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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송기원 편 ② 본문

(연재) 과학+책+수다

여자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송기원 편 ②

Editor! 2019.01.08 16:00

이번 「과학+책+수다」의 주인공은 송기원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교수입니다. 2018년 10월 출간과 동시에 APCTP(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의 ‘올해의 과학책’으로 선정, 2019년에는 국립 중앙 도서관의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되는 등 화제를 부르고 있는 『포스트 게놈 시대』를 펴낸 송기원 교수는 대통령 소속 국가 생명 윤리 심의 위원회 제5기 위원으로 활동하며, 현대 문명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는 생명 과학 연구의 근본을 성찰하자는 메시지를 진중하게 사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연구와 활동으로 바쁜 송기원 교수를 과학책방 갈다에 모셔 짧은 시간이지만 식사를 겸한 수다를 나눴습니다.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생화학자로서, 불리한 사회적 여건을 헤쳐 나온 여성 과학자로서, 과학의 민주화를 고민하는 한 사람의 시민 과학자로서의 송기원 교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2회에서는 송기원 교수의 파란만장한 유학 시절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많던 여성 과학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SB: 사이언스북스 편집부)



「과학+책+수다」 아홉 번째 이야기

여자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 송기원 편 ②




긴 겨울 눈과 씨름하며 보낸 유학 생활

SB : 교수님, 그럼 유학 얘기로 넘어가 보죠. 4년 만에 졸업하셨는데,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가신 건가요? 


송기원 : 아니요. 1년 쉬었다가 그다음 해에 갔어요. 제가 아팠었거든요. 간염이었죠.


SB :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아직 여행 자유화도 안 됐을 때니, 병 치료 말고도 준비할 게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나라에서 보는 영어 시험도 합격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 추천장이나 이런 것도 기본적으로 받으셔야 했을 테고, 국가관, 사명감 같은 정신 자세도 평가한다는 이상한 평정 시스템을 거치셔야 했을 텐데, 특별한 어려움 없으셨나요?


송기원 : 네. 여행 자유화 안 됐을 때였어요. 영어 시험도 봤었죠. 그래도 저는 포항제철에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편하게 갔다 왔지요.


SB : 유학을 어떤 식으로 준비하셨고, 어떻게 계획하셨는지 좀 얘기를 해 주시면 어떨까요. 


송기원 : 그때는 유학이라는 게 정말 너무 특별한 사람들이 가는 거였어요. 전 어렸을 때 전혜린 씨가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너무 인상 깊게 읽었어요. 작가의 독일 유학기이잖아요. 물론 유학을 가서 본인은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당시 저에겐 낭만적으로 느껴졌죠. 나도 꼭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 혼자 유학 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유학을 꼭 가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조금씩 했어요. ‘국내 대학원을 갈까?’라고도 생각을 했는데 학과 선생님들이 빨리 유학을 가라고 그러셨어요. 한국의 실험 여건이 좋지 않으니까 하루라도 젊을 때 빨리 가라고 격려를 많이 해 주셨죠. 그래서 설렁설렁하던 유학 준비를 본격적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을 때 덜컥 간염에 걸린 거예요. 4학년 때 병원에 입원하고 그랬었거든요. 한 달인가 한 달 반인가요. 그동안 준비를 잘 못 했으니까, 유학을 1년 있다가 가기로 한 거죠. 제 인생에 유일하게 쉬어 본 기간이지요. 그 1년이.


SB : 40년 가까운 연구 경력에서 그 1년이 유일하게 비어 있는 거군요.


송기원 : 네. 비어 있는 시간이 딱 1년이 있지요. 그때 포항 제철 장학생 시험도 보고 유학 자격 시험도 봐 가지고 별로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SB : 어떤 의미에서 전략적 휴식 기간이 된 셈이군요. 유학 가실 학교를 선택하거나 지도 교수를 선택하시는 일은 어떻게 하셨나요? 


