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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사이언스 AS] 일반인의 과학 연구 참여, 그 의미와 명암 -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 본문

책 이야기

[할리우드 사이언스 AS] 일반인의 과학 연구 참여, 그 의미와 명암 -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

Editor! 2013.12.27 10:04
SF와 호러, 다큐멘터리, 스릴러,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통해 현대 과학 기술의 명암을 살핀 사이언스북스 신간 『할리우드 사이언스』, 책에는 싣지 못한 글 일부를 [할리우드 사이언스 AS]란 이름으로 블로그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AS, 애프터서비스 맞습니다. ^^)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일반인의 과학 연구 참여, 그 의미와 명암

―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


  1970년대에 과학기술학(STS)의 현장연구 분야를 개척해 여러 선구적 업적을 남겼고1) 1990년대에 전개된 이른바 ‘과학전쟁(Science Wars)’에서 주요 논객 중 하나로 활약하기도 했던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는 2002년에 크게 주목받은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과학학의 제3의 물결」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은 이 논문에서, 그는 1970년대 이후의 사회구성주의 과학학(‘제2의 물결’)이 과학(자)의 권위를 해체하는 인식론적 문제에 너무 치우쳐 오늘날 과학기술정책을 특징짓는 시민참여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리’를 둘러싼 인식론적 논의를 ‘전문성(expertise)’을 중심으로 한 또다른 인식론적 논의로 전환할 것을 역설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콜린스에게 있어 전문성은 공식적인 학위나 훈련 과정을 거쳤는지 여부와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는 일반인이건 전문가건 간에 경험에 기반을 둔 특수한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이러한 ‘경험기반 전문성(experience-based expertise)’을 가졌다면 누구나 과학기술 관련 의사결정에 참여할 (정당한) 자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여러 STS 사례연구에 근거해, 일반인들이 단지 전문가들의 논의를 알아듣는 수준의 교류 전문성(interactional expertise)을 넘어 과학지식 생산에 실질적으로 일익을 담당하는 기여 전문성(contributory expertise)까지 갖출 수 있음을 보였다. 그는 과학사회학자 스티븐 엡스틴이 연구했던 1980년대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의 사례를 일반인들이 과학의 핵심에 진입해 교류 전문성과 기여 전문성을 모두 획득한 보기드문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2) 2012년 초 공개되어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다큐멘터리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 How to Survive a Plague>은 절망 속에서 죽음과 맞서 싸웠던 1980년대 에이즈 활동가들의 투쟁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How To Survive a Plague - Official Trailer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많이 잊혀졌지만, 1980년대의 에이즈는 그야말로 죽음의 역병이었다.3) 유행 초기 몇 년간 의학계는 질병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치료법이나 백신 같은 대응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치사율은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했다. 이는 사회 전반에서 심리적 공황상태를 불러왔고,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 미국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초기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동성애자들은 역병의 원인제공자로 낙인찍혀 이전 시기 동성애 운동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따라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의 여러 대도시에 위치한 동성애자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정치적 권리 모두를 담보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미국 내에서 승인되지 않은 약물을 외국에서 밀수입해서 판매하는 등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한편으로, 창의적이고 발랄한 거리 시위를 통해 정부가 에이즈 대응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1987년 초 뉴욕에서 결성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권력 행사를 위한 에이즈 연대(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약칭 액트업[ACT UP])라는 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울러 에이즈 활동가들 중 일부는 이에 동정적인 의사나 과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의학 지식을 공부함으로써 관련 전문가들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전문성을 쌓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스쳐지나가듯 간략하게만 다뤄지지만, 에이즈 활동가들이 스스로 발전시킨 전문성이 가장 잘 발휘된 영역은 에이즈 신약에 대한 임상시험 분야였다. 에이즈 활동가들은 특히 플라시보(위약)를 사용하는 종래의 이중맹검(double-blind) 대조군 임상시험4)에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임상시험 방식은 대조군에 속한 많은 환자들이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가도록 방치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환자들이 임상시험의 프로토콜(규약)에 불응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엄밀한 결과를 얻어내지도 못하는 맹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활동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도적인’ 임상시험 방법을 제안했고, 윤리적 정당성과 과학적 엄밀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러한 주장 덕분에 그들은 이후 전문가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5)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활동가들은 종전의 시위나 시민불복종 운동 방식을 넘어 식품의약청(FDA)이나 제약회사들과 함께 제도권 내에서 공동 작업을 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새로운 연구 방향과 임상시험 방식 제안을 통해 결국 환자들의 생명 연장에 결정적 기여를 한 약물 병용 요법(combination therapy)을 개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에이즈 활동가들의 ‘성공 사례’는 이후 유방암이나 천식 같은 다양한 환자단체들이 전개한 활동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6)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이 그려내고 있는 에이즈 치료 운동의 사례는 일반인과 과학의 접점에 관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우선 이 작품은 과학에 ‘무지’하던 일반인들도 충분한 동기부여가 주어지면 과학적 전문성을 쌓고 관련 과학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의 에이즈는 엄청난 재난이자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를 극복하려는 환자와 활동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촉발했다.7) 이와 관련해 혹자는 이 사례를 두고 일반인과 과학의 관계에서 극히 예외적인 ― 따라서 이 둘간의 관계 일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거의 없는 ― 사례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이는 온당하지 않은 평가일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전문화되고 기능적으로 분절화된 사회에서는 평상시에 일반인들이 과학을 열심히 배우고 기여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이에 거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사례는 오히려 그러한 제도적 장벽을 뛰어넘어 일반인이 과학을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의 방향 설정이나 지식 생산에 참여하려면 이처럼 예외적이고 극적인 상황이 마련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일반인의 과학 참여에 수반되는 반대급부도 잘 보여준다. 우선 활동가 집단이 일반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사실상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의사결정 권한을 행사하게 되면서, 그들은 그에 따른 일정한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정치적 압력과 비정통적 임상시험 방식을 통해 조기 출시를 압박한 약물이 이후 효과가 별로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에이즈 환자들에게 오히려 절망을 안겨주는 역풍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1990년대 들어 정치적 압력 행사를 중시하는 액트업과 제도권 내에서 과학계와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치료행동그룹(TAG)이 분리된 것에서 볼 수 있듯, 활동가들 중 일부가 과학적 전문성을 쌓으면서 활동가 집단의 분열이 빚어졌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 TAG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약물의 조기 출시에 반대하고 충분한 데이터 수집을 강조하며 플라시보 임상시험에 찬성하는 등 이전에 자신들이 반대하던 전문가 집단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역설적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1) 콜린스가 자신의 지적 여정을 정리한 짧은 글로 http://www.cf.ac.uk/socsi/contactsandpeople/ harrycollins/early-days.html을 참조할 수 있다.

