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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여행] 12화 저우커우뎬, 변화하는 세계가 품은 고인류의 동굴 본문

완결된 연재/(完) 인류학 여행

[인류학 여행] 12화 저우커우뎬, 변화하는 세계가 품은 고인류의 동굴

Editor! 2017. 6. 10. 10:00

ⓒ이희중


『인류의 기원』으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인류학 교과서를 선보였던 이상희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님께서 고인류학의 경이로운 세계를 속속들이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최근 인류학계의 최신 성과들을 통해 고인류학의 생생한 면모를 알린 자연 과학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번 「인류학 여행」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소개한 고인류학의 세계들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예정인데요. 급속히 발전 중인 유전학과 오랜 역사와 정보가 축적된 고고학이 만나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학문인 현대 고인류학의 놀라운 면모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희 교수님이 미국에서 고인류학자로 자리 잡는 여정을 따라가며, 현대 고인류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자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고인류학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될 「인류학 여행」, 지금 출발합니다.


2009년에 학회 참석차 중국 베이징에 갔습니다. 베이징인 발견 기념으로 중국 과학원 고척추동물 및 고인류 연구소(中国科学院古脊椎动物与古人类研究所, Institute of Vertebrate Paleontology and Paleoanthropology(IVPP))가 주관한 학회였습니다.


중국 과학원 고척추동물 및 고인류 연구소(IVPP) 로고


학회 일정에 따라 중국의 수도 베이징 인근의 저우커우뎬(周口店) 동굴을 찾아갔습니다. 발견된 지 거의 100년 가까이 된 저우커우뎬은 그후 계속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원래의 유적은 없어지고, 남겨진 지층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굴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우커우뎬 동굴


1920년대에 저우커우뎬 동굴에서 발견된 베이징인은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 격인 화석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원본 화석이 없어진 후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일본 야쿠자가 갖고 있다는 소문 내지는 가설도 있죠(『인류의 기원』 10장 「베이징인과 야쿠자의 추억」 참조). 그런데 파란만장한 베이징인 화석 이야기에는 다른 주인공도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프란츠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 1873~1948년)입니다. 베이징인의 원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종적을 감추었지만, 전쟁 상황에 불안감을 느낀 바이덴라이히가 만들어 둔 복제본은 그후 2차, 3차 복제를 거쳐도 그 정교함이 손색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프란츠 바이덴라이히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였던 바이덴라이히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히틀러 치하의 유럽을 빠져나와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 잠시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필트다운인 화석이 가짜임을 알아본 학자 중 하나입니다. 그는 필트다운인이 해부학적, 형질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필트다운인은 1954년 불소 연대 측정으로 가짜임이 확인되었죠(『인류의 기원』 11장 「아프리카의 아성에 도전하는 아시아의 인류」 참조). 바이덴라이히는 1935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데이비드슨 블랙(Davidson Black, 1884~1934년)의 뒤를 이어 신생대 지질 환경 연구실(新生代地质与环境研究室, Cenozoic Research Laboratory)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바이덴라이히의 선임인 캐나다인 블랙은 그의 이름을 따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Gigantopithecus blacki)의 학명을 지었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인류의 기원) 13장 「킹콩이 살아있다면) 참조). 블랙은 베이징 협화 의학원(北京协和医学院, Peking Union Medical College) 해부학과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저우커우뎬의 초기 발굴을 지휘했습니다. 그때 발견된 고인류 화석을 연구하기 위해 그가 기금을 끌어와 만든 것이 바로 신생대 지질 환경 연구실이며, 제가 참가한 학회를 주관한 IVPP의 전신입니다. IVPP는 현재 중국의 고인류학 연구를 총괄하는 큰 기관입니다.


출처: Barras, Colin. (2016, May 19). Jungle tales: the real King Louie was the biggest ape of all. New Scientist.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2088989-jungle-tales-the-real-king-louie-was-the-biggest-ape-of-all/)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062896)


블랙은 계속 발굴되는 베이징인 화석을 놓고 불철주야 연구에 전념하다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그가 쓰러진 연구실 책상 위에는 갓 발굴된 호모 에렉투스 두개골이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데이비드슨 블랙


그렇게 돌연사한 블랙의 뒤를 이어 바이덴라이히가 소장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바이덴라이히는 블랙 못지않은 열정으로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저우커우뎬의 원본 화석을 연구하고 훌륭한 저서를 잇달아 냈습니다. 바이덴라이히의 꼼꼼한 연구는 가히 전설적입니다. 대학원 시절 고인류 화석 연구실에서 한편에는 저우커우뎬과 다양한 고인류 화석 복제본을 늘어놓고, 다른 한편에는 전화번호부를 복제한 듯한 바이덴라이히의 저서를 펴 놓고서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며 익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이덴라이히는 저의 대학원 은사인 밀포드 월포프 교수가 가장 존경하는 학자였습니다. 월포프 교수는 그가 주창한 다지역 연계론이 바이덴라이히의 생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공식적인 논문에서도 이야기하고는 했습니다. 바이덴라이히의 다지역 연계론은 유전자 교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고인류 집단들이 유전자 교환을 계속하면서 인류는 같은 종을 유지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습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바이덴라이히의 다지역 연계론은 미국의 학자 칼턴 쿤(Carleton Coon, 1904~1981년)에 의해 계승되어 ‘다지역 기원론’으로 변했습니다. 쿤의 다지역 기원론은 각 인종이 따로따로 각 지역마다 독립적으로 기원했다고 주장합니다.


