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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 과학자의 '복잡한' 삶 풀어내기: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김범준 교수 해설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복잡계 과학자의 '복잡한' 삶 풀어내기: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김범준 교수 해설

Editor! 2023. 11. 29. 16:20

 

 

20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조르조 파리시의 첫 번째 한국어판 교양 과학서,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저술이 올바르고 친숙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김범준 성균관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감수와 해설을 맡았습니다. 통계 물리학으로 한국 사회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연구와 글로 유명한 탁월한 과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김범준 교수의 직필로 노벨상 수상자의 업적을 직접 들을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한 개인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지만, 여럿이 모이면 전체는 수학적 확실성이 된다.”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소설에서 셜록 홈즈가 한 이야기다. 예측 불가능한 개체의 거동에서 전체가 보여 주는 거시적인 패턴으로 관심을 옮기면 과학적 이해가 가능한 현상들이 있다. 단순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구성 요소가 여럿 모인 전체가 다채로운 질서를 보여 주는 예가 많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에서 파리시가 자세히 소개한 새 떼의 군무, 통계 물리학의 상전이, 그리고 스핀 유리가 바로 그렇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 ㈜사이언스북스.

 

3D 영상으로 새 떼의 군무 속 질서를 찾다

 

1찌르레기의 비행에는 로마에서 진행한 찌르레기 떼의 행동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파리시가 참여한 연구진은 여러 카메라로 촬영한 고해상도의 찌르레기 떼 사진에서 한 마리 한 마리의 3차원 위치 변화를 정량적으로 파악해 찌르레기 개체가 따르는 행동 규칙을 알아낼 수 있었다. 통계 물리학 분야에서 새 떼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이론 모형으로는 헝가리 과학자 타마스 비섹(Tamás Vicsek)의 모형[각주:1]이 널리 이용되어 왔다. 비섹 모형에서는 새가 다음 순간에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를 결정할 때 자신으로부터 주어진 거리 안에 있는 다른 새들이 날아가는 평균 방향을 따른다고 가정한다. 파리시 연구진은 실제의 새 떼를 구성하는 새 한 마리는 주변 새들 사이의 절대적인 거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거리에 의존해 다음의 비행 방향을 조정한다는 것을 밝혔다. 10미터든 30미터든, 주변 새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자신과 이웃한 새들의 운동을 살펴 다음 행동을 정한다는 관찰이다. 기존 모형이 과학자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단순한 규칙을 이용했다면, 파리시 연구진이 밝힌 규칙은 실제로 새가 따르는 규칙이다. 최근 급격히 발전한 영상과 데이터 처리 기술과 통계 물리학의 개념과 사고의 틀이 함께 결합한 멋진 연구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 ㈜사이언스북스.

 

규모가 바뀌어도 관찰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3상전이, 혹은 집단 현상에서 저자가 자세히 설명한 이징 모형[각주:2]은 통계 물리학에서 상전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는 표준 모형이다. 구글 학술 검색(scholar.google.com)에서 잠깐 검색해 보니 “Ising model”이 제목과 초록에 포함되어 있는 논문이 한 해에 1만 편을 훌쩍 넘게 여전히 출판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애용되고 있는 모형이다. 표준적인 이징 모형은 위와 아래 딱 두 방향만을 가리킬 수 있는 스핀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상황을 다룬다. 통계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낮은 온도에서 물리계는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바닥 상태에 있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높은 온도에서는 엔트로피가 최대인 무질서한 상태에 있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결국 이징 모형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는 모든 스핀이 둘 중 한 방향으로 정렬하고 있는 정돈된 상태, 아주 높은 온도에서는 스핀들이 뒤죽박죽 둘 중 한 방향을 마구잡이로 가리키는 무질서한 상태에 있게 된다.

3장에 등장한 리오 카다노프(Leo Kadanoff)는 몇 스핀을 모아서 한 스핀으로 표현하는 덩이 스핀(block spin)의 방법을 제안했다. ‘해설 그림 1’의 왼쪽, 9개의 스핀 중 6개는 검은색(아래 방향 스핀)이고 3개는 흰색(위 방향 스핀)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해설 그림 1: 리오 카다노프가 제안한 덩이 스핀 재규격화 과정. 다수결에 따라 스핀 9개를 덩이 스핀 1개로 변환한다.

 

이처럼 검은색이 흰색보다 많을 경우, 다수결에 따라 카다노프의 덩이 스핀은 해설 그림 1’의 오른쪽처럼 검은색으로 표시된다. 9개를 모아서 덩이 스핀 1개로 대체하는 과정을 모든 스핀에 적용한 것이 바로 책 3그림 5’에서 왼쪽 스핀 배열을 오른쪽 스핀 배열로 바꾼 과정이다. 카다노프의 덩이 스핀 변환을 이징 모형에 적용해 보면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된다.

아주 낮은 온도에서는 모든 스핀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므로 덩이 스핀 변환을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설 그림 2’에는 여러 온도에서 2차원 이징 모형의 스핀 배열이 담겨 있다. 그림이 각각 2개씩 들어 있는데, 오른쪽 그림은 왼쪽 그림의 좌상단 구석을 확대한 그림이다. (확대한 부분을 (c)에 사각형으로 표시했다.)

 

해설 그림 2: 2차원 이징 모형의 스핀 배열. 아주 낮은 온도((a)), 아주 높은 온도((b)), 상전이 온도((c)), 상전이 온도보다 낮은 온도((d))에서 왼쪽 배열 그림의 일부를 확대해 오른쪽 그림을 그렸다. (a), (b), (c)는 일부를 확대해도 전체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지만, (d)는 왼쪽과 오른쪽이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온도가 0일 때((a))와 무한대일 때((b)), 그리고 임계 온도((c))에서 시스템은 재규격화 군 변환에 대해 불변이다.

