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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취와 가난은 정말 ‘내 탓’일까?│ 자유 의지와 능력주의 ① 본문
「강양구의 과학의 민낯」, 이번 달에는 자유 의지와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룹니다. 철학적이기도, 정치적이기도 한 문제로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 정치가, 사회 개혁가 들의 논쟁 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과학적인 주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침팬지부터 인간까지 영장류를 연구한 한 괴짜 과학자의 신선한 문제 제기를 과학 큐레이터 강양구와 함께 풀어 보시죠.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때 역사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내 청소년기에 아주 큰 영향을 줬다. 1990년대 초반에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 한길사 같은 한국 사회 ‘지성의 보고’라고 할 만한 출판사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줬고,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세계의문학》 같은 잡지를 읽기를 권했다.
그 선생님께서 하루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내용은 이렇다. 어린 시절 선생님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당연히 성장기에 가족의 따뜻한 돌봄이나 부모의 지원 같은 일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그런 당신의 처지가 싫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환경에 굴복하기 싫었단다. 내 인생은 나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기 위한 여정이었어. 그래서 나는 지금도 구조나 환경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내가 평생 그런 주장을 부정하고자 살아왔으니까. 기억하렴. 구조나 환경 같은 조건에 굴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 도시의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선생님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당시 그런 얘기를 해 줬던 선생님보다 더 나이를 먹은 지금도 가끔 이 선생님의 얘기가 떠오른다. 우리는 과연 구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일까? 안타깝게도, 20세기 철학과 21세기 과학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인간이라는 환상이 지워지기까지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년)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철학자가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이 사회적 힘이나 경제적 힘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는 일을 환상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정신이나 의식은 그것이 놓여 있는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에 구속된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꿰뚫는 이 문장은 20세기 철학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언급한 선생님께서 “구조나 환경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주장”을 언급할 때도 머릿속에서 염두에 두고 겨냥했던 사상은 바로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이런 사고 방식이었다.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철학계는 또 한 차례 지각 변동을 겪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그리고 이 시기만큼은 구조주의자로 알려졌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사회·담론이라는 수면 아래의 구조(Structure)가 주체를 구성한다’라며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푸코 자신은 구조주의자냐 아니냐 하는 분류법에 큰 관심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구조주의 진영으로 자주 묶였고 초기엔 이를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구조주의자들과의 방법론적 차이를 강조하며 거리를 두었고, 훗날 붙은 ‘후기 구조주의자’라는 딱지 역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특정 진영으로 묶이기보다 ‘근대성이 어떻게 정의되는가?’라는 질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올해(2026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미셸 푸코가 1966년에 펴낸 『말과 사물』이 대표적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이라는 형상은 “바다 근처 모래사장 위의 얼굴처럼” 지워질 운명이라고 선언하면서, 특히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같은 앞 세대 실존주의 철학자가 강조했던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세계를 만드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주체를 부정했다.
이렇게 19세기 마르크스에서 20세기 중반의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 특히 개인(주체)의 입지는 계속해서 좁아졌다. 『말과 사물』이 나온 1966년에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고릴라를 포함한 영장류를 좋아하는 아홉 살 소년이 있었다.

새우깡을 집어 든 건 ‘나’의 의지가 아니다
이 소년은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결국 그의 어린 시절 소원대로 영장류(개코원숭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된다. 바로 스트레스 연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성을 얻은 로버트 모리스 새폴스키(Robert Morris Sapolsky)다. 그가 평생에 걸친 스트레스 연구를 집대성한 『스트레스(Why Zebras Don't Get Ulcers)』(1994년)(링크)는 현대의 중요한 과학 고전이다.
이제 만 69세의 원로 과학자가 된 새폴스키가 2023년에 펴낸 논쟁적인 책이 바로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Determined: A Science of Life without Free Will)』(링크)이다. 새폴스키는 이 책에서 2020년 정도까지 축적된 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가 구조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래서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환상을 박살 낸다.
당혹스러운 새폴스키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렇다. ‘당신이 어떤 의도(Intention)를 가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 의도는 대체 어디서 왔는가?’ 의도가 형성되는 그 직전의 1초, 1분, 하루, 몇 주일, 몇 년 전, 청소년기, 유아기, 태아, 부모의 유전, 조상의 문화권 등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면 결국 자유 의지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 작용이 빚어낸 원인이 지금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의 출력으로 나온다는 아주 강력한 결정론이다. 새폴스키의 주장대로라면 그 인과 관계의 고리 속에서 자유 의지가 들어갈 틈새 따위는 없다. 그가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같은 철학자가 자유 의지를 구해 보려고 하는 시도를 비웃는 이유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과격한지 예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을 때 무심코 ‘새우깡’을 손에 들었다. (실제로는 ‘새우깡’보다 ‘짱구’를 좋아한다.) 내가 새우깡을 손에 집어 든 것은 나의 의도가 제 역할을 한 자유 의지의 발현일까? 새폴스키의 답은 ‘아니다.’
편의점에서 새우깡을 사는 행위는 알코올을 적당히 섭취한 결과로 통제력이 약해진 전전두엽피질(PFC), 당을 갈구하게 만드는 낮은 혈당 수치, 어릴 적 각인된 시엠송의 기억, 전날 보았던 미디어 노출, 도파민 수용체의 유전적 특성 등이 결합한 결과일 뿐이다. 새우깡을 사는 행위조차도 촘촘한 인과 관계를 벗어날 자유 의지의 틈새는 없다.
그렇다면 관습적인 선택을 넘어, 숭고한 도덕적 결단은 어떨까? 2001년 1월 26일 도쿄의 지하철역 선로에 뛰어든 의인 고(故) 이수현 씨의 비장한 용기조차 새폴스키의 차가운 렌즈를 피하지 못한다. 새폴스키의 시선에서 보면, 그 찰나의 선한 의도마저 청소년기에 형성된 전전두엽피질(PFC)의 특성, 테스토스테론과 세로토닌의 분비 비율, 전날의 수면 상태, 그리고 일본이라는 대상에 갖추어진 개인적 친밀감 등이 그 순간 기어이 맞물려 튀어나온 반응일 뿐이다.
놀랍게도 새폴스키는 마르크스와 푸코를 무심히 딱 한 번씩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나 푸코의 ‘구조’ 자리에 경제적 조건이나 담론 대신 유전자, 호르몬, 전전두엽과 청소년 환경, 유년기 환경 등을 가져다 놓으면, 새폴스키의 도미노 같은 인과 관계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아이디어는 구조주의와 완벽히 판박이다.