송기원 : 학교는 연구를 잘하는 학교로 가는 게 좋죠. 저는 코넬 대학교에 갔는데요, 부모님의 추천이 컸죠. 저희 부모님들이 옛날에 미국에 잠깐 계셨던 적이 있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일하시면서 석사 과정을 밟으시고 그랬는데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미국에 여자 혼자 간다? 위험하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있으셨어요. 특히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주 위험하던 때였거든요. 무조건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코넬 대학교는 뉴욕 주에 있지만 엄청 시골에 있거든요. 좋은 학교인데다 시골에 있으니까 안전하고 좋다고 생각하신 거죠.


저한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으신 여성 과학자 바바라 매클린턱(Barbara McClintock)이 코넬 대학교에서 유전학을 계속 연구하셨기 때문이에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가 그분이 노벨상을 받았어요. 그분의 책을 읽었는데 무척이나 자유롭고 좋은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교 1~2학년 때쯤 텔레비전에 외국의 명문 대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처음 만들어졌던 것 같은데, 그때 봤던 코넬 대학교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선택하게 된 거죠. 부모님은 거기가 안전하다고 그러셨고요. 하버드 대학교와도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그렇게 잘했던 것 같지 않아요. 또 장학금을 준다는 얘기를 별로 안 해서 코넬 대학교에 가야지, 그러고 갔어요. 포항 제철에서 장학금도 받았고, 거기에서 지원이 안 되는 부분은 코넬에서 다 지원하겠다고 했죠. 


마리아나 울프너 코넬 대학교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과 교수. 코넬 대학교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과 홈페이지에서.


SB : 코넬 대학교 지도 교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송기원 : 코넬 대학교에 지도 교수님은 마리아나 울프너(Mariana Wolfner, 현재 코넬 대학교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과 교수)라는 막 부교수가 된 젊은 여자 분이셨어요. 큰 연구실이거나 연구가 유명한 곳은 아니었죠. 그 교수님은 코넬 대학교에서 학부를 하셨는데, 그때 공부를 너무 잘하셔서 끝나자마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따고 박사 후 연구원 과정까지 한 후 다시 코넬에서 데리고 온 분이셨어요. 그런데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요. 밝고 친절하시고, 강의를 되게 잘하시고. 또 여자 분들이 아무래도 좀 따뜻하잖아요. 지금 같았으면 다른 분을 택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되게 어렸고 영어도 잘 못했고 대하기가 좀 더 편안해서 그분에게 갔어요. 


SB : 재미있는 일화나 이런 건 없으셨어요? 어려움을 겪으셨던 일도 괜찮고요. 실제로 이공계의 많은 여성 연구자들이 성공한 연구자들로부터 진짜로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은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송기원 : 힘들었어요. 극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유학 생활은 사실은 쉽지 않았어요. 제가 일단 실험 경험이 없이 미국에 간 거잖아요. 그때 한국이 학부생이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요. 그리고 그전까진 제가 실패를 별로 안 해 봤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항상 공부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실험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엄청 열심히 하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잘할 줄도 몰라서 처음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영어도 잘 안 되니까 항상 문제지요. 우리말로 했으면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만큼 보여 줄 수 있는데 영어로 하면 최소한밖에 못 보여 주니까요. 그런 것들이 마음에 상처가 되고 힘들었어요. 거기서 실험이 잘 되고 그랬으면 전 아마 결혼 안 하고 꿋꿋하게 혼자 살았을 텐데.


SB : 결혼은 미국에서 하셨어요? 


