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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심리 극장 (8관) 열 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 본문

완결된 연재/(휴재) 한밤의 심리 극장

한밤의 심리 극장 (8관) 열 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

Editor! 2014. 1. 6. 16:37

진화심리학으로 드라마와 영화, 소설, 그림 등을 들여다봄으로써 인간 본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서려는 시도를 담은 <한밤의 심리 극장>,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한밤의 심리극장

by 홍승효


한밤의 심리 극장 (0관) / 

한밤의 심리 극장 소년 (1관) 질투는 나이 들지 않는다 

한밤의 심리 극장 (2관) 구애의 정석 : 썸남, 썸녀를 만나다 

한밤의 심리 극장 (3관) 거울이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 

한밤의 심리 극장 (4관) 선하지만 '공감제로'인 그와 공존하는 법 

한밤의 심리 극장 (5관) 친절한(?) 악마, 사이코패스의 두얼굴 

한밤의 심리 극장 (6관)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은?

한밤의 심리 극장 (7관)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입맛 에 이어




제8관 열 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

        -- 사랑받지 못한 소년의 자전적 성장 소설「홍당무」



“네 몫은 없다. 너는 날 닮아서 멜론을 좋아하지 않잖니.” 르픽 부인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홍당무가 속으로 대답했다. …… “이 멜론 조각을 토끼에게 갖다 줘라.” …… 홍당무는 토끼들에게 멜론 씨를 발라주고 자기는 멜론 즙을 빨아 먹었다. 달콤한 포도주처럼 맛있었다. 그러고 나서 홍당무는 식구들이 먹다 남긴 노랗고 달콤한 부분을 이빨로 갉아먹었다. 멜론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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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르픽씨 가족의 앨범을 뒤적이다 보면 꼭 한 번씩 놀란다. 앨범에는 에르네스틴 누나와 펠릭스 형의 사진이 수없이 많다. …… “홍당무는 요?” …… 사실 홍당무는 한 번도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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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는 상처를 입고도 아직 살아있는 사냥물의 숨을 완전히 끊어놓는 일을 도맡아했다. …… “빨리 죽이지 않고 무얼하니?” 르픽 부인이 잔소리를 했다. “어머니, 저도 흑판에 숫자 쓰는 일을 하면 안 될까요? " …… 홍당무는 할 수 없이 …… 양 무릎 사이에 자고새 두 마리를 꼭 끼워 넣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윽! 잔인한 녀석” 펠릭스와 에르네스틴이 동시에 외쳤다. 


- <쥘 르나르 저, 「홍당무」 중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위아래로 치여 부모의 알뜰한 사랑과 관심을 애저녁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가 많은 집이면 어디나 그렇듯이 정확히 임자를 정해주지 않은 문구류나 간식을 나누는 일에서 TV 채널권을 둘러싼 암투까지 남매간의 싸움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는데 나는 여기서도 일찌감치 발을 빼버렸다.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서 라기 보다는 이길 자신이 별로 없어서였다. 나는 발 빠른 새가 되어 먹이를 쟁취하는 쪽보다 게으른 나무늘보가 되어 에너지를 아끼는 쪽을 선택했다. 다행히도 형제들이 아주 무정하지는 않아서 굿판이 끝날 때쯤엔 내게도 떡이 돌아왔다. 내게 주어진 몫이 내가 원했던 것과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형제 사이의 직접적인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점점 의도와는 상관없이 형과 아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피곤한 일이었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마저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제들과 경쟁했던 대상이 학용품과 같은 물질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핵심에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존재했다. 자식들에게 부모가 보여주는 사랑의 정도는 의연하려 해도 의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어린 나는 부모의 눈을 통해 내 가치를 보았고 가질 수 있는 것을 배우고 나아갈 길을 정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형태로 원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나는 형보다는 뒤처지고 동생보다는 조숙해야하는 둘째로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잡아갔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바라던 몫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집 밖에서 얻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지. 형제간의 부대낌이 낯선 이와의 경쟁보다 반드시 더 쉬우란 법은 없다. 게다가 나는 둘째였다. 둘째에게는 맏아이라는 프리미엄도 막내라는 면죄부도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게으른 몽상가나 회피적인 평화주의자의 탈을 쓰고 형제간의 갈등을 피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런 내게 프랭크 설로웨이‘타고난 반항아’는 상당히 솔깃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설로웨이는 출생순서에 따라 형제들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그 밑바탕에는 가족 내 자원, 그 중에서도 특히 부모의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관계가 놓여있다고 얘기한다.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게 어버이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부모가 한 번에 줄 수 있는 관심과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생존과 번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귀한 자원이기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의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 형제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과 힘, 그에 대한 부모의 반응을 민감하게 따져가며 부모의 자원을 확보하는데 알맞은 전략을 선택한다. 이때 가족 구성원으로 가장 먼저 편입된 첫째는 대개 우세한 체격과 힘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방어하는 입장이 된다. 출발선부터 불리한 입장에 놓인 후순위 출생자는 형과는 다른 개성을 드러내며 자연스레 보다 혁명적인 성격을 발달시키게 된다. 혹은 나처럼 경쟁을 포기하고 게으름뱅이가 되거나.