“가난해서 죽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새폴스키가 태어나고 나서 딱 1년 후인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될 중요한 저서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를 펴냈다. 디스토피아 SF 형식을 빌린 이 책은 2034년의 시점에 저자와 이름이 같은 가상의 사회학자가 1870년 이후 능력주의가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회고한다.
능력주의가 자리를 잡기 전만 하더라도 미천한 태생의 하층 계급은 탁월한 업적을 쌓아도 제대로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으로 부모 잘 만나서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나 부자였던 이들은 끊임없이 조롱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상층 계급의 “멍청한(stupid)” 사람은 그만한 행운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다고 비판을 받았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하면서 “똑똑한(clever)” 하층 계급 출신이 상층 계급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지배하면서 이런 구도가 바뀌었다. 상층 계급은 자신이 가진 역량과 자기가 기울인 노력, 또 그 결과 쌓은 업적 덕분에 당연한 보상을 얻은 것일 뿐이다. 그들은 상층 계급에 속할 자격이 충분하다.
반면, 하층 계급은 애초 역량이 달리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업적을 쌓지 못했다. 즉 하층 계급이 계층 사다리의 아래에 매달려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탓이다. 영은 능력주의가 부상할수록 상층과 하층 사이의 계급 사이의 간극은 더욱더 커지고, 그것이 역전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고 보았다. 놀랄 만한 혜안이다.
새폴스키는 바로 이 능력주의 신화를 마르크스나 ‘아비튀스(habitus)’ 개념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같은 사회학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과학의 힘으로 깨부순다. 그가 목소리 높이듯이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그의 가난에 그의 책임은 ‘0.0001퍼센트’도 없다.
새폴스키가 열거하는 한 남자의 가난을 낳은 인과 관계를 하나씩 따져보자. 하필이면, 그의 조상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태어났다. 성폭행으로 그를 임신한 10대 어머니는 임신 직전부터 기아, 학대에 노출되어 있어서 건강한 아이를 몸속에 9개월간 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영양 결핍과 코르티솔 같은 어머니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고스란히 태아인 남자의 후성 유전학적 발달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기적적으로 태어나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영양, 수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수인성 질병으로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남자는 작은 체구뿐만 아니라 만성 질환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몸속 높은 스트레스 호르몬은 공격성을 증가시키는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농도를 높였다. 공포와 불안에 반응하는 뇌의 편도체도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10대 초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전전두엽피질(PFC)은 선진국의 또래와 비교할 때 눈에 띄게 작았고, 그 결과 이 남자는 미래를 전망하고, 계획을 세우고, 의사 결정하고, 자제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한 상속 자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적적으로 20대에 튀르키예를 거쳐서 영국으로 이주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의 반이민 정서가 확산하면서 앞 세대 아프리카계 이주민의 행운도 누릴 수가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마약 배달을 하다가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전과자가 되니 취업도 하기가 어려웠다.
자, 새폴스키는 이런 안타까운 인과 관계의 고리 속에서 그 남자의 고유한 역량이나 노력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그의 삶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유전과 환경, 즉 ‘구조’의 저주일 뿐이다. 우리는 이걸 일상 언어로 ‘지독히 운이 없는 자(者)’라고 표현한다.

구조의 그늘에서 인간의 책임은?
이쯤 되면 새폴스키가 왜 칠순을 앞둔 시점에 ‘자유 의지가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써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과거의 민주노동당 지지자 정도의 정치 지향을 가진, 68 세대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던 시점(1967~1977년)에 10대를 보내면서 늦게 신좌파의 세례를 받은 과학자로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새폴스키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글머리 역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푸코가, 그리고 영과 부르디외와 새폴스키가 목소리 높였듯이 능력주의는 환상이다. 지금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에는 유전과 환경이 촘촘히 쌓아 놓은 구조의 영향이 분명히 크다.
그런데 정작 새폴스키 자신도 이 결론 앞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가 ‘자유 의지는 없다.’라고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그러니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자.’라고 촉구하는 순간, 그 촉구는 대체 누구를 향한 것일까? 의지 없는 존재에게 무언가를 권할 수 있을까? 이 모순이야말로 다음 글에서 풀어야 할 질문이다.
강양구
서울시 미디어 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참여연대 과학 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 과학 센터) 결성에 참여했다. 《프레시안》에서 과학 환경 담당 기자로 일했고,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메르스 사태, 코로나19 팬데믹 등에 대한 기사를 썼다.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 언론상, 녹색 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과학의 품격』, 『강양구의 강한 과학』,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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