송기원 : 결혼식이야 한국으로 잠깐 돌아와서 했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은 미국에서 했어요. 그런 결심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어요. 일요일 날 밤이었는데요. 코넬 대학교는 캠퍼스 밖으로 나가려면 골프장을 지나야 해요. 여름의 코넬 대학교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지만, 겨울에는 춥고 눈도 많이 와요.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눈이 엄청나게 오는 날이었고, 일요일 날 사람도 없는데 혼자 와서 실험을 했는데, 실험은 안 되고, 마음이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운전을 하고 밤에 집에 가는데, 그 골프장을 가로질러서 자취하고 있던 아파트에 가야 했거든요. 근데 눈이 쌓이니까 차가 미끄러져서 옆으로 반쯤 넘어진 거예요. 골프장 웅덩이 같은 데에 차가 빠진 거죠. 그날이 영하 20도쯤 됐어요. 차에서 겨우 기어 나왔죠. 다행히 차가 많이 부서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집에 가야 하는데 거기가 시골일뿐더러 미국에는 일요일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아요. 월요일부터 일해야 하니까. 한참 추위에 떨다 보니 차가 하나 지나갔죠. 노부부가 타고 있었죠. 그분들이 저를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SB : 20세기 후반 대학 구내에서 조난을 당하시다니요. 


송기원 : 룸메이트랑 차를 타고 나와서 견인업체에 전화해 차 견인하고 그랬죠. 영하 20도의 날씨에요. 그걸 다 하고 집에 오니까 새벽 3시 반인가 그렇더라고요. 룸메이트도 너무 고마웠지만, 그때 생각했죠. 결혼을 해야겠다, 이렇게는 진짜 못 살겠다.


SB : 그때까지는 Rh- 때문에 결혼 생각까지는 없으셨나요?


송기원 : Rh- 때문이라기보다 별로 인기도 없었어요. (웃음) 또 저도 뭐 특별하게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계속 혼자 살다가는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고 그때 결혼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어요.


SB : 그렇군요. 코넬대를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겨울에 한번 가 봐야겠네요. 


송기원 : 아니요. 겨울에 가지 마세요. 너무 춥고 눈도 많이 와요. 대신 여름에 가면 너무 너무나 아름다워요. 캠퍼스가 정말로 아름답죠. 


“대학교 다닐 때도 항상 공부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실험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엄청 열심히 하는데 안 되더라고요.” 송기원 연세대 교수. ⓒ ㈜사이언스북스.



난산으로 고통 받던 지도 교수 침실에서 치른 박사 자격 시험 

SB : 교수님, 박사 논문은 어떤 걸 쓰신 거예요? 


송기원 : 제 지도 교수님께서 원래 하셨던 연구는 어떻게 성(性)이 결정되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발생 과정에서 어떤 유전자들이 발현되어서 여성(암컷)과 남성(수컷)이 되느냐를 초파리를 가지고 연구하고 계셨죠. 그런 연구를 박사 후 연구원 과정 때 하셔서 좋은 논문을 많이 내시고 코넬에 와서도 그런 연구를 쭉 하고 계셨어요. 초기 배아의 발생을 일어나게 하는 유전자를 찾는 일을 하고 계셨죠. 저는 그중에 한 유전자를 맡아서 연구하게 됐는데 그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초기 배아가 세포 분열이 안 돼요. 난자 상태로 수정돼서 그냥 있다가 죽는 거예요. 


근데 그 연구가 그때 잘 풀리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그때 세포 분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요. 세포 분열을 유전자 수준에서 이해하는 연구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 세포 주기와 초기 발생을 연결해서 연구를 하게 됐어요. 그때 논문 제목이 「초파리 초기 배아 발생에 필수적인 핵막에 존재하는 단백질에 대한 유전자 fs(1)Ya의 변이체 분석(Mutational analyses of fs(1)Ya, an essential, developmentally regulated, nuclear envelope protein in Drosophila)」예요. 


