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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서 태어난 모든 이들을 위한 책 본문
한국의 대표 과학 저술가 하리하라가 들려주는, 교과서도, 노벨상 수상자도, 유튜브도 가르쳐 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생물학 에세이 『엄마 생물학』에 대한 리뷰를 《과학동아》의 이영혜 편집장이 보내왔습니다. 이영혜 편집장은 지난 3월 12일 송기원 연세대 교수님과 이은희 선생님이 함께 참여했던 북토크, “생명과 그 깃듦에 관하여”의 사회를 맡기도 했던지라, 하리하라 선생님이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한발 먼저 직접 듣고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다섯 살,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엄마이자 과학 잡지 편집장인 내게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시간과의 전쟁이다. 그런 일상 속에서 업무가 아닌 책을 읽고, 북토크까지 준비하는 일은 당분간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생물학』의 가제본을 받아들기 전까진 말이다.
서문을 읽기 시작하자 곧,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꼭 함께 읽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렇게 3월 중순 북토크를 무사히 마친 지금, 이 책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책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엄마 생물학』은 ‘하리하라’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이은희 과학 저술가의 신작으로, 과학이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엄마’에 관해 이야기한다. 출판사에서는 이번 책이 하리하라 작가의 ‘첫 번째 성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여기서 ‘성인물’이라는 표현이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청소년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책 제목에 ‘엄마’라는 단어가 쓰인 점이 신선하고 반가웠다.
누군가는 엄마이고, 누군가는 엄마에게서 태어났으며, 또 누군가는 언젠가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물학 책은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정작 그 과정을 겪는 ‘엄마’라는 존재에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 작가가 이런 ‘엄마’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질지 궁금했다.
몸이라는 실험실: 생물학의 가장 살아 있는 현장
목차를 보자마자 내용이 꽤 방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정에서 출산, 모유 수유, 육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깃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품는 전 과정을 차근히 따라간다. 이렇게만 들으면 흔한 과학 해설서와 무엇이 다를까 싶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임신과 출산을 단순히 숫자와 그래프에만 기대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가는 과학자의 실험실이 아닌, 여성의 몸이라는 ‘살아 있는 실험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가 비록 생물학 전공자이지만, 막상 임신과 출산을 겪어 보니생물학 책에서 말하는 설명과 실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더라고요. 평균과 통계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죠. 저와 같은 경험을 하며 좌절하는 분들에게 여러분이 잘못된 것도, 비정상도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어요. 알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니까요. 그래서 제 책 1부 「깃들다」의 첫 장 제목을 「당신이 겪은 일은 모두 자연스럽습니다」로 정한 거예요.”
(3월 12일 북토크 중, 하리하라 작가의 말)
실제로 이 책은, 시험관 아기 시술로 수정된 날은 같지만 태어난 날은 다른 세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담담하게 서술했지만 결코 순탄한 과정이 아니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은 난자가 배란되도록 유도하는 과배란 시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난소 과자극 증후군’이라는 부작용도 겪었다. 기형아 검사 수치가 높게 나와 양수 검사를 권유받고 심란해하기도 했으며, 심한 입덧, 배곧은근 분리, 허리 통증, 임신성 당뇨, 갑상선 항진증 같은 여러 가지 임신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임신과 출산을 통해 여성이 마주하는 낯선 몸의 변화와 그로 인한 불안과 놀라움을, 작가는 한 개인의 고백과 생물학 전공자의 시선을 나란히 담아 풀어냈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이미 희미해진 5년 전 출산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임신 3개월 차, 유산 위험으로 한 달간 병원 침대에만 누워 있었던 시간. 임신성 당뇨 검사를 두 번이나 받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던 일주일. 무통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아 극심한 통증에 떨었던 출산의 순간. 책을 읽으며, 내가 겪었던 그 낯선 순간들이 모두 자연스러운 일임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인간이다: 재생산의 도구가 아닌 사고하는 존재
2부 「살다」에서는 생물학적 관점을 넘어 진화론, 의학, 철학의 시선으로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지금까지 ‘엄마’는 주로 생물학적 기능의 상징으로 다뤄져 왔다. 단지 생식을 수행한 결과로 정의되거나, 여성의 몸은 생명을 유지하고 전달하는 통로로만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이은희 작가는 그런 통념에 조용하지만 단단한 언어로 반박한다. 그는 엄마를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엄마가 된 존재’로 바라본다.
