가 보이죠. 맥스웰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과학자들의 사진을 가만히 보시면 다 이렇습니다. 실험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실험한 어떤 것과 같이 사진을 찍었어요. 마리 퀴리가 그랬고요. 파스퇴르 역시 토끼의 척수를 이용해 개발한 백신과 함께 찍었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어떻게 찍었나요? 대부분 칠판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칠판에 자신이 얘기한 중력장 방정식 같은 수식을 써놓고 사진을 찍곤 했어요.”

맥스웰이 함께 사진 찍은 것은 표준 저항을 측정하는 기기입니다. 잠깐 표준 저항에 대해 살펴볼까요. 당시 영국은 전신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요. 전신 기술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1옴(Ω)이라는 표준 저항이었습니다. 전신은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어디가 끊어졌는지 밖에서 보이지 않죠. 이때 어디가 끊어졌는지 찾아내는 방법에서 표준 저항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당시 전신은 이미 전 세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영국과 인도 사이에 매년 수백만 통의 전보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영국으로서는 전보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던 것이죠. 바로 이 전신을 위한 표준 저항을 개발하는 일이 맥스웰이 소장으로 있던 ‘캐번디시 연구소’의 임무 중 하나였으며, 맥스웰이 재직하던 때에 표준 저항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주 정교한 측정이 필요한 연구인 동시에 창의적인 실험 기기가 필요한 연구였기 때문에 맥스웰은 사진을 찍을 때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는 것이 홍성욱 교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이에 홍성욱 교수님은 “과학자는 비인간(non-human)을 잘 다뤄야 한다. 이것을 잘 다루기 위해 만든 공간이 실험실이다. 따라서 과학자의 리더십에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리더십뿐 아니라 비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리더십도 포함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맥스웰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맥스웰은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자신의 집 증축 설계에도 직접 참여했다고 하죠.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캐번디시 연구소를 개관할 때 초대 소장으로 추대된 맥스웰은 W. M. 포셋(W. M. Fawcett)이라는 건축가와 함께 캐번디시 연구소를 설계합니다. 

맥스웰과 포셋이 설계한 캐번디시 실험실.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이 이미지가 당시 캐번디시 연구소의 1, 2, 3층 설계도면인데요. 2층은 학부생들의 실험실, 3층은 강의실이었고요. 1층이 맥스웰이 생각했던 진짜 물리 연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캐번디시 연구소가 엄청나게 확장되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고요. 이 장소는 ‘휘플 뮤지엄’이라는 과학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층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도면이 재미있다면서 구조의 특이한 부분을 짚어 주었습니다.

“진짜 이상하죠. 건물에 복도가 없어요. 끝에 있는 방에 가려면 이웃한 방을 모두 지나가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도를 안 만든 이유가 있겠죠. 당시 이 대학은 학부생 대학이었습니다. 대학원생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맥스웰은 이곳에서 연구를 하면서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을 연구원으로 고용했어요. 그 사람들이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연구를 했죠. 하지만 이 실험실들은 학부생에게 오픈된 공간이었고요. 맥스웰은 정밀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학부생들이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다고 ‘출입금지’ 같은 것을 써 붙일 수는 없었죠. 이 공간 자체가 학부생들을 위한 공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2, 3층은 복도도 있고,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두고, 1층은 복도를 없애서 접근이 아주 힘들도록 한 것입니다. 학부생을 위한 실험 공간과 연구자를 위한 실험 공간을 분리했던 거죠. 리더는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해요.”

캐번디시 연구소의 1층 공간 설계.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리더십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가 있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독일 화학자 J. 리비히와 영국 화학자 T. 톰슨을 비교한 리더십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리비히는 ‘리비히 스쿨’이라고 할 정도로 굉장한 학파를 건설한 사람인 반면 토머스 톰슨은 이름을 들어본 분도 별로 안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건 한 명의 연구자로서는 톰슨이 더 뛰어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알려진 사람은 리비히입니다. 왜냐하면 학파를 건설했기 때문이에요. 연구 프로그램 유무, 실험실 인력 유무, 충분한 논문 출판 기회, 제도적인 권력의 이용 가능성, 학생들과의 빈번한 접촉 등에 리비히는 모두 해당이 되는 반면 톰슨은 모두 해당하지 않죠. 본인은 아주 뛰어난 연구자이지만 연구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리비히는 실험 기구를 만들었는데요. 그 기구로 실험을 하면 논문이 잘 나와요. 학생들이 논문을 막 냅니다. 리비히는 또 그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저널을 두 개나 만들었고요. 덕분에 학생들이 취직을 하고, 더 많은 학생들이 들어왔죠. 리비히는 그 학생들을 위해 재정을 확보하고요. 그 결과 리비히 학파는 엄청난 학파를 이루게 된 거예요. 19세기에 화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해서 염료 산업 등으로 이어질 때 그 산업을 주도했던 초기 화학자들이 다 리비히 연구소 출신들이었거든요. 반면 톰슨은 개인의 우수성을 연구 전통으로 바꾸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리더십이 과학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화학자의 리더십은? 리비히와 토머스트 톰슨.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노벨상 제조기’ J. J. 톰슨의 리더십