박사 과정 때 재미있었던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저희 지도 교수님은 제게 있어 좋은 롤 모델이었어요. 인간적으로도 좋은 분이셨고요. 그분이 제가 박사 과정을 할 때 결혼을 하시고 늦게 아기를 가지셨는데, 아이가 유산이 될 확률이 높아서 다리를 거꾸로 높이 들고 침대에 24시간 누워 계셔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으니 연구실에 못 오셨던 거죠. 그때 제가 박사 자격 시험을 쳐야 했거든요. 보통 박사 과정 시작하고 2년에서 2년 반 정도 지나고 치는 시험이지요. 그래서 제가 박사 위원회 멤버이신 부심 교수님들을 제 차에 모시고 교수님 댁까지 가서, 교수님 침실에서 시험을 봤어요. 


SB :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겠네요. 


송기원 : 그분은 침대에 누워 계시고 저는 이쪽에 앉고 다른 교수님들은 반대쪽에 앉아서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분이 아주 똑똑하시고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그 능력만큼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자가 되신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그렇지만 삶과 과학을 병립해 가시는 모습이 저한테 공부가 많이 됐어요. 


SB : 그럼요. 굉장히 책임을 다해 주신 거잖아요. 그런 상황이면 심사를 다른 분한테 넘겨 버리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송기원 : 네, 과학에서는 묵묵히 계속하는 게 중요한 것임을 배웠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조그만 결과라도 나오면 같이 굉장히 기뻐해 주셨죠. 선생님의 과학을 대하는 자세가 저한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원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유명해지시지는 않았지만요. 


그분은 학부 때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냈거든요. 코넬 대학교에 있다가 나중에 연구 성과가 좋아서 MIT로 가신 제럴드 피셔(Gerald Fisher) 교수님 밑에서 학부생으로 연구에 참여하셨고요. 그때 굉장히 잘 나가셨죠. 박사 과정은 스탠퍼드에 가서 데이비드 호그네스(David Hogness) 교수님 밑에서 했는데, 여러 박사 과정생 중 본인만 아무 논문을 못 내셨대요. 그래서 박사 과정 때 굉장히 힘들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너무 힘들어할 때 그런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자기도 너무 힘들었다고. 한참 후에 선생님이 하신 연구가 가설이 틀려서 나올 수 없었던 결과라는 게 밝혀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 좋은 논문을 쏟아 내는데 자기만 아무 논문도 못 내는 상황이었대요. 미국에서는 논문을 발행하면 학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지도 교수가 자격이 됐다고 판단하면 박사 학위를 주거든요.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가셔서 그때는 좋은 논문을 많이 내셨지만 박사 학위 딸 때까지는 엄청 마음 고생을 하시면서 공부하신 거죠. 그래서 제가 마음 고생 하는 걸 이해해 주시고 공감해 주셨어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 하는 식으로 격려를 많이 해 주셨어요.


SB : 말씀을 들을수록 매력적인 분인데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도 교수 선생님한테 들은 좋은 얘기가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송기원 : 신기한 게, 저희 지도 교수님도 Rh- 혈액형이셨어요. 초파리 유전자 연구를 할 때 이성에게 노출되지 않은 버진(virgin) 초파리를 마취시키고, 현미경 아래서 표현형 타입에 따라서 분류하는 작업을 해야 했어요. 그걸 하려면 초파리 실험실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지요. 단순한 작업이라 심심하니까 이 얘기도 하고 저 얘기도 하면서 작업하는데, 선생님이 어느 날 “너는 왜 유전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니?” 물으셨어요. 제가 “나는 Rh-라서 그랬어요.”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Rh-야. 나는 특히 Rh- O형이라 수혈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적지만 별로 중요한 일 아니야.” 하시더라고요. (웃음)


SB : 앞에서 말씀하신 Rh-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복선이었군요! 



쪽잠은 청소용품 보관실에서

SB : 교수님, 이제 박사 후 연구원 때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학위 받으신 다음에 박사 후 과정을 밴더빌트 의대에서 하셨죠. 미국 남부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의대잖아요? 


