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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피부는 죄가 없다! 본문

완결된 연재/(完) 강양구의 과학 블랙박스

까만 피부는 죄가 없다!

Editor! 2019. 2. 20. 10:31

전 세계의 인류가 가지각색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피부색은 위도에 따른 자외선 양에 따라 진화해 왔다고 하는데요. 피부색이 진화의 결과였다면, 피부색으로 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까요? 6만 년 전부터 피부색이 진화해 온 이야기, 그리고 17세기 인종이 ‘발명’된 역사까지 강양구의 과학 블랙박스에서 만나 보세요!




강양구의 과학 블랙박스 

까만 피부는 죄가 없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아름다운 소설에서 이 문장만 따로 기억나는 이유는 바로 “소녀의 흰 얼굴”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피부가 까맸던 나는 늘 소설이든 드라마든 ‘도시’ 아이는 하얗고, ‘시골’ 아이는 까맣게 묘사되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 정도 서울 친척 집에서 머물고 나서는 더 싫어졌다.


여름이라서 더 까매진 나를 보고서 서울 사람마다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기 때문이다. “아, 시골에서 놀러왔나 보네. 얼굴 까맣게 탄 것 좀 봐.” (지방이지만) 어엿한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던 나로서는 ‘시골에서 왔다.’는 언급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까만 피부 탓 같았다. 이렇게 까만 피부는 콤플렉스가 되었다.


철이 들어 서울로 대학을 와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에 이주 노동자 연대 활동에 나섰다. 도서관 앞에서 이주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호소하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서명을 받는 등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이주 노동자가 직접 도서관 앞에서 서명을 받고 있다.”라고.



피부색, 햇빛과 진화의 앙상블

피부색의 과학에 따르면, 이런 어두운 피부색 콤플렉스는 터무니없다. 전 세계의 다양한 피부색은 햇빛과 진화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먼저 『Skin 스킨: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진선미 옮김, 양문, 2012년)의 저자 니나 자블론스키(Nina Jablonski) 등 과학자의 연구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피부색 진화의 비밀부터 살펴보자.


알다시피, 햇빛 속에는 피부 세포를 공격하는 자외선이 들어 있다. 처음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에게 햇빛 자외선은 치명적이었다. 털이 적어지면서 노출된 피부가 자외선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자외선은 피부 세포의 DNA를 공격해 피부암을 유발하는 등 심각한 해를 줄 수 있다.


다행히 피부 안에는 천연의 자외선 차단제 ‘멜라닌’ 색소가 있다. 피부에 멜라닌 색소가 많을수록 자외선은 효과적으로 차단된다. 더불어 흑갈색의 멜라닌 색소가 많을수록 피부는 검게 된다. 햇빛과 진화가 상호 작용하면서 검은색 피부의 인류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만약 인류가 계속해서 햇볕 따가운 적도 근처에서 살았다면 지금도 대다수의 피부색이 어두웠을 것이다.


인종별 심장을 찍은 사진 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의 사진으로 만든 베네통의 1996년 광고. 올리에로 토스카니의 홈페이지에서.


약 6만 년 전부터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는 겪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었다. 우선 적도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햇빛의 양이 적어졌다. 인류의 이동기와 빙하기가 겹치면서 햇빛이 구름에 가리는 날도 많았다. 햇빛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 문제가 된 것이다.


또 햇빛 자외선이 문제였다. 자외선은 몸에 좋은 점도 있다. 파장 길이가 중간 정도인 자외선(UVB)은 피부 세포에서 비타민 D의 합성을 자극한다. 비타민 D는 몸속에서 칼슘을 흡수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타민 D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뼈가 약해지고(골다공증) 심하면 뼈가 굽는 현상(구루병)이 나타날 수 있다.


자외선의 양이 적은 지역으로 이주한 인류의 조상에게 검은 피부는 득보다 실이 컸다. 검은 피부의 멜라닌 색소가 자외선을 차단하면서 비타민 D의 합성이 더욱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한 인류의 조상은 오랫동안 비타민 D가 풍부한 생선 같은 먹을거리를 섭취하면서 햇빛 결핍을 견뎠다. (지금도 극지방 원주민은 생선으로 비타민 D를 섭취한다.)


