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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이언스-오픈-북

이 책은 압도적이다

Editor! 2021. 10. 13. 18:00

스티븐 핑커의 최신작, 『지금 다시 계몽』을 읽고, 한국의 핑커주의자 전중환 경희 대학교 후마니스트 칼리지 교수가 서평을 보내왔습니다. 한국 언론이 뜨겁게 반응해 준 책, 한국 지식인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두꺼운 벽돌책에 그득 담긴 핑커의 사상을 언제나 꼭꼭 씹어 너무나도 바쁜 한국 독자들에게 독서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시는 전중환 교수님의 서평을 통해 미리 만나 보시죠.


계몽주의 리부팅을 역설한 핑커의 신작, 『지금 다시 계몽』.  사진 ⓒ ㈜사이언스북스.

 

1930년대 일제 치하 동아일보에는 독자가 보낸 질문에 기자가 답하는 응접실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몇 가지 살펴보자.

 

독자: 요즘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 고문 없이 죄인을 가려내는 세상은 요원하단 말입니까?
기자: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독심술을 개발해 낸 것도 아니고 하여, 여전히 고문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조 링크)
독자: 조선 사람의 경제가 지금같이만 계속되어간다면 결국은?
기자
: 결국은 굶어 죽지요.

독자
: 남자는 유처취첩(有妻取妾, 부인이 있지만 첩을 취한다.), 여자는 불경이부(不更二夫,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 하니 대관절 이 법을 누가 제정하였습니까?
기자: …… 유처취첩하는 것은 어떤 남자들의 월권적 행동이지 법적 제정이야 있을 리 없습니다. (참조 링크)

 

과거는 낯설다. 고문이 공공연히 용인되고, 집단 아사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첩을 들이는 남성이 흔한 시절이었다. 몇십 년 후에 후손들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에 BTS를 배출하는 선진국에서 살리라고는 어떤 선조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만하면, 한국은 참 좋아진 것 아닐까? 한국민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옛날보다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 아니야.” 지식인들은 이 질문에 코웃음을 친다. “지식인들은 진보를 싫어한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일컫는 지식인들이 진보를 정말 싫어한다.”(71) 감염병, 전쟁, 테러, 범죄, 오염, 불평등,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양극화가 날마다 뉴스를 도배하는 마당에, 성장 신화에 갇힌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폐기하고 인간과 지구가 공존하는 생태 문명을 건설해야 하는 마당에, 역사의 진보라니? 이 무슨 낡고, 가엾고,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고, 대책 없이 낙관적인 발상인가? 우리나라만 해도 실상을 파헤쳐 보면 빈부 격차, 젠더 갈등, 저출산, 높은 자살률에 허덕이는 헬조선이지 않은가?

 

진보는 헛된 꿈이라고 치부하는 세태에 인지 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도전장을 내민다. 신작 지금 다시 계몽(Enlightenment Now)에서 핑커는 그래도 옛날보다는 좋아진 것 같은데.......”라며 많은 사람이 소박하게 품는 추측이 맞는다고 힘을 실어 준다. 진보는 별것 아니다. 이성과 과학을 활용하여 인류의 고통을 줄이고 번영을 늘리는 것, 그게 진보다. 이러한 이상에 열린 사회’, ‘홍익인간’, ‘세속적 인본주의’, ‘리버럴 세계 시민주의등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핑커가 택한 이름은 계몽주의. 칸트, , 스피노자, 홉스, 애덤 스미스 등 18세기의 계몽 사상가들이 처음으로 이를 정립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의 이상이 소망했듯이, 전 세계는 실제로 조금씩 나아져 왔음을 핑커는 유엔 같은 국제 기구,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Our World in Data) 같은 글로벌 통계 사이트, 그리고 각 나라의 정부 기관이 제공하는 방대한 통계 자료를 인용해 입증한다.

 

 

2016년 방한 시 환담을 나누는 핑커와 전중환 교수. 사진 ⓒ ㈜사이언스북스.

