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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창밖의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 주는 일입니다.": 『기후의 과학』의 옮긴이 김희봉 편 본문
1996년, ㈜사이언스북스가 탄생하지도 않았던 시절, 손 편지 한 통이 민음사 편집부에 도착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한국 독서계는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천재성의 비밀』, 『사회적 원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같은 굵직한 과학 명저들을 번역한 과학 전문 번역가 김희봉을 얻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대학 연구실의 실험 기구들과 씨름하고, 밤에는 알파벳과 한글 사이의 좁고 깊은 길을 걸어 온 김희봉 선생님은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15종의 과학책을 함께 펴냈습니다. 이번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나베 슈쿠로의 대작 『기후의 과학』으로 돌아왔습니다. 기후 물리학이라는 낯선 정글을 헤쳐 나온 소회부터, 훌륭한 번역가가 왜 자기 책을 쓰지 못하는지에 대한 통렬한 고백, 그리고 AI 시대에 '책'이라는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의미까지 겨울비가 내리던 날, 따뜻한 커피 한 잔(그리고 약간의 커피 쏟음 해프닝)과 함께 나눈 80분간의 깊고 진한 수다를 전해 드립니다.

민음사TV부터 ‘힙 불교’까지, 변화하는 출판의 풍경
SB(사이언스북스 편집부):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시는 길은 어떠셨어요? 인터뷰 시작 전에 가볍게 요즘 출판계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저희 사이언스북스도 예전에 선생님과 함께 한창 일할 땐 시커먼 남자 편집자만 4명 있었는데, 이제는 세미콜론이나 반비 같은 임프린트의 편집자들도 생겼고, 디자이너와 마케터 등도 합치면 식구가 제법 늘었습니다.
김희봉: 그러게 말입니다. 회사 규모가 몰라보게 커졌네요. 민음사,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편집부가 한 층에 다 모여 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런 전문 스튜디오까지 있고 말입니다. 요새 유튜브 알고리듬을 타다 보니 저도 '민음사TV'를 얼핏 본 기억이 납니다. 여기가 그걸 촬영하는 곳인가 보군요.
편집자들이 직접 나와서 책 이야기를 하던데, 그게 요즘 그렇게 파급력이 막강하다면서요? 세계 문학 전집도, 어디 다른 출판사 책들도 그 채널에서 한 번 언급되면 판매량이 달라진다고 들었습니다. (웃음)
SB: 예, 맞습니다. 도서전에 가면 저자 사인회 줄보다 민음사TV에 나오는 마케터나 편집자 사인받으려는 줄이 더 길 정도니까요. 완전히 유튜브의 시대가 된 거죠. 혹시 아시나요? 사이언스북스도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심지어 2010년 5월에 채널 개설을 했으니, 벌써 15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구독자 수는 3만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민음사TV를 보면 젊은 독자들이 ‘텍스트’, 문자 문화를 굉장히 사랑하는 느낌이 듭니다.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단어 있지 않습니까. 아날로그 독서 문화를 굉장히 멋있어 하는 요새 Z 세대 문화 말이죠. 그런데 과학 교양서의 텍스트는 힙하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요새 출판계의 또 다른 힙한 트렌드가 뭔지 아세요? 불교 책입니다. 명상이나 마음 챙김을 넘어 불교 색채가 짙은 책들이 아주 장사가 잘돼요. 시대가 참 재미있게 변하고 있습니다.
김희봉: (커피 뚜껑을 열다 살짝 쏟으며) 아차, 제가 유체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 보네요. 검은 옷이라 다행입니다. 출판의 트렌드도 유체처럼 계속 흐르고 변하는 모양입니다. 사이언스북스 채널은 저도 몇 편 봤습니다. 이명현 선생님인가요, 천문학 하시는. 민음사 유튜브 채널의 성공 요인을 보면, 결국 회사가 편집자들에게 완벽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창의성이라고 봐요. 누구에게 눌린다는 느낌이 없어야 진짜 재미있는 콘텐츠가 나오니까요. 참 재밌는 세상입니다.