맥스웰, 레일리에 이어 캐번디시 연구소의 3대 소장이 된 J. J. 톰슨. 홍성욱 교수님은 그러나 J. J. 톰슨이라는 선택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맥스웰이 일찍 사망을 하고요. 소장 자리가 비니까 당시 귀족인 레일리에게 소장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귀족은 원래 일을 안 하는데 계속 부탁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소장을 맡아서 4년을 운영하죠. 이후 세 번째 소장을 뽑는데 당시 글레이즈브룩이라는 사람이 될 거라고들 예상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J. J. 톰슨을 소장으로 앉혔습니다.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라 모두들 놀랐고요. 그중에서도 제일 놀란 사람은 J. J. 톰슨이었어요. 20대 중반 정도의 젊은이가 소장이 된 거죠. 더 놀라운 것은 캐번디시 연구소는 실험 연구소인데 J. J. 톰슨는 수학자입니다. 실험을 거의 몰랐던 사람이에요.”

수학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실험은 전혀 몰랐던 J. J. 톰슨이 실험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을 때의 놀라움이 짐작되는데요. “이후 한참 동안 캐번디시 연구소가 어려웠다.”는 홍성욱 교수님은 J. J. 톰슨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들려주었습니다. 수학 논문을 계속 내던 J. J. 톰슨이 점점 실험 논문도 같이 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실험 논문 위주로 냈던 것이죠. 그러다 1897년, 음극선 실험을 합니다.  

조지프 존 톰슨이라는 위대한 리더.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새로운 실험 기기로 음극선 실험을 해 보니까 수소 원자의 1,800분의 1 정도 크기가 되는 음의 입자를 발견한 거예요. 수소 원자가 가장 작은 원자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음극선 입자는 그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J. J. 톰슨도 깜짝 놀라서 계속 반복해서 실험을 하다가 자신의 발견이 옳다고 확신하고, 거기에 ‘corpuscle’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입자라는 뜻이고요. 한참 뒤에 사람들이 그것을 ‘electron’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이를 “현대 물리학의 첫 장을 열었던 발견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정밀 실험에 약했던 캐번디시 연구소 3대 소장 취임 초창기의 J. J. 톰슨이 비교적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지 않은 음극선 실험에서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는 점은 어떤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군요. “아이디어, 직관, 해석이 더 중요한 실험”이었던 음극선 실험 결과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J. J. 톰슨은 무엇보다도 “제자를 알아보는 능력, 제자를 키워내는 능력이 뛰어난 리더”였다고 홍성욱 교수님은 소개했습니다.

“전자를 발견하기 2년쯤 전인 189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새로운 정책을 표방합니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나라에서 유학생들을 받아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부시킨 거예요. 따라서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도 캐나다, 뉴질랜드,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학생들을 받았습니다. 후에 그 학생들이 회고한 것을 보면 이곳에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해도 학생들의 텃세가 너무 심했다고 말을 해요. 깔보는 태도로 대해서 공부하기가 많이 힘들었다는 회고가 많거든요. 그 학생 중 한 명이 뉴질랜드 출신의 러더퍼드(E. Rutherford)였어요. 그런데 J. J. 톰슨은 그런 학생들에게 아주 잘 해 줬다고 합니다. 심지어 연구소를 운영하는 조수들에게 그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도록, 케임브리지 학생들과 똑같이 대하도록 했다고 해요. 사람들을 포용하는 인간미가 있었던 것이죠. 권위주의적이지 않았고요. 제자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엑스레이를 공부하고 캐나다 맥길 대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그곳에서 방사선을 계속 연구해 알파 입자, 베타 입자를 발견하죠. 이 연구로 J. J. 톰슨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2년 뒤인 1908년, 러더퍼드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가 러더퍼드를 초빙했고, 그곳에서 러더퍼드는 스승인 J. J. 톰슨의 ‘푸딩 모형(양전하가 넓게 퍼져 있고, 그 안에 전자가 마치 푸딩 속의 자두처럼 박혀 있다는 아이디어)’을 뒤집죠. 원자핵의 발견입니다.