 

 

지금 다시 계몽은 압도적이다. 독자를 혼란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기쁘게 한다. 개인적 삶과 사회 현상, 그리고 세계 동향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준다. 적어도 필자는 그러한 변화를 겪었다. 이 책을 집어 든 당신의 관점도 크게 바뀔 것이라 믿는다. 주의 사항이 있다. 핑커는 세상을 볼 때 되도록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에 더 주목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이 반쯤 찬 컵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네!”보다 물이 반이나 있네!” 이야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 세상을 오직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 이해하라고 핑커는 말한다. 만약 번영을 측정할 수 있는 여러 척도상에서 건강, 지식, , 평화, 안전, 환경, 행복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선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진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진보를 이끈 근대적인 제도들, 즉 민주주의, 시장, 국제 협력 기구, 인권 선언, 언론의 자유 등을 더 탄탄히 정비함으로써 앞으로도 진보를 일구어내리라 기대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이상은 실현되었다

 

계몽주의의 이상은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라는 네 기둥으로 지지가 된다. 첫째, 믿음을 만드는 원천으로 전통, 권위, 신앙, 계시 등을 거부하고 이성을 받아들인다. 둘째, 외부 세계는 그보다 더 낮은 수준에 있는 일반 원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이해하는 과학을 통해 믿음직한 지식에 도달한다. 셋째, 국가, 민족, 유일신의 초월적 영광보다는 살아 숨 쉬는 개개인의 세속적 안녕이 궁극적인 도덕적 잣대가 된다. 넷째, 지식을 사용해 인류의 복지를 향상함으로써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

 

핑커는 계몽주의의 이상이 인류 역사에서 과연 실현되었음을 서술하는데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다음은 필자가 좋아하는 예들이다.

 

 

인류의 안녕과 복지가 어떤 식으로 진보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그래프로 가득한 『지금 다시 계몽』. 본문 144-145쪽에서. ⓒ㈜사이언스북스.

 

 

수십만 년 전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조상 인류의 기대 수명은 약 30세 초반으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1900년에도 전 세계 기대 수명은 고작 32세였다. 19세기부터 인류가 질병, 빈곤, 조기 사망에서 벗어나면서 위대한 탈출이 시작되었다. (94~95) 2019년에 전 세계 기대 수명의 평균값은 몇 세일까? 개발 도상국이 인구도 많이 차지하고 영유아 사망률도 높음을 고려하라. 정답은 72.6세다. (참조 링크)

 

18세기 후반까지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은 환자의 피를 주사기로 몸 밖으로 뽑아내기, 기도문을 외기, 제물을 바치기, 감염된 신체 부위에 닭을 대고 문지르기 정도였다. 1836년에 세계 최고의 부호였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감염된 종기에 바를 항생제가 없어서 사망했다. (108~109) 환자의 피부, , 눈을 흉측한 고름으로 뒤덮는 천연두는 20세기에만 3억 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제너의 종두법이 나오면서 오늘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11)

 

1968년에 생물학자 폴 에를리히는 인구 폭발이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에게 식량을 제공하려는 전투는 끝났다.”라고 선언하며 1980년대까지 미국인 6500만 명과 다른 나라 국민 40억 명이 굶어 죽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124) 영유아 사망률이 감소하면서 사람들이 자식을 적게 낳고, 수확량이 큰 품종을 개량해 내는 녹색 혁명이 일어난 덕분에 다행히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녹색 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는 전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국, 캐나다, 중국을 합친 크기의 지역을 개간해서 경작해야 했을 것이다. (128)

 

인류 역사에서 대다수 사람은 거의 언제나 극도로 가난했다. 산업화 이전에 유럽에서는 옷을 사는 일이 큰 사치여서 보통 사람들은 평생 몇 차례만 옷을 살 수 있었다. 역병이 돌면 사람들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몰려들어 옷을 노리고 기다렸다. 이 때문에 전염병이 더 빨리 확산했다. (134) 지난 2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극빈자(하루에 1.9달러 이하를 버는 사람)가 차지하는 비율은 90퍼센트에서 10퍼센트로 줄었다. (144)

 

1900년에 여성이 투표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뉴질랜드 한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바티칸 시국을 제외하면 모든 나라에서 여성도 투표할 수 있다. (342)

 

가뭄, 홍수, 지진, 태풍, 화산, 산사태, 폭염, 한파 같은 천재지변으로 죽는 전 세계 사망자 수도 지난 100년에 걸쳐 크게 감소했다. 자연 재해가 점차 드물게 일어나서가 아니다. 사회가 부유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상 예보, 안전 교육, 의료, 재난 대비 훈련 등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노여움을 사서벼락 맞아 죽는 사람의 수도 미국에서 지난 100년 동안 37분의 1로 줄었다. (292~294)