2) Harry Collins and Robert Evans, “The Third Wave of Science Studies: Studies of Expertise and Experience,” Social Studies of Science, 32:2(2002): 235-296.

3) 이어지는 에이즈 유행과 활동가들의 대응에 관한 서술은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닥터 골렘』(사이언스북스, 2009)의 7장(pp. 219-255)을 주로 참고했다.

4) 이는 임상시험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 한쪽(시험군)에는 진짜 약을, 다른 쪽(대조군)에는 가짜 약을 주고 결과를 비교함으로써 약효를 알아보는 것인데, 이 때 약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약을 주는 의사도 누가 진짜 약을 받고 누가 가짜 약을 받는지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플라시보 효과(약물이 아무런 임상 효과가 없는데도 환자의 마음가짐이나 기대로 인해 효과가 있는 듯 나타나는 현상)를 배제한다.

5) 에이즈 활동가들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신용을 쌓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술들에 대해서는 Steven Epstein, “The Construction of Lay Expertise: AIDS Activism and the Forging of Credibility in the Reform of Clinical Trials,”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20:4(1995): 408-437을 보라.

6) 스티븐 엡스틴, 「민주주의, 전문성, 에이즈 치료 운동」, 대니얼 리 클라인맨 엮음, 『과학 기술 민주주의』(갈무리, 2012), pp. 53-56.

7) 여기서 에이즈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갖추고 있었던 문화적 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활동가들 대부분은 작가, 배우, 예술가 등으로 과학 쪽 배경이 없었지만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백인 중산층으로 사회적 엘리트에 속했다.




할리우드 사이언스

30편의 문제적 영화로 본 현대 과학 기술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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