『기후의 과학』, 기후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엄청난 ‘플러스알파’를 줄 책
SB: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죠. 이번에 마나베 슈쿠로라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와 앤서니 브로콜리라는 기후학계의 거장이 펴낸 『기후의 과학』이라는 기후 물리학 분야의 대작을 번역 출간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방대한 번역 이력에서도 다소 낯선 분야였을 텐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김희봉: 번역이 끝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데, 이번 책은 유독 그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텍스트를 완전히 꽉 잡고 휘두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물리나 화학, 수학 같은 전통적인 분야는 기본 개념을 완전히 잡지 못하면 아예 첫 문장부터 번역이 안 나갑니다. 그런데 기후 과학은 달라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용어들이 많다 보니 '대충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기초 지식을 탄탄하게 쌓지 못한 상태에서 원고를 밀고 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 번역을 여러 번 수정하고 다듬을 시간이 있었음에도, 근본적인 아쉬움이 해소되진 않았죠. 이번 작업을 통해 번역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자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SB: 단순히 단어의 뜻을 아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도 편집 과정에서 여러 번 원고가 오가며 많이 정제되었다고 느꼈습니다만.
김희봉: 맞습니다. 용어를 정확히 아는 것은 번역의 아주 기본적인 전제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학문 분야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갖추는 일이에요. 기후 과학에 대해 학자처럼 깊이 아는 것보다, 이 기후 모형이 어떤 뼈대로 이루어져 있고, 저자가 왜 이 부분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 큰 그림을 이해해야 합니다.
의사 소통이라는 건 결국 공통의 지식과 공감대가 있어야 가능한데, 번역가 스스로 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교과서적으로 아주 훌륭하고, 기후학 지식의 뼈대가 있는 분들에게는 엄청난 '플러스알파'를 주는 책입니다. 다만, 대기 과학과 1학년들이 읽는 입문서 정도의 배경 지식을 독자 스스로 조금씩 채워 가며 읽는다면 훨씬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장악형 번역자, 돌파형 번역자, 분할형 번역자, 그리고 마나베 슈쿠로
SB: 선생님의 번역 스타일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어떤 번역가들은 먼저 색인부터 번역해서 책의 구조를 일단 머리에 넣은 다음, 단숨에 밀고 나가는 방식을 쓰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어떤 식으로 책의 구조를 파악하고 작업을 해 나가시는지요?
김희봉: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글쓰기의 감각』 같은 책을 번역한 김명남 선생님 같은 분들이 그런 방식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원서를 머릿속에 다 집어넣고 한달음에 달려가는 건데, 번역가로서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똑같이 스티븐 핑커의 책을 번역하신 김한영 선생님처럼 인지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첫 페이지부터 무작정 정글도를 휘두르며 쳐나가는 식으로 번역해 가는 쾌도난마식 돌파형도 있죠.
하지만 인지적 부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한영 선생님의 방식이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사이언스북스 덕분에 김한영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뉴턴 평전을 함께 번역한 적이 있는데, 얽히고설킨 문장들의 정글을 원어민처럼 단숨에 파악할 수 없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보여요.
저는 대학 졸업 후 전업 번역가를 해 보려고 하다가 대학 교직원으로 직장인이 된 케이스라, 머릿속 인지 공간을 한꺼번에 비워 둘 수가 없었습니다. 번역도 일과 휴식 사이 짜투리 시간을 내서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철저하게 분할하는 방식을 씁니다. 아침에 오늘 작업할 분량, 한 10페이지 정도를 정독해서 머릿속에 넣어 둡니다. 그리고 1시간 번역하고 쉬고, 다시 1시간 번역하는 식이죠. 하루 작업이 끝나면 일관성이 있는지 체크하고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이라고 할까요? 다 끝내놓고 텍스트 안에서 말이 되도록 네다섯 번씩 뜯어고칩니다.
SB: 그런 꾸준함이 마나베 슈쿠로 박사의 연구와도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로서 노벨상을 받은 마나베를 보실 때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김희봉: 감히 노벨상 수상자를 평가할 순 없겠지만, 마나베뿐만 아니라 뛰어난 학자들을 보면 가장 존경스러운 점이 바로 그 '지속성'입니다. 하나의 좁은 주제를 평생 동안, 어떻게 보면 지치지 않고, 쉬지 않으며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추구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게 잘 안 되는 성향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게 궁금하다' 싶어서 파고들다가,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흥미가 급격히 떨어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한 우물을 파서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처럼 그림자 속에서 결정적인 통찰만 던져 주고 홀연히 다른 분야로 떠나 버린 막후의 천재들에게 개인적으로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노벨상은 못 받았지만.

