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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9화 아제르바이잔에서 발굴한 젊음

Editor! 2016. 12. 28. 11:06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몇 년 전 아제르바이잔에서 발굴 연구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인류학을 공부하는 제게 아제르바이잔의 발굴 참가는 약간 의외입니다. 그곳의 유적에서 나올 뼈는 겨우(?) 몇천 년 전, 아니면 몇백 년 전의 인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부한 고인류학에서 다루는 화석이 아니죠. 그래도 새로운 연구 기회가 찾아왔으니, 길게 고민하지 않고 선뜻 응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카스피해, 북쪽으로 러시아와 조지아, 서쪽으로 아르메니아, 남쪽으로 이란과 맞닿아 있다. 카스피해 연안에 위치한 바쿠가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과 경계가 맞닿은 나라 중에 제 관심을 끄는 나라는 단연 조지아입니다. 조지아는 드마시니라는 유적에서 나온 충격적인 고인류 화석으로 유명하죠. 고인류학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큰 머리와 큰 몸집, 돌로 만든 뛰어난 사냥 도구를 가지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약 70만 년 전에 구대륙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주류 가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벗어난 유적인 조지아에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은 몸집도 머리도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돌로 만든 도구 역시 그다지 인상적일 만큼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70만 년 전보다 2배나 이른 시기인 18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났습니다. 새로운 대륙으로 진출할 정도의 고인류가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많은 사람들이 집중했습니다.  수수께끼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대코카서스 산맥과 소코카서스 산맥의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 wikimedia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모두 대코카서스 산맥과 소코카서스 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제르바이잔에서도 고인류가 살았을까요? 물론 이 발굴 현장은 화석 발굴 현장이 아니었습니다만, 저는 은근히 기대를 하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의 유적은 기원후 1세기부터 중세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므로, 여태까지 제가 다루었던 연구 주제와는 완연하게 다른 시간대 스케일입니다. 몇백만 년, 몇십만 년 동안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2000년도 채 흐르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를 연구하려고 하니, 마치 도수가 바뀐 안경을 낀 것처럼 적응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해상도의 그림을 그릴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죠. 


아제르바이잔의 발굴 현장에 도착하자 그동안 잊고 살았던 땅 파는 느낌이 생생히 되살아났습니다. 30년 전 대학생 시절에 참가했던 첫 발굴 현장에서는 대삽을 받아서 선배들이 파낸  흙을 저 멀리 옮기는 역할부터 시작했죠. 이제는 대삽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인골이 발견된 현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먼지를 마시며 땅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인골을 소중히 다듬고 있으려니, 마치 첫사랑과 재회한 듯한 감동이 다가왔습니다. 겨울이 오고 다시 한번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유적은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포근했습니다. 


눈으로 덮인 유적 근처의 모습이다. 저 멀리 코카서스 산맥이 보인다. © 이희중


저는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열심히 흙을 조금씩 치워서 뼈를 노출시켰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목소리에 등을 펴고 일어섰습니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릎이 펴지지 않았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손 좀 잡아다오!”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살살 무릎 관절을 달래면서 조금씩 조금씩 펼 수밖에요.


아, 저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몸의 배신을 체험했습니다. 마음은 대학생이 되어 첫 발굴을 하던 시절로 돌아갔지만, 몸은 그런 마음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엄격한 현실로 다시 끌어당겼습니다. 아마 첫사랑과의 재회는 으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골을 노출시켰다. © 이희중


엄격한 현실은 제가 어른이 되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현장에서 조금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주위 사람들이 안절부절을 못하는 걸 봅니다. 하루는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먹지를 않습니다. “왜들 안 먹니?” 물어보려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발굴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던 그날, 제가 최고 연장자였던 겁니다. 그리고 단원들은 제가 첫 술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대학생 1학년, 발굴 현장의 막내였던 저는 어느새 제일 나이가 많은 어른 중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현장의 막내인데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성년식을 막 치룬 듯한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이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아 기릅니다. 중년이 되면 벌써 손주를 볼 나이가 되죠. 이들을 보면서 제 주위의 후배들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직 한번도 연애를 해 본 적도, 데이트를 해 본 적도 없는 30대의 재원입니다.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서, 가정을 꾸릴까 생각도 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고 합니다. 남자 잘못 만나서 재산을 다 날릴까 걱정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까 두렵다고, 그는 털어놓습니다. 그는 멋지고 경제력 있으며, 아이를 낳은 후에도 평생 사랑이 식지 않을 남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의 민속 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 이희중


인류의 진화 역사상 어른이 되는 일이 이렇게 복잡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이 되는 일은 유기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략 18세였던 그 시점이 되면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영구치의 마지막인 사랑니가 나오면서 머리도 몸집도 다 컸고, 10대 초반에 2차 성징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혼란스러운 시기를 몇 년 겪으면서 조금은 안정기를 찾고, 그동안 배워 온 지혜와 지식으로 자기 먹을 것은 찾아오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짝을 짓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독립된 어른의 삶을 살면 됐습니다. 그 모든 것이 18세 전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8년 정도를 더 살고 나면 손주를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생을 마감했겠죠.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릅니다. 어른은 패키지로 우리 앞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되는 나이는 이전과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고, 법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점은 몸이 어른이 되는 때와 비슷하게 맞물립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법적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점은 천차만별입니다. 성인식을 마치고, 혹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면 18살입니다. 전문직으로 나가기 위해 대학원 과정까지 마치고 직장을 잡으면 36살도 쉽게 넘어섭니다. 옛날이라면 수명이 다했을 나이에 다다른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어른 생활을 시작해 봅니다. 저는 회식 자리에서 배고픈 젊은이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첫 술을 서둘러 떠야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딸은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어른은 패키지라는 고정 관념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연애와 사랑이라는 개인주의적인 개념까지 들어와서, 평생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격까지 패키지에 포함됐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멋진 왕자님을 만나서 하는 결혼으로 막을 내리는 동화와 같은 삶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기다리고,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순간이 종착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섣불리 시작하기 두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몸이 독립하는 시점,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시점, 사랑하는 시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점은 모두 제각각일 뿐 아니라 한번 이루어졌다고 평생 그대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가 아니게 될 수 있듯이, 사랑을 하다가 아니게 될 수 있듯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가 아니게 될 수 있듯이. 쉽게 100년을 살지도 모르는 우리는 계속 변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모든 것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키울 수 있다면 아이부터 낳기도 하고, 함께 아이를 만든 사람과 결혼을 하기도 하고, 결혼한 사람과 아이를 낳지 않기도 합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다양한 모습의 삶이 주는 풍성함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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