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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병이 몰고 온 바람 - 중세 페스트의 사회학 본문

(연재) 무서운 의학사

6. 역병이 몰고 온 바람 - 중세 페스트의 사회학

Editor! 2020. 3. 13. 16:46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200편 이상의 의학사 관련 칼럼을 쓴 이재담 교수님의 『에피소드 의학사』(2020년 3월 출간 예정)에서 전염병과 관련된 6편의 글을 미리 보는 특별 연재 '무서운 의학사'. 벌써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3월 12일, 세계 보건 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서 코로나19에 판데믹(pandemic, 세계적 범유행)이 선언되었습니다. 1968년 홍콩 독감과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에 이어 역대 세 번째인 이번 선언은, 코로나19가 전세계 113개국에서 12만명의 확진자를 돌파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09년 8만 명 이상의 확진자와 14,000명의 사망자를 낸 신종 플루(A(H1N1)pdm09 인플루엔자)가 세월과 함께 토착화되면서 이제는 A형 계절 인플루엔자로 변한 것처럼, 코로나19 역시 언젠가는 치료제, 백신의 개발과 함께 인류가 통제 가능한 시점이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 현대 사회에 어떤 상처와 영향을 줄지는 아직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단계에 있습니다. '무서운 의학사' 마지막 연재에서는 코로나19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단서를 잡기 위해, '신의 천벌'이었던 14세기의 페스트가 중세 유럽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 경과를 추적해 봅니다. 


무서운 의학사

6. 역병이 몰고 온 바람
중세 페스트의 사회학

스위스 토겐부르크 성경에 기록된 페스트 환자의 모습. public domain.

1347년부터 1350년에 걸쳐 유행한 페스트는 유럽에서만 약 2000만에서 3500만 명가량의 희생자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대적인 유행은 영주를 포함하는 기사 계층과 성직자 계급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의 봉건 제도를 뿌리째 뒤흔들었는데, 사회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의 흐름이나 개인의 가치관에도 광범위하고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조스 리페랭스(Josse Lieferinxe, ?~1508년)의 「역병 희생자를 위해 탄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직자 앞에서 애통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public domain.

페스트로 가장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은 교회의 권위였다. 병이 돌자마자 추기경이나 주교와 같은 고위 성직자가 앞다투어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더는 교회를 존경하지 않았고, 많은 성직자가 병으로 사망한 것도 교회의 쇠락을 가져왔다. 죽은 이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자질이 부족한 성직자가 대거 등장하자 평판은 더욱 추락했다. 또 기도나 고행이 병 예방이나 치료에 전혀 효과가 없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역병이 인간의 죄에 내리는 신벌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에 민중의 마음속에 쌓였던 실망감이 후일 종교 개혁의 토양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세 장원 경제를 떠받쳐 왔던 농노제 또한 유명무실해졌다. 역병으로 도시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줄고 노동력이 귀해져 임금이 오르자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했다. 그 결과 지주들이 농업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 농촌에서 농노가 없어지고 소작농이나 자작농이 생겨났다. 이는 오랜 기간 서양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봉건 제도의 종언을 예고하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농노의 모습을 그린 중세 영국의 삽화. public domain.

산업의 양상도 달라졌는데 노동력 부족으로 비교적 손이 덜 가는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나 포도주, 즉 오늘날의 와인 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투입된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목축업이 새로이 각광받게 되었다.

직업으로 보면, 페스트 대유행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언제나 그렇듯) 변호사였다. 의사들이 페스트와의 싸움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하면서 직업적 신용은 물론 목숨까지 잃었던 것과는 달리, 변호사들은 페스트가 지나간 뒤 죽은 사람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송사에 개입해 많은 돈을 벌었다.

일반 가정의 가족 구성에도 변화가 있어 중산층에서 과부가 많아졌다. 여성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남성들이 감염에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페스트로 유산을 상속받아 자산을 소유한 여성이 늘어나자 이들의 발언권과 자율성이 커졌다. 페스트 유행은 지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 셈이었다.

20세기 최대의 재앙이었던 1918년의 스페인 독감으로도 유럽에서 2000만 명가량이 죽었지만, 중세 페스트를 역병의 으뜸으로 꼽는 이유는 총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3명에 1명꼴로 사망자를 낸 중세 유럽이 인구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불행은 역설적으로, 여성과 농노의 인권 신장, 종교 개혁의 가속화, 와인과 목축 및 낙농업의 발전 등 낡은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힘으로 작용했다. 페스트는 암흑기라고 불리던 중세의 종말을 앞당긴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재담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시립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과학사학 교실 방문 교수와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 생화학 교실 및 인문 사회 의학 교실 교수, 울산 대학교 의과 대학장, 울산 대학교 의무부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의학사 관련 칼럼을 썼으며, 번역서로 『근세 서양 의학사』, 『의료 윤리 Ⅰ, Ⅱ』와 저서로 『의학의 역사』, 『간추린 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이재담의 에피소드 의학사 1: 무서운 의학사』
(출간 예정)

 

『의학의 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서양 의학의 역사

 

『미생물의 힘』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바꾼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의 흥미진진한 역사

 

『아름다운 미생물 이야기』
미생물의 탄생과 진화 다 모았다!

 

『전염병의 문화사』
인류를 만들어 온 것은 병원성 미생물들일지도?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병과 의학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스트레스』
치명적인 질병을 부르는 현대의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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