“알파 입자를 원자핵에 쏘니까 일부가 튀어나오더라, 뭔가 단단한 게 가운데에 있다, 그게 원자핵이다 하는 내용이죠. 스승의 전자 모형을 제자가 깬 거예요. 사실 러더퍼드의 그 업적은 노벨상을 한 번 더 받을 수도 있는 정도였어요. 어쨌건 노벨상에서는 제외가 됐고요. 나중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4대 소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크리스마스 휴가 사진.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이 사진은 1897년 J. J. 톰슨이 전자를 발견한 해 크리스마스에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직전에 다 모여 저녁을 먹고 사진을 찍는 전통이 생겼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가운데 J. J. 톰슨이 앉아 있고요. 앞줄 가장 오른쪽에 러더퍼드가 있죠. 뒤에 서 있는 사람이 C. T. R. 윌슨입니다. 구름 상자를 발명해서 입자의 궤적을 볼 수 있도록 했어요. 192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죠. 그러니까 톰슨의 직계 제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두 명이나 나온 겁니다. 윌리엄 브래그(William L. Bragg)도 캐번디시 연구소에 있었고,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거든요. 어찌 보면 톰슨 제자 중 세 명이 노벨상을 받은 거예요. 후에 톰슨의 아들도 노벨상을 받습니다. ‘노벨상 제조기’(웃음)라고도 볼 수 있는 연구소죠.”

홍성욱 교수님은 J. J. 톰슨을 ‘School Builder’로 설명합니다.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내고, 좋은 학생을 모으는 게 가장 중요한 스쿨빌더의 리더십이다. J. J. 톰슨의 인간미, 포용력이 큰 역할을 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두 세계를 결합한 오펜하이머의 리더십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또 다른 리더.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오펜하이머는 이론 물리학자입니다. 미국 원자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책임자였죠. 맨해튼 프로젝트의 원래 비밀명은 ‘맨해튼 디스트릭트’고요. 총 네 곳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그중 하나인 로스 앨러모스의 책임자였던 겁니다. 나머지 세 곳은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핵분열 물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었어요. 두 곳이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하던 공장이었고요. 시카고에 원자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세 곳에서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을 만들어 냈고요. 그 물질을 모아서 폭탄을 제조했던 곳이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인 적은 없었지만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호감을 느낍니다. 공산당 후원비를 계속 내기도 했죠. 오펜하이머의 동생과 약혼자 모두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었습니다. 친구들도 물론이었고요. 따라서 사람들은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이런 부분이 후에 오펜하이머에게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 프로젝트의 소장을 맡길 때 문제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군부에서는 오펜하이머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인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Leslie Richard Groves) 대령이 오펜하이머를 만난 다음 ‘이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판단해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직을 맡긴 겁니다. 오펜하이머가 소장을 맡게 됐다는 게 알려지고, 그를 신뢰한 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로스 앨러모스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오펜하이머의 일이 “군부와 물리학자,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두 그룹”을 중재해야 하는 중요한 미션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연구, 군사 연구와 관련해 ‘비밀’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군부와 “비밀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인 물리학자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던 것인데요.

“내가 뭘 하는지 옆 사람도 모르게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군부의 입장이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말하기 좋아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어떻게든 동료에게 알리고 싶어 했죠. (웃음) 자유분방하고, 토론하길 좋아하는 그룹이에요.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권위적인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는데요. 이 두 집단이 한 지역에 모여서 연구를 하며 살게 됐던 것이죠.”

당연히 엄청나게 갈등이 많았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군부가 보기에 물리학자들은 못 믿을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극비의 미션을 연구하는 중인데 저렇게 자유롭게 토론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한편 물리학자들은 “연구는 우리가 하는데 군인들이 왜 이렇게 시시콜콜 간섭하느냐.”는 생각이었다고 홍성욱 교수님은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가 그 사이에서 발휘했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가령 군부는 초기에 물리학자들을 장교로 징집하려 했어요. 이들에게 계급장을 달아 주고, 그에 맞는 서열에서 명령을 내리고 연구시키려고 했죠. 전시니까요.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그 아이디어를 결사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연구를 안 할 거다, 이들을 민간인 신분으로 놔둬야 한다고 한 거죠. 결국 오펜하이머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편지를 검열하고, 출입을 제한하는 등 군부가 사용했던 방식이 물리학자들과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중재한 것도 오펜하이머였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그런 오펜하이머의 리더십이 물리학자들을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일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초기에 과학자들이 풀어야 했던 문제는 ‘임계 질량’ 문제였어요. 우라늄 235나 플루토늄 모두 일정 질량 이상이 모이면 터집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모여야 터지는지를 잘 몰랐어요. 이론적으로만 예측했지 정확한 양을 몰랐죠. 일반적인 폭탄은 뇌관을 사용하는데요. 원자 폭탄은 뇌관이 없습니다. 대신 우라늄 두 개를 떼어두었다가 합치면 터지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합쳐야 터지는지를 몰랐던 거죠. 이것이 리처드 파인만이 자서전에서 ‘용의 꼬리를 건드렸던 실험’이라고 말한 실험입니다. 용이 꼬리를 건드리면 좋아할 리가 없겠죠. 언젠가는 깨서 불을 뿜을 거예요. 그러니까 불을 뿜기 전에 실험을 중단해야 해요. 이런 방식으로 마침내 임계 질량을 알아냅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두 가지 아이디어. 위가 컨 타입. 아래가 내파 타입이다.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이후 연구소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옵니다. 원자 폭탄을 만드는 두 가지 방식 때문이었는데요. 위의 이미지에서 보듯 윗부분은 ‘건 타입’, 아랫부분은 ‘내파 타입’입니다. 건 타입은 한쪽에 질량을 놓고 다른 쪽에서 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임계 질량이 13킬로그램라면 12킬로그램짜리 공을 갖다 놓고 나머지 1킬로그램를 다른 쪽에서 쏘는 겁니다. 그러면 폭탄이 터지는 거죠. 한편 내파 타입은 방사성 물질을 가운데에 두고 주변에 폭약을 두르는 방식입니다. 폭약을 터뜨리면 폭탄이 바깥으로 터지는 게 아니라 안으로 터지는 것이죠. 홍성욱 교수님은 “처음엔 어떤 방식을 택할지 금방 결론이 났다. 건 타입을 선택했다. 내파 타입은 안에 고성능 폭약을 써야 하고, 고성능 폭약을 썼을 때 나오는 충격파가 폭약을 밀어 줘야 하는데 당시 아직 충격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고성능 폭약에 대해서도 물론이고. 연구가 안 된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내파 타입은 못 쓴다는 결론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오펜하이머가 내린 놀라운 선택을 들려주었습니다.