송기원 : 사실 저는 MIT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요. 저희 신랑(조명현 고려 대학교 교수)이 밴더빌트 대학교 경영 대학원의 교수로 임용이 됐어요. 이공계는 교수가 되려면 박사 후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문과는 학위를 받기만 하면 능력에 따라 금방 교수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SB : 남편 분과는 미국에서 만나신 거군요. 


송기원 : 네. 코넬 대학교 다닐 때요. 그래서 한동안 떨어져 있을까도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MIT로 가고요. 근데 켐퓨에스 선생님, 아까 말씀드렸듯 배아 발생 과정에서 스핀의 방향 조절에 처음 관심 가지신 제 박사 과정 부지도 교수님께서 조언을 하셨어요. 


SB : 예쁜꼬마선충으로 연구하신 분이요? 


송기원 : 네, 저랑 친했었거든요. 좋은 과학자셨어요. 그분이 저한테 자기는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과학을 버릴 수도 있다며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충고해 주셨지요. 


SB : 그분도 여자 분이셨어요? 


송기원 : 아니요. 남자 분이셨어요. MIT 가서 과정 밟는 게 뭐가 중요한 일이라고 그러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막 애를 낳았거든요.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애는 누가 키울 거냐고, 애를 한국으로 보내고 떨어져 지내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요. 


SB : 박사 과정 중에 결혼을 하셨군요. 중간에 서울에 들어왔다 나가셨겠어요. 


송기원 : 네. 또 1994년에 한국에 전쟁 난다는 루머가 한참 퍼졌거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로 애를 보내지 못하고, 우리 셋이 같이 사는 걸로 결정했어요. 또 밴더빌트 대학교가 생각보다 좋은 학교더라고요. 그래서 가게 됐어요. 


SB : 그쪽에서는 한 2년 계셨던 거군요. 그때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같은 연구를 하셨나요? 


송기원 : 그때 제가 효모 연구하는 걸 배웠어요. 효모가 두 종류인데, 출아형 효모가 있고 그냥 막대기형 효모가 있어요. 막대기형 효모가 세포 주기 연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발견을 많이 하게 해 준 그런 생명체거든요. 막대기처럼 생긴 효모를 분열형 효모라고 그래요. 2001년 노벨상을 받은 폴 너스(Paul Nurse)라는 영국 과학자의 연구실에서부터 그걸 해 오셨던 분이 계셨어요. 또 MIT에서 막 조교수로 부임해 분열형 효모를 연구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 연구실에 가게 됐어요.


SB : 의대에도 기초 연구하는 과들이 있죠. 


송기원 : 저는 생화학과에 있었어요. 


출아법으로 분열하는 출아형 효모 세포. (cc)Masur/wiki.


막대기처럼 생긴 분열형 효모 세포. (cc)David O. Morgan/wiki.


SB : 남부의 날씨는 좀 즐기셨나요?


송기원 : 아뇨. 남부에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적었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가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 전부잖아요. 근데 그렇게 실험해 가지고는 진도가 잘 안 나가거든요. 그때 실험실에 가면 한 번도 못 앉고 계속 일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SB : 잘못 여쭤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육아하고 실험을 병행을 하셨겠네요? 


송기원 : 네. 정말 힘들었어요. 그리고 저희 신랑도 조교수였는데, 그때는 한국에 오게 될지 안 오게 될지 잘 몰라서 거기서 테뉴어(Tenure, 종신 재직권)를 받으려고 했어요. 그러려면 정말 열심히 논문을 써야 했죠. 그래서 매일 싸웠어요.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저도 가서 실험을 해야 하고 신랑도 가서 일을 해야 하니까, 내가 실험실 2시간 갔다 올 테니 나머지 시간에는 당신이 가서 일할 수 있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실험하러 나갔죠. 근데 실험하러 가면 2시간 만에 어떻게 와요? 


SB : 그렇지요. 못 오지요. 