위대한 번역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SB: 방금 '그림자 속의 천재들' 이야기를 하시니까 생각납니다. 십수 년 전 술자리에서 선생님께서 레오 실라르드 같은 과학자들을 다룬 책을 직접 쓰시겠다고 기획안까지 구상하셨잖아요. 그런데 결국 안 쓰셨죠. (웃음) 번역을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자신의 저술을 내지 못하는 딜레마가 있는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희봉: 아주 뼈아픈 질문이네요. 사실 의문일 것도 없습니다. 번역가는 비유하자면 '건축 시공업자'입니다. 완성된 훌륭한 설계도를 보고 건물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짓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런 시공업자에게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건축 공모전에 당신이 직접 설계도를 그려서 출품해 보시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번역을 오래 하다 보면 눈은 한없이 높아집니다. 세기의 천재들이 구조화해 놓은 완벽한 텍스트를 매일 들여다보잖아요. '야, 이런 엄청난 책이 있는데 내가 굳이 책을 또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죠.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구조가 없는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구조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는 공력이 우리에겐 부족한 겁니다. 게다가 요즘은 챗GPT나 제미나이한테 물어보면 30초 만에 그럴싸한 책 기획안이 뚝딱 나오는 무시무시한 세상 아닙니까? 이런 세상에서 내가 내놓을 만한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손편지와 함께 시작된 30년의 인연
SB: 선생님과 저희 사이언스북스의 인연은 무려 사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1년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출간으로 공식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그 첫 만남의 기억을 좀 들려주시겠어요?
김희봉: 실은 사이언스북스라는 이름이 탄생하기도 전인 1996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을 중퇴하고 번역과 백과사전 감수 알바 등을 하며 스스로를 전업 번역가라 여기던 시기였어요. 그때 인터넷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민음사에 직접 편지를 보냈습니다. "과학책을 번역하고 싶다."고요.
한참 소식이 없다가 그해 가을쯤, 당시 이갑수 편집장(현 궁리 출판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다녀오느라 연락이 늦었다며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 길로 달려가서 한꺼번에 네 권의 번역을 의뢰받았습니다. 그게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네 번째 불연속』, 『천재성의 비밀』 같은 굵직한 책들이었죠. 나중에 사이언스북스라는 브랜드를 출범할 때, 저는 우리말 이름인 '궁리'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브랜드명은 사이언스북스로 정해졌지만, 그렇게 초창기 과학책의 뼈대를 세우는 작업에 동참했다는 게 참 뜻깊습니다.
SB: 사이언스북스의 탄생 비화 중 하나를 듣게 되는군요.
김희봉: 외서 검토도 하고 그랬어요. 검토 의견서 같은 것도 좀 쓰고. 그러고 보니 그때 민음사에 있던 편집자들 다 나가서 자기 회사들 만들었군요. 다 사장님들 되고. (웃음)