과학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며 수많은 논문과 글을 읽었지만, ‘엄마’라는 정체성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장선에서 풀어낸 글은 드물었다. 사실 과학은 ‘엄마’뿐만 아니라, 여성 전체를 단편적으로 다뤄온 경우가 많다. 저자는 과학이 여성을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보는지를 비판적으로 되짚는다. 생리혈을 파란색 물감으로 표현하는 생리대 광고, 사냥꾼과 채집자라는 이분법으로 남녀의 본질을 구분하는 진화 심리학의 서사, 폐경한 여성은 당연히 불행할 거라는 사회적 통념까지. 여성의 몸을 둘러싼 익숙한 상징과 오래된 담론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그리고 그 비판은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과학적 근거를 따라가며 성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이 책은 감정에만 기대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깊은 공감과 지적 만족감을 동시에 안긴다.
면역학적 관용: 생물학으로 사회를 사유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3부 「품다」에서 ‘면역학적 관용’이라는 개념을 사회적 관용으로 확장해 낸 대목이다. 생물학에서 면역학적 관용이란, 어머니의 몸이 유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태아를 이물질로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상태를 말한다. 보통이라면 제거 대상인 이물질을, 임신 중에는 오히려 소중하게 품고 알뜰살뜰 보살핀다.
저자는 이 면역학적 관용이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타인을 대하는 지혜로운 태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임신 중 면역 체계는 정교한 균형을 유지한다. 면역 반응이 너무 강하면 태아를 공격할 수 있고, 반대로 면역 기능이 지나치게 약해지면 외부 병원체로부터 엄마와 태아 모두를 지키기 어렵다.
책에서는 이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빗대어, 사회에서도 ‘나와 다른 존재’를 무작정 밀어내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균형 있게 판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명백한 선을 넘는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사회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는 뜻이에요. 사회적으로 어떤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끝까지 고수하는 게,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3월 12일 북토크 중, 하리하라 작가의 말)
과학이 단지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관계를 되돌아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 준다.
희생인가 전략인가: 모성의 지층에 깃든 감정들
북토크의 마지막 질문은 ‘모성이란 무엇인가?’였다. 저자는 인류학자 새라 블래퍼 하디의 책 『어머니의 탄생』(링크)을 인용하며, 모성은 흔히 떠올리는 희생적인 천사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냉철한 전략가에 가깝다고 말했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자신과 아이, 그리고 아이가 낳을 미래 세대의 생존까지를 염두에 두고, 한정된 자원을 최적으로 운용하려는 다양한 전략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사회는, 여성에게 전략적으로 출산할 만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면 답답한 지점이 많다. 정부는 각종 대책을 쏟아내지만 실질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출산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들을 향한 압박과 비난의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과거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어 배포했던 사례는 그 인식의 단면을 잘 보여 준다.
출산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하고, 난자 냉동이나 체외 수정 같은 보조 생식 기술이 뒷받침되는 시대라 해도, 여성에게 진정 중요한 건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다. 여성은 본능이 아니라 판단에 따라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기반, 충분한 돌봄 시스템, 경력 단절 없는 노동 환경이 갖춰져야만 출산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복지나 출산 장려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을 마련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결국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건, ‘내가 낳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때문이에요. 세상이 이 아이에게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죠.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저도 가끔은 고민합니다. 지금 같은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을까 하고요.”
(3월 12일 북토크 중, 하리하라 작가의 말)
『엄마 생물학』은 그 선택이 가능해지려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차분히 짚어 간다.
『엄마 생물학』은 누구를 위한 책인가?
이번 북토크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나흘 뒤에 열렸다. 여성, 모성, 생식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현장을 둘러보며 아쉬움도 남았다. 참석자가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생식과 생명, 돌봄과 책임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들, 출산과 양육을 곁에서 지켜봤거나 부모가 되는 것을 고민 중인 남성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충분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이 책은 엄마가 된 여성만을 위한 책도 아니다. 엄마에게서 태어난 모든 이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성의 몸과 삶을 둘러싼 통념을 차분히 되짚고, 과학과 사회 사이를 오가며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니 이 책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생명을 마주하는 누구에게나, 이 책은 깊은 의미를 남길 것이다.
★ 북토크 “생명과 그 깃듦에 관하여”의 영상은 곧 ㈜사이언스북스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영혜
《과학동아》 편집장. 전자 공학도가 되려고 했으나 복잡한 회로식 속에서 길을 잃고, 덕분에 《과학동아》의 기자가 됐다. 잡지 외에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경험했다. 저서로 과학 기자의 좌충우돌 ‘체험 취재기’를 묶은 『실험하는 여자, 영혜』, 번역서로 『빅 히스토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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