송기원 : 제가 4시간, 5시간 있다가 나타나면 신랑이, “2시간 만에 오기로 약속을 하고 갔는데 5시간 만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냐?”라고 하죠. 이런 식으로 맨날 싸웠어요. 또 애가 아프면 탁아소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럴 때 정말 힘들었어요. 애가 어릴 때 탁아소를 다녔으니 감기에 자주 걸렸는데 그러면 귀 안에 물이 차면서 염증이 생겼어요.


SB : 중이염 같은 거요? 


송기원 : 네. 중이염이지요. 눕히면 아파해서 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그랬죠. 그때 정말 힘들었나 봐요. 시간이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청소용품 놓고 매트리스 쌓아 놓은 방에 살짝 들어가 잠깐 기대서 자고 그랬어요. 


SB : 집에서요? 


송기원 : 아니요. 학교에서 실험하다가요. 실험 도중 인큐베이터나 원심분리기 30분 돌려 놓고 기다리는 동안 자고 오고 그랬어요. 너무 밤에 잠을 못 자고 힘들어서요. 


SB : 그때는 미국도 연구자들을 위한 지원 시설이나 이런 게 많지 않았나 봐요? 


송기원 : 탁아소가 있었는데요, 거기는 들어가는 순번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좋은 탁아 시설이 있으니 아이를 낮에는 맡길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저희가 한국에서 공부를 했으면 주말에라도 부모님께 잠깐 맡기고 좀 쉴 수가 있는데, 미국에서는 둘밖에 없으니 주말에는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죠. 또 애가 아프거나 그러면 탁아소에서 안 받아 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지요. 당시 지도 교수님이 조교수였고 지금 생각하면 그분 역시 빨리 연구 성과를 내야 해서 마음이 무척 급했을 것 같은데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가 애 아파서 못 나가기도 했는데 그러면 좋아하지는 않으셨지만 어쨌건 뭐라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SB : 박사후 연구원 과정에 있을 때 지도 교수님이요?


송기원 : 네. 찰스 올브라이트(Charles Albright)라는 젊은 남자 분이셨는데 본인도 아기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뭐라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좋아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저한테 일하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얘기를 하신 적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쩔 수가 없다고 했죠. 학교랑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아서 밤에 학교 연구실 왔다 갔다 할 수도 없고. 하여튼 그때 되게 힘들었어요. 그때가 살면서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송기원 연세대 교수. ⓒ (주)사이언스북스.



여자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SB : 그러면 박사 후 과정을 마치신 뒤 서울로 돌아오신 얘기로 넘어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로 돌아오기로 결정하신 건 너무 힘들어서 그러셨던 거예요? 미국 생활이?


송기원 : 아니요. 저는 사는 게 힘이 들어서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연세 대학교에서 여학생이 많아져서 여자 교수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연구하던 분야가 한국에서는 새로웠던 분야라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학과 선생님을 통해, 우리가 이러저러한 전공을 뽑으려고 하는데 너도 한번 지원해 봐라 하는 연락이 왔어요. 물론, 저한테 뿐만 아니라 졸업생들 대부분에게 연락하셨을 거예요. 전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서울에서 사람을 뽑는지, 안 뽑는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제가 박사 후 과정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논문도 많이 없었어요. 박사 과정 때 연구들이 그렇게 성공적이지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이 실험하고 육아하고 하루하루를 버텨 가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 연락이 왔어요. 그것도 학과에서 한 번에 2명의 교수를 뽑는다고. 그때가 마침 우리나라 대학 이공계들이 팽창하기 시작할 때였어요. 한국에서 처음 연구 중심 연구비도 생기고 연구 시설을 지원하는 지원금들도 생기고요.


SB : 그때가 1995~1996년이니까 마침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던 문민정부 때였죠. 


송기원 : 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지원해 보라는 연락을 받고 지원을 하게 되었어요. 


SB : 그럼 서울의 자리가 남편 분보다 먼저 결정이 되신 건가요? 


송기원 : 네. 