주경야독의 애환, 그리고 아쉬운 책들
SB: 번역 의뢰를 받으신 직후인 1997년에 대학 교직원으로 취업을 하셨죠? 전업 번역가에서 '주경야독'의 길로 들어서게 되신 건데, 애환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김희봉: 처음 몇 년은 괜찮았습니다. 화학과 연구실에서 ESCA(엑스선 광전자 분광기)라는 아주 고가의 장비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처음 두세 달 동안 영어로 된 두꺼운 매뉴얼 10여 권을 야근하며 다 읽어 버렸거든요. 조작법을 완벽히 숙지하고 나니 인지적 부담이 크지 않은 일이 되어서, 일하면서 틈틈이 번역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 위기는 2005년경 일반 행정직으로 옮기면서 찾아왔어요. 기계만 상대하다가 온종일 전화를 받고 수많은 사람을 응대해야 하는 업무를 맡으니,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더군요. 그때 번역 생산성이 뚝 떨어졌습니다. 과학 재단 번역 프로젝트도 엎어지고, 무엇보다 파동과 양자역학의 기틀을 다룬 레일리의 명저를 번역해 두고도 끝내 출간하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가장 뼈아픈 미련으로 남아 있습니다.
SB: 레일리의 책이 좀 아쉽군요. 언제 한번 저와 따로 얘기 좀 해 보시죠. 사이언스북스에서 낸 16종의 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책과 아쉬운 책을 꼽아 주신다면요? 그리고 절판된 책 중 꼭 부활시키고 싶은 책도 궁금합니다.
김희봉: 가장 뿌듯한 책은 단연 『천재성의 비밀』입니다. 제 스스로 과학 철학과 인지 과학의 모호했던 개념들을 번역 과정에서 선명하게 다잡을 수 있었고, 제 깜냥 이상으로 결과물이 잘 나왔다고 자부합니다. 반면 『사이언스 북』은 아쉬움이 큽니다. 당시 출판사 사정으로 마감이 너무 촉박해서 3~4주 만에 쫓기듯 번역해야 했거든요. 체력이 바닥나서 편집부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던, 미안하고 아쉬운 책이죠.
절판된 책 중 하나를 꼭 살려야 한다면 브루스 매즐리시의 『네 번째 불연속』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의뢰받았을 때 "이건 철학책에 가까운데 왜 과학 전공자인 제게 맡기십니까?" 하고 항변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보니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다룬 통찰이 엄청나더군요. 1993년에 나온 책이지만, 생성형 AI가 세상을 뒤덮은 지금 다시 읽어 본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새롭고 묵직한 화두를 던져 줄 거라 확신합니다.
SB: 그렇군요.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메모, 메모.

