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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시간을 초월해 진화하는 불멸의 여행자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유전, 시간을 초월해 진화하는 불멸의 여행자

Editor! 2023. 5. 23. 15:13

벽돌책의 대명사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의 최신간으로 전미 과학 작가 협회 사회 저널리즘 과학 상 수상작이기도 한  『웃음이 닮았다: 과학적이고 정치적인 유전학 연대기』가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에 선정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다수의 좋은 책을 우리말로 옮긴 전문 번역가 이민아 선생님이 번역을 맡았습니다. 이 책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공동 저자인 브라이언 헤어가 “시인의 유려함과 과학자의 전문성으로 창조해 낸 논픽션 스릴러”라고 평한 바로 그 책이기도 합니다. 이민아 선생님이 (주)사이언스북스의 독자들을 위해 번역 후기를 투고해 왔습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내셔널 아카데미 과학 커뮤니케이션 상, 미국 과학 진흥 협회 과학 저널리즘 상 수상 작가이자 『웃음이 닮았다』의 저자인 칼 짐머(1966년~), 2018년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에서.

 

유전, 당신이 아는 거, 아는 게 아닙니다

 

문과 출신자가 감히 이 무시무시한 분량의 과학책을 해 보겠다고 덥석 받아들인 데는 과학 저술가 짐머가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책 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유전이면 그래도 좀 친숙한 분야라는 생각이 컸다. 짐머는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하면서 경험한 걱정과 두려움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했는데, 그런 걱정 안 해 본 사람이 있겠느냐고. 그래도 유전학이면 나름 상식도 있고 이해도도 낮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유전은 짐머가 이 책을 쓴 이유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당신이 아는 거, 그거 아닙니다. 아닌 게 하나둘이 아닙니다.

 

유전과 유전학은 별개였고,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 자매라도 DNA적으로 다 같은 촌수는 아니었다. 유전자를 나눈 혈통이라는 개념도 엉성할뿐더러 잘못된 상식이었다. 10대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과 나의 DNA가 전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내 안에, 그러니까 현대인에게 우리와 종도 다른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순혈은 무슨. 유구하게 어두운 역사를 만들어 온 피부색과 인종도 유전자와는 상관없는, 허구의 이데올로기였다.

 

어리숙한 개인의 오해라면 이런 명민한 책을 만나 교정될 수 있겠지만, 역사 속에는 이런 오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교정되지 않을 참극을 빚어 온 권력이 있었음을 짐머는 차분하게 들려준다. 놀랍게도 나치의 모델이 되었던 이름도 무시무시한 단종법과 강제 불임술이 미국 정부의 작품이었고, 나치는 미국에서 숙성된 우생학을 이용하여 강제 불임에 안락사, 인종 학살 프로젝트까지 감행했다. 정치적으로 왼쪽에서는 스탈린 정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후천적 형질 유전을 교리 삼아 과학을 박해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비로소 시작된 어린 학문 분야인 유전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데에도 또한 정부와 정치의 역할이 필수였다. DNA 구조 발견에도 염색체 연구에도 유전체 지도 작성에도, 나아가 현재 가장 혁신적인 분야인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까지, 직간접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그 규모와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개개인에게 가장 밀접하고 또 절박할 유전 질환 연구는 기술 오남용의 윤리적 문제도 따라오기에 국가적 차원의 인프라만이 아니라 법제도적 규제까지 필요한 영역이다. 짐머는 이러한 위험이 또 다른 대규모 비극을 야기하지 않도록 더더욱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웃음이 닮았다』 사진: ⓒ ㈜사이언스북스.

 

짐머가 『웃음이 닮았다』에서 비중을 두어 강조한 것이 유전의 경로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짐머는 유전자가 선대에서 후대로 전달되는 ‘수직적 유전’과는 다른, 동세대 개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평적 유전’ 개념을 소개한다. 수평적 유전은 미생물의 주요한 유전 방식이지만, 항생제 내성이나 바이러스 감염처럼 인간에게 중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을 3년 뒤에 썼더라면 코로나19를 중요 사례로 다뤘을 것이다. 짐머는 수백, 수천 년 대를 이어 오며 전통으로 뿌리내리는 문화와 달리 한 세대 내에서 개인들 사이에 전수되는 지식과 기술, 행동 양식도 수평적 유전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거 밈 아니냐, 도킨스가 묻지 않았을까?

 

 

소설처럼 읽히는 과학 저널리즘의 명품

 

짐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짐머가 들려주는 유전학의 역사 속에는 흥미진진한 사건과 인물이 즐비하다. 순혈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근친 교배의 위험에 몇백 년 동안 저항했던 합스부르크 왕족과 그들의 유전병, ‘자라지 않는 아이’를 등에 업고 치료법은커녕 병명도 찾지 못하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수치심과 생활고와 싸우면서 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이야기, 혁명군에 몰살당하고 시신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던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부부와 다섯 자녀가 DNA 서열 분석 기술 덕에 사후 상봉한 이야기, 혈액형을 법정 증거로 채택하는 계기가 된 채플린의 여성 편력과 친자 소송 사건 같은 유명한 인물들 이야기. 그리고 이 유명인들 못지않게 유전학의 역사에 중대하게 기여한, 훨씬 더 몰입도 높은 개인들의 이야기. 이들의 사연과 역사는 차라리 소설이면 읽기 쉬웠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조 펠리페 1세와 후아나, 1480~1490년 벨기에 브뤼헤 성혈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발견으로 기존의 사유 체계과 통념을 무너뜨린 핵심적 과학자와 핵심적 학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다. 짐머는 그 발견들 사이사이를 과학자들의 집념과 경쟁 혹은 암투로 촘촘히 채웠고, 그 발견과 성취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수많은 우연과 사건 사고, 그리고 그것을 일생에 걸쳐 혹은 수대에 걸쳐 온몸으로 살아낸 기구한 운명의 개인들을 집요하게 발굴하여 기록했다. 그 중대한 발견에 먼저 도착했던 여성 과학자들, 그들의 업적과 이름이 현재 알려진 과학자들에게 가려졌다는 사실도 말이다.

 

독자이자 역자로서 이 책과 함께하는 과정은 긴장했다가 안도하고 또 절망하다가 간신히 희망의 빛을 발견하여 감사하는, 예상치 못한 희노애락의 파도 타기였고, 또 무한히 겸손해지는 경험이었다. 『웃음이 닮았다』에서 나는 오랫동안 수시로 느껴오던 두려움, 삶과 공존하는 죽음과 단절의 두려움을 달래준 한 마디를 만났다. 번역하는 도중에는 정말 그런가, 그냥 듣기 좋은 소리 아닌가, 의구심도 들었지만 다 끝냈을 때 이 문장이 떠오르면서 이해가 갔고, 그래서인지 두고두고 생각난다. 혹시 궁금했다가 공감하실 분이 또 계실까 하여 옮겨 본다.

 "식물, 동물, 사람, 곧 만물이 이미 시간을 초월해 여행하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이민아

이화 여자 대학교에서 중문학을 공부했고, 영문책과 중문책을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온더무 브』, 『색맹의 섬』 등을 비롯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해석에 반대한다』, 『즉흥연기』, 『맹 신자들』, 『어셴든』 등 다수가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웃음이 닮았다』 도서 정보

 

『다윈 지능』 도서 정보

 

『종의 기원』 도서 정보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도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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