SB : 부부 사이에 갈등이 없으셨어요? 돌아오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송기원 : 한 사람이 되니까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도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가 되어서 같이 돌아오게 됐어요. 한 학기 후에 남편도 바로 자리를 찾았어요.


SB : 자연스럽게 정리되셨군요.


송기원 : 네. 


SB : 서울에서 이렇게 교수 자리를 잡는 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유학 나가 있는 여학생들도 그렇고, 물론 남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송기원 : 네, 다 힘들죠.


SB : 그래서 원래는 어떤 특별한 전략이나 비결이 있었는지 여쭤 보고 싶었는데요……


송기원 : 전략이나 비결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은 무척 공정하게 사람을 뽑기 때문에, 자기 연구를 열심히 하고, 그 연구 분야가 학과에서 필요한 분야와 잘 맞아 떨어지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사실 학교 다녔을 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는 걸 선생님들이 기억해 주신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연락도 주시고 기회도 주시고 했겠죠. 아주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요즘은 어느 학교나 공정하게 사람을 뽑아요. 연구를 잘할 역량이 있어 보이고, 그다음에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가 당시 대학에서 원하는 분야면 확률이 되게 높아요. 다시 말해 분야랑 연구 역량이 중요하지요. 


SB : 그런데 분야 같은 건, 학생 입장에서 보자면, 대학에 처음 입학하는 때를 기준으로 10년 뒤에 유망해질 분야를 무엇인지 알아보고 선택해야 하는 거잖아요. 


송기원 : 뭐가 유망해질지를 보고 그것을 고르는 삶을 저는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고요. 그게 또 맞는 선택인 것 같지도 않아요.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게 10년 뒤가 되면 유행에 뒤떨어지겠죠. 과학이라는 게 계속 새로운 질문이 나오니까, 자기가 재미있는 것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과학 연구를 하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거든요. 그걸 버텨내는 힘은 자기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걸 하고 있어야지 생길 수가 있어요. 유망하다는 이유로 하고 있으면 버티기가 힘든 것 같아요. 저는 아주 운이 좋아서 교수가 됐지만 제가 유학을 갈 당시, 그리고 학부생일 때는 연세 대학교에 이공계 여자 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유학을 가서 공부해 보는 거니까 일단 한번 가 보자 해서 유학을 간 게 다예요. 공부를 시작한 다음에는 재미있어서 했고, 하다 보니 이거 해서 굶어 죽기야 하겠냐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했죠. 전략적으로 유망한 분야를 찾지는 않았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저에게 재미있을 것 같은 주제를 공부하게 됐어요. 자기가 재미있는 걸 택해서 그냥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 아닌가 싶어요. 


SB : 서울로 돌아오셔서 연세 대학교 이공계에서는 두 번째 여성 교수님이신 거지요? 


송기원 : 아뇨. 제가 오니까 이미 네 분이 계셨어요.


SB : 이공계를 통틀어서 다섯 번째이셨군요.


송기원 : 네. 제가 다섯 번째에요. 네 분이 계셨어요. 저희 과에 이미 한 분이 몇 년 전에 오셨고 컴퓨터 공학과에 한 분이 계셨고, 물리학과에 한 분이 계셨고, 대기 과학과에 저보다 한 학기 먼저 오신 분이 있으셨어요. 저랑 거의 같이 오신 거죠. 


SB : 처음에 오셨을 때는 출산 휴가도 없었고 굉장히 힘드셨다고 들었거든요. 1990년대 후반인데도. 