“1945년 여름 즈음에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을 했고요. 그때까지 우라늄 한 개, 플루토늄 두 개 정도의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모일 수 있을 거라고 계산을 합니다. 따라서 건 타입 폭탄 세 개를 만들기로 한 거죠. 그런데 내파 타입이 포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가 내파 타입 연구팀을 계속 꾸립니다. 세스 네더마이어(Seth Neddermeyer)라는 사람에게 계속 연구를 시켰어요. 그러다 문제가 생기죠. 플루토늄 추출물을 보니 불순물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그래서 건 타입 방식을 못 쓰게 됐습니다. 불순물이 많기 때문에 총알이 다 들어간 뒤에 터지는 게 아니라 들어가면서 핵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니까요. 그런데 우라늄은 하나뿐이었잖아요. 테스트하면 실전에 쓸 폭탄이 없게 되죠.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오펜하이머는 네더마이어 팀을 확장시킵니다. 그리고 러시아 출신의 폭약 전문가 키스챠코프스키를 데려와서 책임자로 앉히죠.”

홍성욱 교수님은 그 결과 플루토늄을 이용해 내파 타입 폭탄을 두 개 만들어 실험했던 유튜브 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고 말했던 실험 영상이죠. 잠시 함께 보실까요. 

최초의 원자 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의 영상. 유튜브에서.

한편 흥미로운 것은 군부가 그토록 중시했던 원자 폭탄 비밀 연구가 바깥으로 새나간 방식입니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일한 공장에서는 비밀이 새지 않았죠. 홍성욱 교수님은 “물리학자들이 모여 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비밀이 다 샜다.”고 말했습니다. 

오크리지 공장의 오퍼레이터들. 홍성욱 교수 강연 자료에서.

“위 사진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추출해 내는 오크리지 공장의 내부 이미지인데요. 오퍼레이터로 일하는 여성들과 감독관 남성이 보이죠. 그런데 여성들 사이에는 남성 감독관을 감독하는 스파이가 또 숨어 있습니다. 그 스파이를 감독하는 스파이가 또 숨어 있고요. (웃음) 이중, 삼중으로 스파이를 심어 둔 것이 그로브스의 스타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누군가 “우리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물어보면 다음 날 해고됐다고 해요. 그런 조치로 수만 명이 일한 공장에서는 비밀이 안 샜어요. 심지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미국 기자 중에 원폭 프로젝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이 비밀은 그로브스가 가장 믿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샜던 겁니다. (웃음)”

결론적으로 홍성욱 교수님은 오펜하이머를 ‘Institute Leader’로 설명했습니다. “연구실 리더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하나의 연구실이 아니라 여러 연구실로 구성된 연구소 전체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군부와 과학자를 중재하는 역할을 잘했고, 위기 관리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이다. 가능성을 없애지 않고 계속 유지 시켰던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연하는 홍성욱 교수. ⓒ (주)사이언스북스.



(2편에 계속)


홍성욱
서울 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 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한신대 포스트 휴먼 연구단에서 포스트 휴먼 시대의 인간과 문명을 연구하고 있고, 고등 과학원 초학제 연구단을 이끌며 인공 지능의 책임과 윤리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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