   부모 입장에서도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자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으로 자녀의 번식 가능성을 판단하려고 한다. 편애는 그 과정에서 세심하게 조율된 부모의 심리를 대변한다. 대개 큰 아이일수록 번식 연령대까지 살아남아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크기에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장자는 후순위 아이들보다 더 좋은 투자 대상이 된다. 여러 문화권에서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장자 상속제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편 부모의 투자는 자녀의 성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동성 간 번식 성공도의 편차는 여성들에서보다 남성들에서 더 크다. 즉, 이성에게 매력적인 남성은 이론적으로는 일생 수백 명의 자녀도 낳을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남성은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성은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평생 얻을 수 있는 자녀의 수가 제한돼 있지만 대신 자식을 얻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남성들보다 낮다. 따라서 부모가 부유할수록 딸 보다 아들들에게 자원을 더 많이 투자하리라 여겨지며 가난할수록 아들보다 딸에게 투자할 가능성이 더 크리라고 예측된다. 전자는 대박을 노리며 모험을 할 만한 여유가 있으며, 후자는 원금이 보장되는 안전한 투자 쪽을 더 선호하리라는 판단에서다.

 

  어쨌든 부모의 편애와 형제간의 성격 차이는 제한된 자원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부모와 자식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진화한 심리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홍당무에는 이러한 부모의 편애와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녀의 태도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못생긴 얼굴. 우둔한 머리. 잘난 가족들과 다른 탓에 형제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엄마에게 온갖 구박을 당하는 소년. 르픽 부인은 계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홍당무를 구박하고 다른 형제들은 이 모습을 재밌는 듯 방관한다. 홍당무는 르픽 부인의 반응을 자세히 살피며 엄마의 기대대로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아직도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눌 정도로 어리고 약하지만 응석받이인 손위 형제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짐짓 씩씩한 척 남자다운 행동을 자처한다. 사실은 창밖으로 세차게 바람이 부는 소리, 개짓는 소리에도 놀라는 섬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엄마의 온갖 심부름과 집안의 궂은 일들을 도맡아하면서도 홍당무는 전혀 사랑받지 못한다. 르픽 부인의 행동에는 악의마저 엿보이며 형제들은 막내인 홍당무가 자기들 대신 귀찮은 일들을 해결해주는 걸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홍당무의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계속 홍당무라고만 부르다보니 그만 모두들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나 보다. 처음에는 속임수를 써가며 강한 척 했던 홍당무는 점점 정말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는 아이로 변해가고 가출을 꾀하거나 자살을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엄마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소설 밖에서 그 소년(쥘 르나르)은 친근하면서도 독특하다는 평을 듣는 소설가로 성장한다. 그는 세부묘사에 치중하던 당시 문단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절제된 문장을 정확히 구사하며 주목받는 소설가가 되었다.



야고보 로부스티 틴토레토, 아벨의 살해 (The Murder of Abel), 1551-1552, 캔버스에 유채,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니스

여호와는 동생인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여호와가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을 편애로 의심한 카인은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살해한다.


   홍당무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설로웨이가 말하는 부모의 편애와 형제간의 갈등, 후순위 출생자로서 취하는 전략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사실 부모가 자식을 편애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인(仁)을 가르친 공자도 여러 제자 중 특히 안회를 편애했다고 하고 성서를 보면 최초의 살인이 신의 편애를 의심한 형제간에 벌어졌다고 적혀있다. 신도 성인도 편애를 할진데 보통의 부모야 오죽하랴. 어찌보면 편애란 진화를 이끄는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편애와 편오가 존재하지 않았어도, 선호와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어도 진화는 일어났겠지만 지구상의 생물들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다.

   “참고 견뎌라, 철갑을 두르듯 네 마음을 단단히 무장해라, 어른이 되어 네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그때가 되면, 네 성격이나 기질은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서 해방되어 우리를 부인하고 가족을 바꿀 수 있을테니까. 그때까지는 참고 이겨내려고 노력해. …… ” 엄마의 편애로 괴로워하는 홍당무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확실히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홍당무는 어릴 때 읽던 홍당무와 다르게 다가온다.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얻었고, 가족에게서 해방되지는 못했더라도 가족이 주는 무게를 견뎌낼 힘을 갖게 되었으니까.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마다 다르게 기억하듯이 가족들 사이의 기억도 구부러진 렌즈로 들여다보듯 많은 부분이 사실과는 달리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성장한 것 같다.

   나는 설로웨이가 말한 혁신적인 반항아는 아니었다. 그저 게으른 반항아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는 크게 공감한다. 부유한 집안일수록 아들에게 더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에는 심정적으로 딴지를 걸고 싶지만 말이다. 얼마 전 문화 체육 관광부가 발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은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각주:1] 또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0명 중 4명을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지만 어쨌든 이 조사 결과는 어려울수록 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면이 많은 것 같다. 딸을 선호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 반가운 한편, 그만큼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진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요즘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1. '2013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결과 (2013.12.18) http://www.mcst.go.kr/web/s_notice/press/pressView.jsp?pSeq=1324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