송기원 : 1990년대 후반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어요. 그때 제가 연세대에서 테뉴어를 받고 나서 둘째 애를 가졌어요. 박사 후 과정을 할 때 첫 번째 애를 기르면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 아기를 낳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저희 부부 둘 다 이걸로 이제 끝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연구실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일을 무리하게 하느라고 제가 막 쓰러지기도 했고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어요. 뇌막염도 걸렸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잘 안되고 하는 일의 연속이었죠. 어떻게 어떻게 몇 년을 버티며 조그만 결과라도 생기면 논문 쓰고 결국 테뉴어를 받고 보니까 ‘내가 이제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건 물 건너갔구나.’ 이런 생각이 딱 들었어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사는 걸로 만족해야지, 싶더라고요. 또 첫째 아이는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서 잘 커 있더라고요. 어쩌면 저게 더 남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에 둘째 애가 우연히 생겼어요. 큰일은 그다음이었죠. 출산 휴가를 쓰려고 알아보니, 교수를 위한 출산 휴가 제도가 없다는 거에요. 그때까지 여자 교수도 많지 않았던데다가 여자 교수가 출산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보다 1, 2년 먼저 영문학과 여자 교수님도 출산 휴가 없이 애를 낳으셨다더군요. 저도 출산 휴가가 없었어요. 교무처에서 선례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SB : 이공계만 그런 게 아니라 문과 다 합쳐서 학교 전체에서 없었다고요? 


송기원 : 학교 전체에서 여자 교수가 출산을 한 경우가 그 영문과 선생님이 처음이었고 제가 두 번째였죠. 그분도 학교에서 아무 대책을 안 세워 준 거고, 저도 아무것도 안 세워 준 거죠.


SB : 세상에, 21세기에. 


송기원 : 네. 그런데 직원들은 출산 휴가가 있거든요. 직원들은 있는데 왜 교수가 없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이런 경우가 없어서 어떤 규칙을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둘째를 낳은 후 한 3년쯤인가 있다가 교수를 위한 출산 휴가 제도가 생겼어요. 2년인가……


SB : 교수님은 전혀 휴가를 못 받으신 거네요. 


송기원 : 전혀요.


SB : 고생하셨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래도 서울에 있으니까 좀 나으셨겠죠. 


송기원 : 마찬가지로 고생했지요. 그래도 학장님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셨어요. 제가 아이를 2월에 낳았는데 그다음 3월에 강의를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3월 학기에 할 강의를 미리 그 전 가을 학기 때 당겨서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한 과목 강의를 더 했어요. 나머지 과목은 제가 가르치지 못하는 동안은 강사를 사서 했어요. 


SB : 조삼모사 같은데요. (웃음)


송기원 : 아니요. 그것도 배려였어요. 왜냐하면 당시 학교 규정에 따르면 추가 강의를 해도 그것이 그다음 해로는 이월이 안 되었거든요. 그냥 강사료를 더 주고 말지. 한 학년이 봄 학기, 가을 학기로 되어 있으니까 봄에 더한 것은 가을로 이월이 되는데 가을에서 그다음 해 봄으로는 안 됐어요. 그런데 저는 가을에서 봄으로 이월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거예요. 혜택 아닌 거 아니에요. 


SB : 그렇군요. 또 다른 일은 없으셨어요? 


송기원 : 많았죠. 어떻게 테뉴어 받고 애 낳을 생각을 하냐는 둥의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들 도움을 주셔서 애를 낳고 기를 수 있었어요. 힘들었던 건 과제 심사를 받아야 했을 때였어요. 제가 둘째 애는 제왕절개 수술로 낳았거든요. 애가 거꾸로 들어섰죠. 그런데 제왕절개 수술하면 6주가 지나야 밖에 나가 일을 할 수가 있는데 과제 심사가 4주차 정도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퉁퉁 부어서 가서 과제 심사 발표를 했어요. 의사가 이러면 곤란하다고 그랬는데 했어요. 하여튼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정말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없이 보냈죠. 


SB : 정말 대단하십니다. 


송기원 : 대단한 게 아니에요. 여자 과학자들은 대부분 다 그렇게 살았어요. 다만, 불쌍해서 과제 점수 잘 주지 않았을까요? 퉁퉁 부어 가지고 심사 발표를 통과하고 과제를 땄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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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도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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