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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에서 화학을 만나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페트라에서 화학을 만나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Editor! 2019. 12. 12. 10:55

(주)사이언스북스의 신간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들을 다루는 「사이언스-오픈-북」. 이번에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 ESC의 회장을 맡고 계시며 서울사대부고의 화학 교사이신 한문정 선생님이 보내 주신 특별 리뷰입니다. 한 선생님은 피터 앳킨스의 화학책 『원소의 왕국』과 『화학이란 무엇인가』를 리뷰해 주셨는데요, 요르단의 고대 성지 페트라에서 떠올린 글이랍니다. 페트라와 화학의 관계, 궁금하시죠?


 

페트라에서 화학을 만나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피터 앳킨스. 위키피디아에서.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보통 백팩에 책과 노트를 넣고는 꼭 한두 권의 책을 따로 빼서 손에 안아서 들었다. 그냥 다 백팩에 쑤셔 넣으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캠퍼스를 걷고 있는 그녀가, 혹은 그가 들고 있는 책을 보면 전공이 무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보통 제일 무거운 책을 손에 들었는데, 그때 기억나는 책이 『앳킨스 물리 화학(Atkins’ Physical Chemistry)』이었다. 사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제일 이해가 안 되던 과목이 물리 화학이었으면서(학점도 제일 나빴다.) 하얀 표지의 책을 안고 있는 것은 제법 ‘뽀대’가 나서 그런 똥폼을 잡았나 보다.

밀리언셀러급의 물리 화학 교과서 『앳킨스 물리 화학』. ⓒ (주)사이언스북스. 

그리고 화학 교사가 되고 나서 읽었던 화학 관련 교양서 중에 『원소의 왕국』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무심코 대학 때 배운 물리 화학 책의 저자와 『원소의 왕국』의 저자를 분리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두 책 다 저자가 누구냐고 말하면 같은 이름을 댈 정도로는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 책의 느낌이 너무 달랐기 때문인데, 그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학 때 이해도 안 되는 물리 화학을 원서로 꾸역꾸역 봐야 했던 괴로운 경험과는 달리 교사가 되어 접한 원소의 왕국은 아주 신선하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재밌게 읽은 겨우 한 줌의 화학 교양서 중 하나로 남아 있었기에, ‘몇 번에 걸친 서가 대방출 작전에서도 살아남았겠지…….‘ 하고 지금 서가를 뒤져 봤더니 역시나 고이 모셔져 있다.

스테디셀러 화학 교양서 『원소의 왕국』. ⓒ (주)사이언스북스. 

『원소의 왕국』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도시를 떠오르게 한다. 이 왕국에는 인류의 문명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 보물 지도가 바로 주기율표다. 이 지도에는 서로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는데 보통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완만하다. 사막 지역이 야트막한 계곡과 뒤섞이고 계곡은 협곡으로 변하기도 하고 평원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언덕은 이내 하늘을 찌르는 산이 된다. 

『원소의 왕국』 18-19쪽. ⓒ (주)사이언스북스.
『원소의 왕국』 68-69쪽. ⓒ (주)사이언스북스.
『원소의 왕국』 78-79쪽. ⓒ (주)사이언스북스.


예를 들면 전이 금속은 황량한 서부 사막 지역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 위치한 수은은 사막 속에 홀로 있는 호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마치 내가 얼마 전에 다녀온 요르단의 광활한 사막과 협곡 속에 숨겨진 물의 도시, 페트라를 연상시킨다.

지도부터 찬찬히 살펴보면서 왕국의 지리를 익히고 나면 그다음으로는 왕국의 역사를 익히게 된다. 이 왕국의 역사는 창세기에 비유되는데, 왜냐하면 우주 역사의 시작인 빅뱅과 함께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신과 우주의 영역이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인간이 우주가 만들어놓은 원소를 하나씩 찾아내는 역사이기도 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은 인공원소를 만들면서 스스로 창조의 신이 되기도 한다.

원소의 이름은 각각 어디서 유래했는지, 왕국의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익힌 후엔 원소의 왕국의 정부와 제도를 통해 원소들 안의 규칙성을 알아보고 이 원소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되는지를 살펴본다. 그러다 보면 결국 주기율표 지도를 통해 ‘화학’이라는 보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 봐도 멋진 『원소의 왕국』을 뒤로하고 이번에 읽은 『화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이 책에는 보물 지도를 손에 넣고 왕국을 탐험하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 단숨에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비유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뭐랄까, 좀 투박하다. 그림도 거의 없고 폰트도 투박하고 여전히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지만 내용도 직설적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것은 화학의 거의 모든 것을 얇은 책 한 권에 이야기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 (주)사이언스북스.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고구마를 캐는 것 같다. 하나의 고구마에 다른 고구마가 줄줄이 나오듯 화학의 지식을 엮고 엮어서, 분절을 최소화하고 하나의 줄기로 만들었다. 화학 지식을 작은 토막들로 나누지 않고 연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드럽게 이어 주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한데 그런 능력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화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를 지어내고 그 스토리로 이 세상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피터 앳킨스에게서 진정한 대가의 향기를 엿보는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대학 다닐 때부터 대가였으면 이분은 나이가 몇 살이냐? 도대체…….)

살짝 우려되는 것은 거의 일반 화학 한 권에 해당하는 지식과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를 두껍지 않은 책에 담아내느라 그 지식이 굉장히 축약된 형태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나 먼 옛날이라도 화학의 맛을 보았던 독자들이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화학의 입문서로 이 책을 접하는 독자라면 압축된 문장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표지에 포함된 특별 선물, 주기율표. 오비탈 구조에 따라 주기율표를 채색했다. ⓒ (주)사이언스북스.

그러나 뭐 어떠랴. 화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지루하게 긴 책을 보다 질리느니 축약되면 축약된 채로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큰 줄기를 보는 것이 화학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는 「6장 화학이 이룬 것들」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이 장을 마무리하며 화학이 이룬 일들의 또 다른 측면을 거론하고 싶다. 자연에 대한 통찰이다. 화학자들이 가득 채워 놓은 지식의 창고를 통해 우리는 조그만 돌멩이에서 복잡한 생명체까지 물질들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통찰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고 자연을 또 다른 의미에서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기쁨이다. …… 화학을 통해 음식의 향과 섬유의 색깔과 구조, 습도 변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잎의 색깔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화학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렇다고 일상의 순간순간마다 화학을 되새길 필요는 없다. 다만, 어느 한순간 자연의 한 면을 온전히 이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이라는 세계를 여행한 독자들도 이와 비슷한 즐거움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백전노장의 마지막 소회를 들으며 나도 함께 기원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화학이라는 세계를 여행하고 나서 일상에서, 자연에서 그런 순간,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내가 고대 왕국 페트라에서 거대한 사암층이 구리를 포함해 붉게 피어나고 또 그 사암이 다른 금속을 포함해 초록으로, 노랑으로, 회색으로 화려하게 변주하는 것을 보면서, 화학의 터치를 느꼈던 바로 그 순간처럼.

페트라의 아름다운 풍경.


한문정
서울사대부고 화학 교사, 변화를 꿈꾸는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 ESC 대표.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화학이란 무엇인가』
화학 달인이 들려주는 반나절 화학 특강!

 

『원소의 왕국』
최고의 주기율책!

 

『역사를 바꾼 17가지 화학 이야기』 (전2권)
한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은 화학 교양서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 (전2권)
독약이 궁금할 때 몰래 읽는 책

 

『화학의 시대』
화학 교양서의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