세월이 쌓이면서 햇빛과 진화의 또 다른 상호 작용으로 멜라닌 색소가 피부에서 적어진, 즉 탈색된 흰 피부의 인류가 등장했다. 이렇게 흰색 피부를 가진 이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보다 위도가 높고 추운 지역에서 비타민 D 합성에 유리하다. 이렇게 흰색 피부는 생존을 위한 적응의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이렇게 흰색 피부를 가진 인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도 뜻밖이다. 2015년 과학자들이 유럽에 살던 고대인 83명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약 8500년 전에야 피부색을 탈색하는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1만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도 흑인이 대다수였다.


창백한 피부색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이 유럽 대부분에 거주한 시간은 수천 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남유럽만 가도 창백한 피부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니나 자블론스키에 따르면, 피부의 반사율로 측정한 피부색과 자외선 양의 지리적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자외선 양이 많은 적도 인근 주민은 피부가 짙고, 자외선 양이 적은 고위도 지역일수록 피부가 옅다.


하나 더 있다.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피부색이 옅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출산’ 때문이다. 임신을 한 여성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기의 뼈를 형성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비타민 D가 필요하다. 더구나 비타민 D가 칼슘 흡수를 방해하면 골반 뼈가 부스러져 아기를 출산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성으로서는 자외선을 좀 더 받는 게 진화론적으로 나았던 것이다.



예수와 포카혼타스는 왜?


17세기에 그려진 포카혼타스. (왼쪽) 19세기에 그려진 포카혼타스. (오른쪽)


햇빛과 진화의 합주로 여러 빛깔의 피부색이 빚어진 과정을 염두에 두면, 피부색에 따라서 인종을 나누고 심지어 차별하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백인의 역사(The History of White People)』를 쓴 넬 어빈 페인터(Nell Irvin Painter) 등에 따르면, 특정한 피부색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는 ‘백인(white people)’ 같은 개념 역시 만들어졌다.


17세기 초까지는 영국에서도 피부색이 정체성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614년 ‘포카혼타스(Pocahontas)’로 알려진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추장의 딸(마토아카)이 평민 출신의 영국인 존 롤프(John Rolfe)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이렇게 걱정했다. “공주(포카혼타스)가 평민(존 롤프)과 결혼하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종교, 신분, 재산에 따른 취향 차이, 태동하던 민족 의식 등이 ‘우리’와 ‘그들(타자)’을 가르는 더욱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시켜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면서 유럽 인을 중심으로 흑인(노예)과 대비되는 백인(주인) 같은 피부색이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냥하고, 사고팔고, 갖은 학대를 하면서 부리려면 ‘그들(흑인)은 우리(백인)와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똬리를 튼 백인종-흑인종의 대립 쌍은 오늘날 백인종-황인종-흑인종으로 위계질서 지어진 피부색에 따른 뿌리 깊은 인종 차별로 이어진다.


앞에서 언급한 포카혼타스의 초상화야말로 ‘백인의 탄생’ 과정을 보여 주는 증거다. 포카혼타스는 남편과 함께 영국을 방문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죽는다. (1617년) 그녀가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포카혼타스의 초상화는 점점 백인 여성을 닮아 간다. 마치 중동의 구릿빛 피부색 예수의 초상화가 유럽에서는 전형적인 백인 남성으로 묘사된 것처럼 말이다.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다

과학은 가지각색 피부색의 실체가 햇빛과 진화가 빚은 앙상블의 결과일 뿐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는 경찰이 매년 수십 명의 무장하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사살한다. 오죽하면, 21세기에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라고 외치겠는가? (검색 엔진에서 “#BlackLivesMatter”를 검색해 보기 바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북아시아 끄트머리에 사는 한국인이 백인종의 인종 차별을 내면화한 모습은 어떤가?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정작 돈 좀 있는 백인은 자연광으로 피부를 태우기 위해서 휴가철만 되면 햇빛 좋은 곳으로 떠나고, 틈만 나면 인공 빛에 피부를 구릿빛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피부색을 둘러싼 혐오와 차별을 언제쯤 끝장낼 수 있을까?


2014년 미국 백인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 청소년에게 총기를 사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이후 뉴욕에서 일어난 #BlackLivesMatter 시위. Ⓒ The All-Nite Images.




강양구

프리랜서 지식 큐레이터.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프레시안》에서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부안 사태, 경부 고속 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다.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프레시안》 편집부국장, 코리아메디케어의 콘텐츠 본부장(부사장)으로 재직했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1, 2』,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과학 수다』(공저), 『밥상 혁명』(공저), 『침묵과 열광』(공저), 『정치의 몰락』(공저),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공저),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공저)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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