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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 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본문
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 전상운
한국 과학 기술사 5,000년의 역사를
발굴하고 지켜 온 원로 학자의 60년 학문 인생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온 세상을 뒤흔든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용케도 살아남았다. 숨 막히는 공기, 벌거벗은 산하, 쏟아지며 흘러가는 흙탕물,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과 유산을 온몸으로 지켜 냈다. 이제야 우리는 물려받은 유산의 참모습을 알아보면 서 그것들을 곱게 다듬어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내가 쓴 이 글들은 그 한 조각이고 흩어진 고리들 중의 하나다. 지난 60년 세월, 나는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조사 측정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자료를 찾아 고증하는 작업을 이어 왔다. 이 글은 거기서 얻은 이삭들이다. 우리는 서유럽의 과학 기술 문명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의 과학 기술 유산을 애정을 가지고 대접하지 않았다. 물론 그 전통은 어찌 보면 근대 서유럽의 과학 기술 유산처럼 화려하고 정밀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결코 격이 낮거나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반성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재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책을 시작하며」에서
『한국 과학 기술사』 출간 50주년
한국 과학 기술사 속에 숨은 “창조적 변형”의 고갱이를 찾아온 역사
저자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님은 1966년 『한국 과학 기술사』 출간 이후 50년간 과학 기술사 연구, 과학 문화재 보전 및 복원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1974년에는 세계적인 중국 과학사 권위자 네이선 시빈의 편집으로 MIT 출판부에서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 Traditional Instruments and Techniques라는 제목으로 『한국 과학 기술사』를 영역해 출간해, 한국 과학 기술사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고,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대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사 학자 조지프 니덤, 일본 교토 대학교의 과학사 학자 야부우치 기요시 등과 함께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회의를 조직했습니다. 또한 『한국 과학 기술사』 출간 이후 수십 종의 한국 과학 기술사, 동아시아 과학사 관련 도서들을 저술, 번역 출간해 과학 기술사 연구의 대중화와 학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 과학 기술사의 커다란 사건들 중 어느 것 하나 전상운 전 총장님과 관여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국 과학 기술사는 중국 과학 기술사의 지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창조적 변형이기도 했다. 그 창조적 변형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한국 과학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상운 전 총장의 오랜 테제였다. 전상운 전 총장님은 1966년판 『한국 과학 기술사』에서 “지나친 과소 평가나 부질없는 자랑을 듣기엔 그만 멀미가 난 지 오래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앉은 비굴한 사대주의와 오만한 과대망상증을 떨어 버리고, 스스로를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과학사의 길목에 서 있다.”
노석학의 꺼지지 않는 열정을 한국 과학 기술사와 함께 읽다!
한국 과학 기술사 연구의 역사 자체를 다룬 1부 「우리에게 과학 문화재가 있었다」에 이어지는 2부 「청동기 시대의 과학 문화재」를 시작으로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그리고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과학까지 통사적으로 다루는 9개 부 35개 장의 체재에서 전상운 전 총장님의 학문적 야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2부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기원을 과감하게 기원전 15세기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에서부터 한반도의 청동기 기술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기술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활동 무대로 삼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과 만주 지역의 문명권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기술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겠냐는 추정까지 내놓으며 한국 고대 과학 기술사 및 고대사에 대한 연구 지평을 과감하게 넓힐 것을 제안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고대인이 봤을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들을 하나의 과학 문화재로서 재인식하자고 주장합니다. 한국 고대사에 대한 좀 더 큰 그림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학문적으로 제대로 규정조차 되지 못했던 고구려, 백제, 가야의 과학 기술사를 다룬 3부 「장대한 고구려의 과학 문화재」, 4부 「고대의 철의 과학」, 5부 「백제, 잊혀진 과학 왕국」에서는 고대 한국의 과학 기술사를 동아시아 과학 기술사로 확대하는 장대한 전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곳곳에 숨어 있는 흔적들에서 고구려의 과학 기술을 읽어 내고, 일본까지 흘러간 가야와 백제의 철기 유물에서 고대의 철기술을 찾아내고, 일본 교토와 나라의 청동대불과 거대한 불탑들에서 고대 백제의 요업 기술과 수학, 그리고 건축술을 읽어 내며,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의 불탑들과 문헌들을 한국 과학 기술사의 편린을 간접적으로라도 보여 주는 우리의 과학 문화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유물이 분단된 강토의 북쪽에서 있어 청동 활자와 고려 대장경 경판과 관련된 연구 말고는 활발치 않은 고려 시대 과학 기술사를 평양의 과학 기술사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원대한 꿈을 소개하는 7부 「고려 장인들의 기술 유산」에서는 민족사적인 감동까지 느끼게 합니다. 전상운 전 총장님이 해 온 연구의 출발점이기도 한 조선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해 소개하는 8부 「조선의 과학과 기술」에서는 한층 정치(精緻)해진 원로 연구자의 내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인생의 지평선이 보이지만, 커다란 짐을 내려놓고 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안간힘을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과학사의 길목에 서 있다.”라며 연구에 대한 열정을 접지 않은 노석학(老碩學)의 평생 공부가 이 책 한 권에 압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신동원 전북대학교 교수와의 특별 대담 수록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전북대학교 과학학과의 교수이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으로 한국 과학사, 의학사 연구의 젊은 권위자로 이름 높은 신동원 교수님이 대담자로 나서 전상운 전 총장님의 인생과 학문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한 9부가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이 실려 있어 가치를 더해 줍니다. 10시간 넘게 이뤄진 인터뷰를 약 150쪽에 압축해 놓은 이 대담에는 전상운 전 총장님의 인생 역정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이 상세하게 실려 있어 관련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고급 교양 지식에 목마른 독자들의 이목을 끕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혁명과 군사 정변. 20세기 전반 우리 민족은 선진과 후진, 자학과 자만의 길목에 있었습니다. 그 길목에서 선학들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 현재를 만들어 왔습니다.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님의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이 치열한 연구와 삶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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