쿤의 다지역 기원론을 도식화한 그림


물론 쿤의 다지역 기원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쿤의 인종주의적인 이론은 인류가 유전자 교류를 통해 하나의 종을 유지해 왔다는 바이덴라이히의 다지역 연계론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바이덴라이히의 다지역 연계론과 쿤의 다지역 기원론은 어떤 면에서는 대척점에 놓여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이론은 혼용되고 말았습니다. 쿤의 다음 세대인 월포프의 다지역 연계론 또한 초기에는 쿤의 다지역 기원론과 많이 혼동되었고, 인종주의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그 오해에 맞서 싸우기에는 적극적인 토론과 논쟁에 뛰어났던 월포프가 적임이었죠. 월포프는 다지역 연계론을 주장하면서 쿤의 다지역 기원론과 구별시키는 노력을 함께 해야 했습니다. 이론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론이 정확하게 학계에 자리 잡으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베이징에서 저는 오랜 지인들을 많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월포프 교수는 베이징 방문 때 시간을 내어 바이덴라이히가 몸담았던 베이징 협화 의학원을 찾아갔습니다.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저를 안내 겸 통역인 삼아 대동하고요. 저의 떠듬거리는 중국어 실력을 알기 때문에 고사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나마 한자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중국의 간체자를 저는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어로 겨우 물어보면 따발총처럼 돌아오는 대답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손짓 발짓으로 겨우겨우 베이징 협화 의학원을 찾았습니다. 입구의 표지 앞에서 월포프 교수는 감회에 차서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저의 중국어 수난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저녁에 근처 식당에 갔습니다. 십수 명 일행 중에 유일한 아시아 인이었던 저를 식당에서는 당연히(?) 중국인인 줄 알고 예의 따발총 같은 중국어로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는 중국어를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메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역시 간체자밖에 없었습니다.


굴하지 않고 사진으로 대충 미루어 주문을 했습니다. 당연히 유명한 북경오리를 주문했죠. 사람들은 북경오리 요리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먹고 남은 오리 뼈로 간단한 수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말입니다.


저는 난감했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저것을 써서 탕을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냅킨에 “請用那骨作湯.”이라고 한자로 쓰고, 손가락으로 남은 오리 뼈를 가리켰습니다. 천천히 말로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마치 당나라에 사신으로 온 느낌이었습니다. 식당 종업원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리 수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킨 음식이 다 나와서 배 터지게 먹고 마신 다음, 결국 우리는 오리 수프를 포기하고 일어섰습니다. 계산을 끝내고 나오는데, 식당 종업원이 쫓아 나왔습니다. 무엇인가 담긴 플라스틱 봉투를 양손에 들고 우리를 불러 세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를 불러 세웠죠. 그리고 제게 봉투를 건넸습니다. 일행이 모두 궁금해하면서 저를 주시했습니다. 저는 불안한 마음으로 봉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봉투 안에는 오리 뼈가 한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2009년에 묵었던 베이징의 호텔에서 아침 식사 시간에 마셨던 커피는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커피 기계에서 내려진 후 몇 시간 동안 보온 상태로 방치되었을 커피는 약간 탄 맛과 눌어붙어 끈적거리는 맛이 섞여 있었습니다. 학회 참석자들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호텔 식당에서도 커피를 다시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가득 남아 있는 커피를 버리고 새로 커피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겠죠. 커피를 좋아하는 저는 다음에는 꼭 커피를 호텔 방에서 직접 만들어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함께하던 참석자들 중에서는 중국을 자주 찾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이징의 호텔에서 수준이야 어찌 되었든 커피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습니다. 이전에는 차 외에 다른 음료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중국의 변화 속도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살던 친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즈음해서 매일 강산이 변하듯 달라졌다고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못 보던 고속도로가 나고 없던 높은 건물이 순식간에 들어섰다는 것이죠. 


그 놀라움은 4년 뒤 다시 찾은 중국에서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4년 뒤에 갔던 곳은 베이징 수도권도 아니고 훨씬 내륙 지방이었던 닝샤 후이족(回族) 자치구 인촨(銀川) 시와 어얼둬쓰(鄂尔多斯) 시 지역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영어 실력은 놀라웠습니다. 호텔에서 주는 커피 역시 마실 만했습니다. 호텔 주변에는 카페도 있어서 맛있는 커피를 팔고 있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한국의 경제 개발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자주 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요? 


호텔방에서 바라본 풍경. 공기가 상당히 탁했다.


고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바로 문화와 생물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고고학 자료가 나오면, 그 자료를 만들어 사용하던 사람들도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중기 구석기의 무스테리안(Mousterian) 석기 공작이 나타나다가 후기 구석기의 석기 공작이 발견되면, 무스테리안 석기 공작을 만들던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고 후기 구석기 석기 공작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왔으며, 그 사람들은 무스테리안 석기를 만들던 네안데르탈인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은연중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과 사회의 발전은 생물학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일어납니다.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과 이후의 기술과 사회, 그리고 행위 양상은 천지 차이로 다릅니다. 나중에 고고학자가 최근의 50년 동안 이루어진 기술 변화를 고고학 자료에서 발견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구비한 새로운 고인류 종이 등장해서 종이 책과 공중전화를 쓰던 고인류 화석 종을 밀어내고 새롭게 등장했다고 가설을 세울까요? 


문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고 반드시 생물학적인 변화와 함께하지 않습니다. 고고학 자료를 볼 때에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 관련 도서 ※


『인류의 기원』 [도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