철학에서 과학으로 넘어가는 ‘개념’의 순간을 포착한다면!
과학 전문 번역자의 평생의 숙원
SB: 타 출판사에서 내신 다이슨의 유작 『미스터 빅 유니버스』나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같은 번역도 훌륭했습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는 1년 내내 매달리셨죠. 혹시 평생의 과업으로 꼭 번역해 보고 싶은 고전 원전이 또 있으신가요?
김희봉: 구체적으로 딱 어느 한 권을 꼽기는 어렵습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제대로 번역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미 다른 훌륭한 번역본들도 있고 역학 자체가 너무 어려운 분야라 선뜻 엄두가 나지 않네요.
대신, 제가 진정으로 욕심내는 기획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철학에서 과학으로 학문이 분화되어 가는 지점, 그 '개념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관성'이나 '운동량' 같은 개념이 과거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출발해 어떻게 엄밀한 현대 과학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는지 그 흐름을 짚어 보고 싶어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파스칼을 우리는 흔히 철학자로만 알지만, 사실 이들은 위대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습니다. 철학자의 면모에 가려진 이들의 과학적 인사이트를 파헤치는 작업을 누군가와 꼭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해석하는 일, 책의 존재를 사유하다
SB: 인터뷰가 막바지를 향해 갑니다. 후배 번역가들이나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만의 번역 철학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김희봉: 번역에 정답이 없는 이유는, 번역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A라는 언어를 B라는 언어로 바꾸는 기계적 치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독자를 방 안에 두고, 창밖의 풍경을 설명해 주는 일과 같습니다. 번역가가 창문에 바짝 붙어 서서 보느냐, 멀찍이 떨어져서 보느냐. 조명은 어떻게 칠 것이며, 어떤 각도에서 피사체를 비출 것인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과정이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 무엇으로 옮길까를 고민하기 전에, "가상의 우리 독자가 지금 이 텍스트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라는 시점을 먼저 정해야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독자의 시점과 시대의 요구가 달라지기 때문에, 재판을 찍을 때마다 번역을 또다시 뜯어고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SB: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희봉: 요즘 책이 하나의 '굿즈'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책의 물성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책이라는 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유를 수백 페이지의 물리적 한계 안에 압축해 놓은 결정체입니다.
존재라는 건 타자에게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당장 펼쳐 읽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그 책등의 제목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존재란 '영향력의 총합'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최근에는 챗GPT와 대화하며 번역을 막히는 부분을 묻기도 합니다. 이 인공 지능이 도서관의 책들을 학습해서 우리에게 답을 주듯, 이제 책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넘어 AI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획득했습니다. 책이 물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사유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당장 읽지 않더라도 일단 책을 사서 서재에 꽂아 두십시오.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독서의 시작입니다. (웃음)
SB: 한 가지 사족을 달자면, 이 인터뷰가 게재될 때쯤이면, 선생님과 저희를 연결시켜 준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의 2판이 1, 2권 모두 출간되었을 것입니다. 파인만 탄생 100주년 기념판을 바탕으로 본문의 오류를 수정하고, 역주를 보강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본문 레이아웃을 바꾸면 드디어 필름 인쇄에서 디지털 인쇄로 바꿨습니다. 1. 2권 합쳐 25만 부의 책을 찍어 내느라 25년간 고생해 준 필름을 드디어 은퇴시키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김희봉: 기대하고 있습니다.
SB: 그때 또 뵙고 식사 나눌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김희봉
연세 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과학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사회적 원자』, 『클래식 파인만』,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김희봉이 옮긴 사이언스북스의 책들*
(여기에는 절판 도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유쾌한 장난꾸러기, 리처드 파인만의 짜릿하고 경이로운 인생 모험담!

파인만의 가장 유쾌한 에피소드들만 엄선하여 다시 엮은, 시대를 초월한 과학 에세이의 정수.

"기후 과학을 대충 안다는 착각을 깨라!" 노벨상 수상자가 집대성한 가장 정교하고 완벽한 기후 물리학의 정석.

인간 사회의 복잡한 얽힘과 패턴을 '물리학'의 명쾌한 렌즈로 꿰뚫어 본 경이로운 사회 물리학의 대표 교양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어떻게 허물어지는가, 인공지능 시대를 예견한 선구적이고 철학적인 통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피카소의 큐비즘, 두 천재의 창조성이 폭발한 결정적 순간을 추적하다.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질서가 탄생하는지 파헤친 복잡계 과학의 눈부신 고전.

인류의 과학사를 바꾼 250개의 위대한 이정표를 눈부신 이미지와 함께 펼쳐보는 감각적인 과학 백과.

세상을 떠나기 전 파인만이 남긴, 과학과 인생 그리고 호기심에 관한 가장 생생하고 다정한 육성.

호기심 많은 소년은 어떻게 위대한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까? 청소년을 위한 최고의 파인만 전기.

『몽상의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절판)
과학의 한계를 넘어 우주와 인류의 미래를 거침없이 사유하는 반항적 물리학자의 묵직한 지적 회고록.

갈릴레이부터 스티븐 호킹까지, 현대 물리학의 거대한 뼈대를 세운 30인의 치열한 삶과 학문의 역사.

과학과 비과학, 진실과 거짓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탐구하는 깐깐한 회의주의자의 날카로운 시선.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는 9가지 크레이지 아이디어』(절판)
총기 소지가 범죄를 줄일까? 에이즈는 정말 HIV 때문일까? 엉뚱한 가설들을 검증하는 짜릿한 지적 실험.

신화가 되기 전의 아인슈타인, 지독한 사랑과 방황 속에서 상대성 이론을 잉태한 청년 시절의 치열한 기록.
'(연재) 과학+책+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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