 

덩이 스핀 변환 같은 재규격화 군 변환은 우리가 물리계를 관찰하는 스케일을 변환하는 것에 해당해서, 만약 재규격화 군 변환을 해도 전체가 변화가 없다면 해설 그림 2’에서 짝을 이룬 두 그림의 모습이 거의 같은 모습일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온도가 아주 낮을 때((a)), 아주 높을 때((b))에 해당하는 그림을 보면 확대 전후의 모습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규격화 군 변환에 대해 물리계가 불변인 온도가 더 있다. 바로 상전이가 일어나고 있는 임계 온도다. ‘해설 그림 2’(c)를 보면, 왼쪽 그림의 좌상단 구석을 확대해 그린 오른쪽 그림이 왼쪽 그림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전이가 일어나고 있을 때도 물리계는 재규격화 군 변환에 대해 불변이라는 이야기다. 쉽게 이야기하면, 상전이가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커다란 전체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일부분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3장에서 중요하게 소개된 척도 불변(scale invariance)이 상전이가 일어나는 임계점에서 관찰된다는 이야기다. 재규격화 군 변환을 수식으로 적용해서 변환의 부동점(fixed point)을 찾고 이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해석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규격화 군 변환은 통계 물리학 분야의 이론 연구에 널리 이용된다.

 

 

‘꼼수’로 밝혀낸 스핀 유리의 물리적 의미

파리시가 노벨상을 받을 때 중요하게 언급된 것이 바로 스핀 유리 모형에서의 훌륭한 업적이다. 4장 「스핀 유리, 무질서의 도입」에서 저자는 나눌 수 없는 물체를 상자 안에  $\frac{1}{2},\frac{1}{4}$의 식으로 나눠 담는 이야기에 비유해 복제 기법의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사실 복제 기법의 ‘기법’은 영어로는 ‘trick’이어서 난 우리말 속어인 꼼수가 떠오른다. 직접 계산할 수 없는 문제에 멋진 꼼수를 부려서 성공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복제 기법인 셈이다. 복제 기법이 근거한 아이디어를 수식으로 적으면  $\textrm{ln}Z=\displaystyle\lim_{n\to 0}\frac{Z^{n}-1}{n}$이다.[각주:3] 구해야 하는 것은 좌변의 $\textrm{ln}Z$인데 직접 구하기 어려우니 자연수 $n$에 대해서 일단  $Z^{n}$ 을 구한다. 그러고는 멋진 꼼수가 등장한다. $n$ 은 ‘하나’나 ‘둘’ 같이 셀 수 있는 자연수인데 마치 실수처럼 가정해서 $n$을 0으로 보내는 극한을 이용한다는 꼼수다. 저자가 책에서 나눌 수 없는 물체를   $\frac{1}{2},\frac{1}{4}$ ...로 점점 줄여 가는 과정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왜 이 꼼수를 복제 기법이라고 부르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자연수 $n$ 에 대해서 $Z^{n}$ 을 생각하는 것이 똑같은 여러 물리 시스템을 복제해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Z^{n}=Z_{1}Z_{2}Z_{3}...Z_{n}$로 생각하면 $Z_{\alpha}$ 는 $\alpha$번째의 복제본에 해당한다. 파리시는 스핀 유리의 상전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복제 기법을 이용했고, 멋지게 성공해 결국 노벨상을 받았다. 

 

 

복잡계만큼이나 다채롭고 흥미로운

파리시의 노벨상 스토리

 

책에 담겨 있는 내용 중 통계 물리학에 관련된 부분을 독자들에게 좀 더 소개하고자 해설을 적었다. 책에는 저자가 노벨상 수상자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도 재미있게 담겨 있다. 특히 책의 후반에서 저자가 피력하는 과학의 의미는 바로 지금 이곳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2006년의 조르조 파리시. (Lorenza Parisi/CC BY-SA 4.0)


 

김범준

성균관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서울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초전도 배열에 대한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려서 작은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과학의 세계를 동경했다. 결국 물리학자가 되어 교육과 연구를 즐기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구성 요소로 이뤄진 복잡계의 거시적인 특성을 주로 연구한다. 특히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과학의 시선으로 이해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다. 합리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 더불어 사는 미래를 가져오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ESC)’3기 대표와 한국 물리학회 대중화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세상 물정의 물리학, 관계의 과학,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등을 저술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클래식 파인만』

 

『최종 이론의 꿈』

 

『우주 양자 마음』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1. 독일 훔볼트 대학교 생물학 연구소의 교수 디르크 브로크만(Dirk Brockmann)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이 모형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새 떼의 행동을 살펴볼 수 있다.https://www.complexity-explorables.org/slides/horde-of-the-flies0 [본문으로]
  2. https://www.complexity-explorables.org/explorables/i-sing-well-tempered/ [본문으로]
  3. 이 식에서 $Z$는 통계 물리학의 분배 함수(partition function)에 해당하며, 모든 가능한 상태에 대해서 $e^{-E_{i}/k_{B}T}$를 더해서 얻어진다. (즉 $Z=\sum_{i}^{}e^{-E_{i}/k_{B}T}$. $E_{i}$는 계가 상태 $i$에 있을 때의 에너지이며, $ k_{B} $는 볼츠만 상수, 그리고 $T$ 는 절대 온도다.) 스핀 유리의 이론 계산에서는 먼저 $\textrm{ln}Z$ 를 구해서 이를 스핀 사이의 마구잡이 상호 작용의 여러 다양한 구현에 대해서 평균을 구해야 한다. 이 대신 $Z^{n}$ 에 대해서 평균을 구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훨씬 더 용이하게 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