 

삶의 질도 높아졌다. 1870년에 서유럽 사람들은 일주일에 평균 66시간 일했지만, 오늘날에는 채 40시간도 일하지 않는다. 전기, 수도, 가전제품이 보급되면서 미국인들이 집안일에 빼앗기는 시간은 1900년에 주당 58시간에서 2011년에 15.5시간으로 거의 4분의 3이나 줄어들었다. (386) 전화,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 주었다. 예전에는 가족이 먼 나라로 이주하면 유일한 소통 수단은 느리고 느린 편지나 터무니없이 비싼 국제 전화밖에 없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주인공 성기훈의 어머니는 기훈의 딸이 미국으로 이민 가면 영영 못 보게 된다며 기훈을 질책한다. 손녀랑 영상 통화하시면 되지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

 

 

다 잘 될 테니 근심하지 말란 말인가?

 

어떤 의미에서, 핑커는 지금 다시 계몽에 가장 호의적으로 반응할 나라는 한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국은 최근까지 지독하게 가난하다가 엄청난 속도로 부유해진 나라로(142), 그리고 한때 전체주의에 신음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꽃피운 나라(322)로 인용된다. 진보를 가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척도에서 세계는 나아졌고, 특히 우리나라는 눈부시게 나아졌다. 이만하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초장기 슈퍼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리라고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길 바라지만, 가능성은 적다. 필자는 지난 이태 동안 이 책을 비롯하여 한스 로슬링(Hans Rosling)팩트풀니스, 요한 노르베리(Johan Norberg)진보같은 책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틈틈이 권유했다. 대부분 떨떠름해 했고, 일부는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모든 것이 다 잘 될 테니 근심을 거두라고 태연히 말할 수 있는가? 코로나19? 기후 재앙은? 사회적 양극화는?”

 

핑커를 따르면, 진보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모든 것이 술술 다 잘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건 진보가 아니다. 기적이다. 진보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했을 때 정당하게 누리는 결과다. 진보를 인정한다고 해서 오늘날 빈민, 장애인, 여성, 난민 등의 소수자들이 감내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인류를 옥죄는 당면한 위협을 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테니 근심 따위는 거두라는 의미는 더욱더 아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어설프게나마 진보했음을 확인한다면, 진보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한 층 더 영리하게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참조 링크)

 

 

 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핑커의 책들, 『지금 다시 계몽』,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빈 서판』, 『단어와 규칙』. 2021년 겨울에도 몇 권의 책이 더 출간될 예정이다. 사진 ⓒ ㈜사이언스북스.

 

사족으로, 필자가 이 책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곳을 적어 둔다. 핑커는 인간은 한편으로는 비합리적이고 오류와 도그마에 잘 빠지지만,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게끔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534~537) 세계는 사람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에 기대 살아가는 종에게는 분명히 현실에 대해 정확한 추론을 하게 하는 능력이 진화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자연 선택이 외부 세계를 잘못 인식하게 만드는 심리 기제를 내치고 외부 세계를 바르게 인식하게 만드는 심리 기제를 굳이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자연 선택은 어떤 심리 기제든지 간에 먼 과거의 환경에서 조상들의 번식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심리 기제를 무심히 선택할 뿐이다. 직장의 동료 여성이 예의상 지어 준 미소가 자신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성적 신호라고 착각해서 혼자 김칫국을 들이켜는 남성들처럼,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게 만드는 심리 기제라도 어쨌든 과거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면 자연 선택으로부터 합격 도장을 받는다.

 

 


전중환

경희 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서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최재천 교수 연구실에서 한국산 침개미의 사회 구조 연구로 행동 생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데이비드 버스 교수의 지도로 진화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족들 간 협동과 갈등, 먼 친족에 대한 이타적 행동, 근친상간이나 문란한 성관계에 대한 혐오 감정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화 여자 대학교 통섭원의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경희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화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인간 본성을 강의하고 있다. 진화한 마음, 본성이 답이다, 오래된 연장통을 저술하고 욕망의 진화, 적응과 자연선택을 번역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지금 다시 계몽』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본성이 답이다』

 

『오래된 연장통』

 

『욕망의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