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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탕인 물을 찾아서: 우리 모두『습지주의자』가 됩시다. 본문

(연재) 사이언스-오픈-북

흙의 탕인 물을 찾아서: 우리 모두『습지주의자』가 됩시다.

Editor! 2019. 12. 27. 09:50

아마도 2019년 사이언스-오픈-북의 마지막 글이 될 이번 서평은 한국 역사 소설을 대표하는 김탁환 선생님이 써 주셨습니다. 최근에 다녀오신 습지 사진들도 함께 보내 주셨습니다. 이 글을 읽은 후 『습지주의자』를 한 권씩 손에 드시고 주변 습지, 혹은 습지였던 마른 땅, 혹은 ‘흙의 탕’인 강가에 나가 ‘습지주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흙의 탕인 물을 찾아서:
우리 모두 『습지주의자』가 됩시다.

 

ⓒ 김탁환.

1.

촉촉한 것과 축축한 것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머금은 물의 양도 다르겠지만, 물을 부수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다른 매질과 동등하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김산하 선생은 촉촉한 것보다 축축한 것에 더 끌린다고 털어놓는군요. “물이 어엿한 구성 물질로서 제 속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랍니다.

『습지주의자』는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책입니다. 탁구 치듯 주고받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두 인물이 등장하죠. 한 사람은 양서류 이동 통로 영상을 만드는 감독이고, 다른 한 사람은 팟캐스트 「반쯤 잠긴 무대」의 진행자 김산하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민음사, 2011년)에 밀란 쿤데라가 등장하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감독의 이야기는 ‘-이다’체로 일화들이 이어지고, 김산하의 팟캐스트는 ‘-입니다’체로 습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감독은 양서류와 습지, 그리고 양서류 이동 통로의 의의를 알아 나가느라 분주하고, 책 속 김산하는 고급 지식과 주장들을 팟캐스트로 쉽고 단정하게 알려줍니다.

『습지주의자』를 읽어 가다 보면 패턴 아닌 패턴이 생기더군요. 감독이 등장하는 대목에선 1인칭 소설 읽듯 몰입하며, 팟캐스트 「반쯤 잠긴 무대」에선 계속 밑줄을 긋게 되지요. 습지가 뭍과 물이 함께하는 곳이라서, 책도 이처럼 중첩으로 짠 걸까요.

ⓒ 김탁환.

 

2.

이 책을 읽기 전 전라도 어느 습지를 두 시간쯤 걸은 적이 있습니다. 건설업자들이 넓은 오동나무 습지를 매립하여 건물을 세우자고 지방 자치 단체에 틈만 나면 건의를 한다더군요. 이 책에도 똑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툭하면 ‘노는 땅’ 또는 ‘허허벌판’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심지어는 매립되기 위해 존재하는 무엇으로 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습지가, 특히 서해안 갯벌의 눈부신 보물 같은 지역들이 그냥 ‘살처분’을 받아 저 밑에 묻혀 버렸죠.
─ 『습지주의자』, 54쪽에서

습지를 몇 군데나 알고 계시는지요? 이 책에 따르자면 습지는 “연못, 개울, 시내, 강, 호수, 논, 간조 시 수심이 6미터 이하인 바다”까지 다양합니다. 「무대 4」에서 김산하 선생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강이라고 할 것인가?”

가볍게 생각한다면, 강둑과 강둑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영역을 강이라 일컬으면 될 듯합니다. 약간 엉뚱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볼까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여행이라고 할 것인가?” 여행지에 도착하면 여행이 시작되고 여행지를 떠나면 여행이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꿈꾸며 준비하는 순간부터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곳의 나날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데까지 여행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요.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강물의 영역만 강이 아니라, 강물이 흘러넘쳐 잠기는 땅까지도 강에 넣자는 것이죠. 김산하 선생은 힘주어 강조합니다. 습지란 흘러넘쳐 번지는 물의 속성과 긴밀하게 연관이 있다고.

ⓒ 김탁환.

 

3.

『습지주의자』엔 『비숲』(사이언스북스, 2015년)에서 일찍이 감탄했던 김산하 선생 특유의 유머 코드가 가득합니다. 여러 차례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딱 한 번 크게 웃어 버렸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강이 다 ‘흙의 탕인 물’이거든요.
『습지주의자』, 196쪽에서

강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들어 왔지만, 흙의 탕인 물을 강으로 간주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흘러 흘러 다니다 보면, 김산하 선생의 표현처럼, 흙으로 대표되는 잡다한 물질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습지를 물 따로 흙 따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과 흙이 뒤섞여 한 몸이 된, 그러니까 흙탕물 상태인 겁니다.

ⓒ 김탁환.

 

4.

뭐니 뭐니 해도 도시를 습지가 없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꼽은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김산하 선생은 지구란 행성을 물과 관련지어 이렇게 설명하지요.

원래 지구는 물이 땅을 적시고 나면 여기 좀 고이고 저기 좀 스며들고, 여기저기 사정에 따라 다른 속도로 마르는 곳입니다. 햇볕에 노출이 잘 된 것은 빨리, 덜 된 곳은 느리게 수분이 증발하겠죠.
『습지주의자』, 47쪽에서

그런데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선 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고이거나 스미는 곳들은 더러울 뿐만 아니라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간주되지요. 물 한 방울 없이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도시인 겁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확장은 물을 머금고 있는 곳, 즉 습지의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이렇게 도시에서 물 없이 메마르게 사는 것이 옳은가, 라는 묵직한 질문이 이 책 전부를 감싸고 있습니다.

ⓒ (주)사이언스북스.

 

5.

습지주의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김산하 선생은 젖은 땅, 물이면서도 동시에 뭍인 습지에 묻히고 싶다고도 적었더군요. 과연 내가 습지주의자인지 아닌지 규정하기 전에, 우선 이 책을 읽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많은 양의 생명체가 살거나 의지하는 곳. 그런데 그 정도로 티가 나진 않는 곳. 그래서 쉽게 지나치고 쉽게 없어지는 곳”(291쪽)으로 나가 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습지를 걸은 기억조차 없는, 혹은 습지를 걷고도 그곳이 습지였는지를 몰랐던 이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조금 춥긴 하겠지만, 겨울 습지를 걸으며 흙의 탕인 물을 찾는 즐거움이 남다를 겁니다.

ⓒ 김탁환.


김탁환
소설가. 1968년 진해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하 소설 『불멸의 이순신』, 『압록강』을 비롯해 장편 소설 『혜초』,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허균, 최후의 19일』, 『나, 황진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목격자들』, 『조선 마술사』 , 『거짓말이다』, 『대장 김창수』, 『이토록 고고한 연예』, 『살아야겠다』, 『대소설의 시대』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 『진해 벚꽃』과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산문집 『엄마의 골목』,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 등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습지주의자』

『비 숲』

 

『대소설의 시대 1』

 

『대소설의 시대 2』

 

『불멸』